접시꽃 저녁

발행일 2020-06-30 15:09:0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접시꽃 저녁

윤경희

십리 길 오일장을 한걸음에 다녀오신 당신의 손에 들린 간고등어 한 마리 특별한 날도 아닌데 잘 차려진 오종종한 밥상

집집이 피어나는 굴뚝마다의 향연, 지붕 위 엎치락덮치락 시름하던 저녁놀 그 여름 툇마루 한켠은 은밀한 저녁이었네

키만큼 따라 크던 유년의 골목 어귀 대궁마다 함초롬히 피던 붉은 접시꽃 무리 말없이 뿌리 묻고 있는 당신의 마음이었네

윤경희는 경북 경주 출생으로 2006년《유심》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비의 시간』『붉은 편지』『태양의 혀』와 현대시조 100인선『도시 민들레』가 있다.

봄이 되면 온갖 꽃들이 피어나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꽃을 보는 마음은 제각각이지만 설레기는 마찬가지다. 그때마다 가슴 속에서 뭉클한 감정이 솟구쳐서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쓴다. 어떻게 저리도 꽃이 아름다울까 하고 탄복하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석류꽃, 수국, 비비추, 접시꽃 철이다.

접시꽃은 아마 접시 모양이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접시꽃은 차를 운전하며 달리는 강변길이나 바닷가 근처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볼 때가 많다. 요즘 피는 접시꽃은 키가 유난히 크고 색깔도 다채롭다. 줄기마다 다닥다닥 피어오르는 접시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접시꽃 저녁’은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십리 길 오일장을 한걸음에 다녀오신 당신의 손에 들린 간고등어 한 마리로 말미암아 특별한 날도 아닌데 잘 차려진 오종종한 밥상 앞에 앉는다. 집집이 피어나는 굴뚝마다의 향연, 지붕 위 엎치락덮치락 시름하던 저녁놀과 더불어 그 여름 툇마루 한켠은 은밀한 저녁이었다. 키만큼 따라 크던 유년의 골목 어귀 대궁마다 함초롬히 피던 붉은 접시꽃 무리를 보며 말없이 뿌리 묻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읽는다. 소박한 삶의 정경이 애틋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처럼 ‘접시꽃 저녁’은 전편에 끈끈한 가족애가 흐른다. 지금은 우리가 놓쳐버린 정겨운 분위기다. 철은 여름이었고 은밀한 저녁이 있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굴뚝 향연, 툇마루, 저녁놀, 유년의 골목, 붉은 접시꽃 그리고 당신은 영원토록 잊지 못할 그리움의 대상이다. 결구에서 드러난 심상인 당신의 마음은 곧 내 마음이 되어 오늘의 내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화자도 자신이 말없이 뿌리를 묻고 있는 한 존재가 된 것을 숙연히 자각하면서 그리움을 다독인다.

그는 또 다른 작품 ‘그 남자의 집’에서 화가 이중섭의 생가에서 느낀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남자는 가고 없었고 온기 없는 빈 집이라면서 소의 울음소리만 문고리에 걸어둔 채라는 대목이 이어진다. 눈이 번쩍 뜨이는 구절이다. 정말 문고리에서 소 울음이 흘러내릴 듯하다. 그렇기에 기막힌 불운의 시대가 통증처럼 치받칠 만하다. 말없이 설렁대는 그의 남루한 눈빛이 좁은 방 짧은 행복으로 우두커니 걸려 있는데 지켜 선 멀구슬나무가 봄빛 마중을 나오고 있다. 이중섭은 이미 오래전 가고 없지만 그의 예술은 오래도록 남아 이렇듯 한 편의 시 속에서 또다시 빛을 발한다.

개성적인 시풍을 가진 시인의 ‘접시꽃 저녁’을 들고 모처럼 고향집을 찾아가 흐드러진 접시꽃 앞에서 시를 읊조려본다면 또 다른 행복감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소리와 빛깔과 향기가 잘 어우러져서 마음 깊은 곳의 현을 쟁쟁쟁 울리는 시를 더 많이 읽고 외는 삶을 구가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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