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학

발행일 2020-05-20 15:23:5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황순원

∼전쟁의 비극은 이제 그만∼

… 6·25전쟁이 발발한 해 늦가을이다. 국군의 진격으로 수복된 3·8선 접경 북쪽 마을이 그 배경이다. 성삼은 전쟁 이태 전에 3·8선 접경 남쪽마을로 이사하였다. 전쟁 발발 후 남쪽으로 피난 갔다가 치안대원으로 고향마을에 돌아왔다. 고향마을에 들어서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지만 지금의 고향은 옛날의 고향이 아니다. 전쟁이 한차례 휩쓸고 간 마을은 삭막하다. 죽마고우 덕재가 농민동맹 부위원장을 맡은 죄로 잡혀왔다. 성삼은 덕재를 호송하는 일을 자청한다. 두 사람은 담 모퉁이에서 호박잎 담배를 나눠 피고 밤 서리를 같이 하던 단짝동무다. 그 동안 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 서로에게 물어본다. 상대의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는 반응에 성삼의 마음이 열린다. 빈농에 근농이라 농민동맹 부위원장직을 맡았다고 한다. 함께 놀려먹었던 꼬맹이와 결혼했단다. 피난을 안 간 이유가 농토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덕재의 말에 성삼은 같은 경험을 해본 농민의 자식으로서 공감한다. 덕재가 이념과 무관한 농민이라는 사실에 성삼은 단짝동무로서의 신뢰를 회복한다. 고개를 내려온 곳에서 성삼은 주춤 발걸음을 멈춘다. 전쟁 통에도 전처럼 평화롭게 살고 있는 학 떼를 본다. 열 두어 살 때 성삼은 덕재와 같이 학을 잡아 애완동물처럼 갖고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서 누가 학을 쏘러 왔다는 말을 듣고 학을 풀어 주었다. 그 옛날 일을 생각하던 성삼이 학 사냥을 하고 가지며 덕재의 포승줄을 풀어준다. 어리둥절해 하던 덕재는 성삼의 의도를 깨달은 듯 잡풀 새를 기어 도망한다. 높푸른 하늘엔 단정학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

순박한 이웃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보통사람을 살인자로 만든다. 군복을 입거나 완장을 차고 죄의식 없이 저지른 살인이라고 괜찮은 건 아니다. 전쟁은 신뢰를 무너뜨리고 파멸을 낳는 악마적 이벤트다. 신봉하는 이념을 실현시켜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야욕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전쟁을 없애야 무모한 집단 살인을 막는다. 다시는 참혹한 전쟁이 재발되지 않도록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은 작가의 영역이기도 하다. 「학」에서 추구하는 테마다. 한편의 감동적인 문학작품이 총칼이나 사자후보다 더 효과적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적으로 만난 단짝친구의 얄궂은 운명으로 구체화된다. 어린 시절 추억을 공유한 두 사람이 본인의 의사와 달리 적이 되어 고향마을에서 조우한다. 사는 곳이 남북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던 이유로 적이 되었다. 다른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적의 없는 친구를 포로로 잡았다. 전쟁이 지나간 고향마을은 옛날 고향마을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살벌한 분위기다. 동네어른들도 치안대원인 성삼을 만나면 엉거주춤 뒷짐을 진 채 성삼의 눈치부터 살핀다. 고향의 산천과 들판은 비록 변함이 없지만 이웃 간의 정과 믿음이 무너졌다. 고향의 푸근함과 고향사람의 정감이 사라졌다. 도망가도록 풀어주었지만 총을 쏠까 봐 눈치를 보았다. 죽마고우마저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이 아이러니컬하다. 성삼도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풀려난 덕재가 도리어 성삼을 해코지하는 상황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전쟁터에선 상대방을 죽여야만 내가 산다. 한창 전쟁 중에 적군을 믿기엔 세상이 너무 뒤숭숭하다. 포승줄을 풀어주고 또 숨어서 도망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학을 살리려고 하늘로 날려 보내던 해맑은 휴머니즘을 본다. 사랑과 믿음을 간직하는 한 희망은 있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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