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 문화재

▲ 청도 운문사 전경
▲ 청도 운문사 전경
코로나19로 일상생활이 바뀐 지도 벌써 4개월이 넘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찾아오면서 땅에는 새싹이, 나무에는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봄 풍경, 정취를 느껴볼 틈도 없이 여름이 가까워 오면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마스크처럼 답답한 연속의 나날이다.

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청도 운문사로 향했다. 대구에서 가까우면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해서다.

수헌(壽軒) 이중경(1599~1678)이 쓴 오산지(鰲山志)에 따르면 청도는 예로부터 ‘산과 시내가 맑고 아름다우며 큰길이 사방으로 통한다’는 ‘산천청려, 대도사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말 그대로 운문사로 향하는 길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운문댐을 지나 구비진 길 사이사이엔 신록의 짙푸름이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고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신록 속에 가라앉은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맡아보는 자연 그대로의 공기인지. 적어도 이곳에서 코로나19는 먼나라 이야기임을 새삼 느낀다.

차를 멀리 주차해놓고 운문사까지 걸어갔다.

주차장에서 운문사로 향하는 길은 어린이들도 쉽게 걸어갈 수 있을만큼 쉬운 길이다.

여느 사찰과 달리 계단이 많지 않다. 천천히 걸으며 절로 향하는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스스로의 삶을 한 번쯤 되돌아보라는 부처님의 뜻이 아닐까.



▲ 청도 운문사 비로전내 수미단 위에 안치된 소조비로자나불좌상.
▲ 청도 운문사 비로전내 수미단 위에 안치된 소조비로자나불좌상.
◆비로전

운문사에 도착하자마자 비로전으로 향했다.

보통 대웅보전이 사찰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운문사의 경우 비로전이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로전은 1105년(고려 숙종 10년) 운문사 제3중창주인 원응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불전이다. 1985년 보물 제835호로 지정됐다.

현재 건물은 2006년 해체 수리 당시 종도리에서 발견된 ‘순치십년계사구’에 상량했다는 묵서명을 통해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중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종도리 묵서명과 함께 발견된 ‘운문사 법당 기문’과 ‘건륭 삼십팔년 계사 유월 십삼일 대웅전 중집기’, ‘불기 이천구백육십이년 대웅전 중집약기’ 등을 통해 1653년 중창한 이유와 그 후의 중수 사실도 알 수 있다.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조선 후기 불전으로는 큰 규모에 속한다. 기단은 크고 작은 자연석에 진흙을 다져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이용해서 마무리한 혼합식 기단이다. 양 측면과 정면에는 4면의 장대석 디딤돌을 이용해 계단을 마련했고 정면 계단 좌우에 해태 두 마리를 두었다.

기단 위에는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주춧돌인 덤벙주초를 놓고, 외진주(바깥기둥) 12기와 내진주(안둘렛기둥) 2기 등 총 14기의 기둥으로 평면을 구성했다. 창호는 전면의 어칸에는 5짝 분합문을 달고 협칸에는 4짝 분합문을 달았다. 측면에는 2짝 분합문을 두었다. 배면의 좌우 협칸은 쌍창으로 구성하고 어칸에는 2짝 분합문을 달았다. 다른 창살이 격자무늬인 것과는 달리 전면 어칸 창살은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로전에 들어가 보니 ‘#덕분에 챌린지’를 하고 있는 듯한 불좌상이 눈에 띈다. ‘덕분에 챌린지’는 코로나19로 힘쓰고 있는 의료진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캠페인의 일종이다.

한 눈에 보아도 흔히 알고 있던, 그동안 봐 왔던 부처님의 모습과는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비로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불상으로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503호로 지정돼 있다. 비로자나불은 부처님의 원래 모습인 진리 자체를 상징하며 ‘진신’ 또는 ‘법신’이라고 한다.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 210㎝ 무릎 너비 152㎝로 중형 규모다. 머리는 나발에 중간 계주와 정상계주를 표현했다. 상호는 반쯤 뜬 눈에 오똑한 콧날, 꽉 다문 입술을 표현해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수인은 가슴까지 들어 올린 후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을 취했으며 다리는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좌상의 가부좌 형식에서 일반적인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오른발을 왼발 앞에 놓아 반가좌의 자세를 취했는데 이런 자세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는 1755년 처일의 주도로 총 19명의 화승이 모여 제작한 불화다. 현재 보물 제1613호로 지정돼 있다.
▲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는 1755년 처일의 주도로 총 19명의 화승이 모여 제작한 불화다. 현재 보물 제1613호로 지정돼 있다.
◆도둑도 가치를 알아본 탱화

소조비로자나불좌상 뒤로 탱화가 눈에 들어온다.

비로전에 봉안돼 있는 후불탱인 ‘비로자나삼신불회도’다.

비로자나삼신불회도는 1755년 임한을 수화사로 19명의 화승이 제작했다. 현재 보물 제1613호로 지정돼 있다.

삼신불회도는 법신 비로자나불과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의 설법 장면을 표현했다.

화폭이 가로 520㎝, 세로 460㎝로 큰 규모에 속한다.

화면은 크게 3단으로 구성됐다.

중앙에는 삼신불, 하단에는 협시보살과 사천왕, 상단에는 설법을 들으려는 십대 제자와 성중들이 표현돼 있다. 비로자나불 좌우로는 문수·보현 보살이 협시로 배치됐으며 하단에는 좌우 3위씩 총 6위의 보살이 자리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로자나불 아래 양쪽 각 4위의 보살이 대칭을 이루어 중앙에 집중된 모습이다.

또 상단에는 오색구름이 그려져 있고 좌우에는 타방불이 내려오는 모습이 표현됐다.

비로자나삼신불회도가 가진 가치는 큰 규모에 속하는 탱화임에도 잘 보존돼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삼신불회도는 존상의 배치 외에 도상적, 구도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18세기 삼신불회도의 경우 법신 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의 설법 장면을 각각 한 폭의 그림으로 구분해서 그리는 경향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이 삼신불회도는 한 폭에 법신, 보신, 화신의 설법 장면을 모두 묘사했다. 이로써 19세기 한 폭에 그려지는 삼신불회도의 구도가 완성되지 이전 형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비로자나삼신불회도의 가치는 문화재 도굴꾼들이 먼저(?) 알아봤다.

때는 1940년대 여름. 당시 한 스님이 아무리 잠을 자려고 해도 잠에 들지 못했다. 결국 새벽 2시께 툇마루에 잠시 앉아 있기로 했다. 그런데 비로전 안에서 수상한 불빛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수상함을 느낀 스님이 비로전으로 발걸음 했고 도굴꾼들이 탱화를 떼어 내려는 장면을 목격했다. 다른 스님들을 깨워 도굴꾼을 내쫓았다.

문화재보호법이 없던 시절인 1940년대에는 문화재 도굴꾼들이 판을 쳤다. 스님의 불면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비로자나삼신불회도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운문사에서는 이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운문사 비로전 천정에 있는 반야용선에는 반야줄을 잡고 악착같이 극락세계로 가려는 청의동자(악착보살)가 매달려 있다.
▲ ​운문사 비로전 천정에 있는 반야용선에는 반야줄을 잡고 악착같이 극락세계로 가려는 청의동자(악착보살)가 매달려 있다.
◆꼼꼼하게 보아야 보인다

비로전을 방문했다면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다. 가치 있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비로전에 들어갔다면 소조비로자나불좌상과 탱화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절에 온 만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구석구석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 충고를 하랴. 나 역시 고봉 스님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숨겨진 보물을 눈앞에 두고 못 찾았을 것이다.

소조비로자나불좌상 뒤로 작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부처님께 절을 올리기 전 오른쪽 어깨가 불좌상 쪽으로 향하도록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기 위해 마련됐다. 도는 이유는 ‘인도의 전통예법’에 따라 존경하는 대상에 대해 오른쪽 어깨를 보이는 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보통 오래된 사찰은 십중팔구 불좌상 뒤로 공간이 있다.

비로전 후불벽 뒷면에 서면 나란히 앉아 있는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가 보인다. 이 벽화는 보물 제1817호로 지정돼 있다. 화면이 크기는 세로 290㎝, 가로 524㎝다.

후불벽 뒷면에 관음보살도가 있는 예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 여수 흥국사 대웅전, 순천 동화사 대웅전,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등 10여 점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관음보살과 달마대사가 한 벽면에 나란히 표현된 것은 운문사가 유일하다.

화면 오른쪽에 그려진 관음보살도는 보타락가산에서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고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곳에 등장하는 백의관음, 선재동자, 정병, 청조, 청죽 등으로 이뤄진 화면 구성은 전형적인 보타락가산이 배경인 수월관음도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준다.

화면 왼쪽에는 험준하게 중첩된 암산의 깊은 암굴에서 수행하는 달마대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 수행했다는 일화를 실재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

이 벽화는 두 가지 다른 주제를 한 화면에서 다루지만 관음보살의 보타락가산과 달마대사의 소림굴이 단절된 공간이 아닌 하나로 연결된 공간임을 강조한 구성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소조비로자나불좌상 앞으로 왔다.

그러니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인형이 보인다. 불단 서쪽 천장 아래에 반야용선에 오르기 위한 ‘청의동자’가 그것. 반야용선은 중생을 태워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다. 반야용선이 출발할 때 한발 늦은 보살에게 사공이 밧줄을 던졌고 청의동자가 붙잡고 배에 오르려고 한다.

청의동자와 반야용선을 누가 천장 아래에 매달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무 상태를 봐서 100~200년 전으로 추정할 뿐이다.

운문사 비구니들은 청의동자를 ‘악착보살’이라고 부른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악착같이 올라가고 수행을 위해서는 악착같이 참아야 한다는 뜻에서다.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에 갈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을 다다르기 위해서는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전염병과 싸우고 있는 지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반야용선에 오르려는 청의동자처럼 우리 스스로 코로나19를 이겨내기 위해 힘든 현재 상황을 조금 더 참고, 생활 방역을 철저히 한다면 코로나19 사태도 어느 순간 종식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