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꿈을 꾸지만 그 꿈이 같은 것은 아니다

▲ 시인 천영애
▲ 시인 천영애
사막에 사는 큰 낙타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불신과 경계는 해소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또 다른 불신과 경계가 생겨나기도 한다.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평화는 늙은이들의 인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네. 불신과 경계에 의해서.”

샘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사막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환대와 적의가 동시에 주어진다. 그 사막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아랍부족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로렌스는 그들의 불신과 경계를 깨고 환대를 받고 돌아온다.

영국군 장교인 원래 그의 목적은 중동전쟁에서 아랍 부족의 지원을 받아내는 것인데 막상 사막에 들어가자 그는 아랍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적의를 환대로 바꾸게 되는 지점이다. 사막에서 왜 아랍인들이 그들의 전통의상을 고수하는지 몰랐던 로렌스는 드디어 영국군 장교의 옷을 벗어 버리고 아랍인의 옷인 토브를 입는다. 사막에서는 사막의 옷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는 아랍인화 되어 간다.

아랍은 아랍의 독립이 필요했고, 터키는 터키의 독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영국군은 터키의 독립을 막기 위해 아랍인들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아랍인들은 서구의 사람들을 불신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요즘 흔히 보는 휴대폰으로 보기에는 아쉽다. 사막의 장대한 스케일과 풍경이 화면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랍과 영국이 동맹을 맺고 터키와 전쟁을 벌여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전쟁 영화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불신의 벽을 깨고 관계를 맺어 나가는지를 보여 준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내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진리를 넘어 로렌스는 진정으로 아랍을 이해하고 아랍을 위한 전투를 치른다.

이 영화는 영화보다 책으로 먼저 접했다. 서구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있다면 아랍에는 ‘지혜의 일곱기둥’이 있다. ‘지혜의 일곱 기둥’이란 말은 구약 성서에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란 말에서 인용한 것으로 일곱 기둥이란 아브라함의 종교의 천국, 즉 일곱 개의 천국이다. 이 일곱 천국은 일곱 개의 천국의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상층에 있는 것이 아라봇이라는 천국으로 불교의 열반 쯤에 해당될 것이다. 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품절 되어 버린 이 책을 찾느라 중고서점을 한참 뒤진 기억이 새롭다.

실제로 로렌스는 전쟁 영웅도 아니고 영국이 중동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내보낸 스파이도 아니다. 그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일체의 척도를 거부하고 자유와 고독을 선택한 조르바 같은 남자이다. 그러므로 푸른 눈을 한 이방인으로 아랍의 사막에 들어가 몸을 던짐으로써 아랍인들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과 영화는 아랍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영국군 장교 로렌스의 자서전이며 꿈꾸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정서이다.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꿈을 향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로렌스는 그렇게 말하며 지혜의 빛, 열정의 빛으로 지금도 사막에 살 것만 같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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