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소 묘비명

발행일 2020-06-04 14:23: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싸움소 묘비명

안주봉

1.광채를 뿜어내는 움푹 팬 눈자위에/ 뿔치기에 박혀 긁힌 상처는 쓰라린데/ 따가운 탐욕의 시선, 등줄기에 꽂힌다

밀리면 끝장이다 뚝심으로 버텨내다/ 힘 부쳐 등 돌리는 정직한 한 판 승부에/ 터지는 환호와 탄식, 돈다발이 뒤엉킨다

2.벼랑 끝 내몰려도 뻗대는 황소고집/ 우걱뿔 맞배지기로 왜구소 몰아냈던/ 국민소 불굴의 번개 눈 못 감고 잠 들다

안주봉은 시조의 고장 경북 청도 출생으로 2012년 시조21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한 편의 새로운 시조를 창작하기 위해 치열한 궁구에 힘쓰고 있는 시인이다.

경북 청도군 화양읍 삼신리에는 상설 소싸움 전용 경기장이 있다. 소싸움은 경북도의 대표적인 민속행사로 우리나라의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축제다. 청도는 감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현대시조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이호우·이영도 남매 시인이 출생한 시조의 고장이기도 하다. 해마다 가을이면 문학 한마당 축제가 청도에서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이호우·이영도 시조문학제다. 시조는 유장한 우리 민족시의 본류요 정수다. 청도의 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인이 시조문학의 현대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런 까닭에 청도군에서 오누이 시인의 시정신과 시적 배경, 사상과 철학이 갖는 의미를 재해석하고 현대문학의 토양으로 삼는 축제가 매년 개최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오누이는 시대의 저항정신을 시조로 풀어낸 점에서 독보적이다.

소싸움 전용 경기장은 문화의 세기를 맞아 향토 고유의 전통 민속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청도 소싸움을 세계적인 문화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고, 국내외 관광객 유치를 통하여 한국관광의 메카로서 자리 매김하는 한편, 관광 수입 증대를 통한 지역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또한 청도가 세계적인 소싸움 관광지로 도약하기 위해 소싸움을 축제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건전한 레저 문화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뜻도 담겨 있다.

‘싸움소 묘비명’은 특별한 작품이다. 광채를 뿜어내는 움푹 팬 눈자위에 뿔 치기에 박혀 긁힌 상처는 쓰라린데 따가운 탐욕의 시선이 등줄기에 꽂히는 것을 느낀다. 밀리면 끝장이기에 뚝심으로 버텨내다 힘 부쳐 등 돌리는 정직한 한 판 승부에 터지는 환호와 탄식과 함께 돈다발이 뒤엉킨다. 벼랑 끝 내몰려도 뻗대는 황소고집으로 우걱뿔 맞배지기로 왜구소를 몰아냈던 국민소 불굴의 번개가 눈 못 감고 마침내 잠이 들었다. 번개는 청도소싸움축제 한일전에서 일본소 3두를 차례로 제압하여 방송 3사 전국뉴스에 ‘국민소’ 칭호를 받았던 싸움소다. 그도 명을 다하게 되면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눈을 감지 못했다. 남은 한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공직에 몸 담고 지내면서 늘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 말씀을 ‘그릇’이라는 단시조 안에 녹여 노래하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는 큰 그릇이 되라 하셨는데 나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릇(僞)될 것인가 아니면 그릇(器)이 될 것인가하고. 혹여 큰 그릇이 못되고 그릇된 사람이 될까 염려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그는 나름대로 우리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아버지의 뜻에 부응한 것이다. 더구나 시인으로 문단에 나와 활동하고 있으니 그릇됨과는 거리가 멀다. 올곧은 자세로, 남다른 삶의 철학으로 자신만의 분깃을 가진 그릇이 된 것이다.

어느덧 유월이 찾아와 녹음이 짙어졌다. 소싸움을 생각하며 무엇보다 생명을 지키는 일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싸움소 번개가 끝내 눈을 감지 못하고 떠난 것이 눈물겹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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