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요즘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 중 하나가 EBS의 ‘지식채널e’이다. 방송국에선 단편적인 ‘지식’을 입체적으로 조명해서 시청자에게 ‘화두’를 던지는 프로그램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생각해볼 거리를 제공해주는 내용들이 많아 여운을 남기는 프로그램이다.

그 중에 인상 깊게 봤던 내용 중 하나가 ‘타조가 위기를 만나면?’이라는 5분 내외의 짧은 코너였다. 위기일 때 타조의 행동을 따와 ‘타조 효과(ostrich effect)’라는 현상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었다.

멍청하거나 아둔한 사람, 머리가 나쁜 사람을 흔히 조류에 비유를 한다. ‘○대가리’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닭이 대표적이다. 어리석은 사람을 표현하는 데는 타조도 빠지지 않는다. 타조는 맹수가 돌진해오는 위험에 처하면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위험이 보이지 않아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긴다. 이처럼 다가오는 위험신호를 외면하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없고, 회피하려는 현상을 타조 효과라고 한다.

TV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다른 실험 사례도 재미있다. 먼저 쥐를 상자에 가둔 다음 통로를 두 개를 만들어 열어두었다. A통로는 안전한 반면 B통로는 들어서는 순간 전기충격이 가해졌다. 쥐들에게 약한 강도의 위험을 주면 쥐들은 A통로로 탈출했다. 그러나 다급하게 다가오는 위험에는 상당수의 쥐가 B통로를 택했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대신 눈앞에서 위험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선택을 한 결과다.

이성적으로는 위기일수록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고 다를까? 흔히 병을 키운다는 표현을 한다. 몸이 보내는 여러 이상 신호들을 괜찮아지겠지 하며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이 역시 몸의 이상이라는 진실이 두려워 위험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지다.

2009년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의 조지 뢰벤스타인 교수의 연구 결과가 재미있다. 경기가 나쁠 때 사람들은 평소보다 자신의 재무상태를 확인하는 정도가 오히려 50~80% 가량 감소했다. 살아나갈 궁리를 하며 대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불경기라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괜찮겠지 라는 믿음을 강화시켜 나간다.

타조효과는 경영학에서도 많이 언급한다. 여러 가지 위험 경고를 무시함으로써 위기에 둔감해져 심각한 손해를 끼치는 현상을 말한다.

2008년 9월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했다. 이를 시작으로 세계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휩쓸렸다. 중요한 건 이 회사의 회장이 여러가지 위험 징조를 보이는 보고를 모두 무시했다는 점이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위험성, 금융시장의 불안 요인 증가 등의 목소리에도 귀를 닫았다. 심지어는 다가오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수정을 요구한 리스크관리책임자를 파면하기도 했다. 위기에 둔감해진 결과는 심각했다. 150년 역사의 리먼 브러더스는 파산했고 투자사들의 연쇄도산이 이어지며 전 세계 금융시장이 휘청거렸다.

이처럼 애써 문제를 외면하고, 피하려는 경향은 타조가 도망갈 궁리를 하는 대신 머리만 모래에 처박는 행동과 똑 같다. 좋지 않은 상황을 헤쳐 나가기보다는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꿩은 머리만 덤불 속에 감춘다’는 속담과도 같다.

그러나 사실 타조는 영리한 동물이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퍼트린 내용일 뿐이다. 타조는 눈앞의 위기를 외면하려고 머리를 감추는 게 아니다. 날개가 있는 타조는 날지를 못할 뿐 시속 70km로 달리고, 한 시간에 50km를 달릴 수 있는 지구력까지 있는 동물이다. 시력도 인간의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25.0에 달할 정도여서 10㎞ 떨어져 있는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까지 갖췄다. 타조가 머리를 처박는 건 뛰어난 청각으로 땅의 울림을 감지하기 위한 행동이다. 맹수의 크기와 위치를 파악해 도망갈 것인지, 발차기로 싸울 것인지 결정하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인간이 타조보다 못할 경우가 더 많다. 위기가 닥쳤을 때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머리를 땅에 묻는 것은 타조가 아니라 사람의 행동 아닐까. 지금 경제는 위기다. 몇 년째 이어오고 있는 위기이지만 요즘 슬그머니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왔다. 그 와중에 북한은 연일 위협을 퍼붓고 있다. 타조를 조롱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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