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조기섭

달이 뜨는/ 언덕에서/ 흰머리를 설레고 있었습니다/ 모진 세월에 바래인/ 순백의 머리칼을/ 조용히 빗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운 이름들/ 이제는 소원히/ 영(嶺)을 넘고,/ 아무것도 소망할 수 없는/ 잎 다 진 계절의/ 빈 언덕 길,/ 세월에 바래인 영혼 하나/ 나즉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마을』 (화니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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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는 사람 키보다 큰 다년초 식물로 강가나 호숫가 또는 개울가 등 습지에 군락을 지어 자생한다. 갈대라고 하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이는 갈대의 약한 모습을 은유한 표현이다. 인간은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사유함으로써 비로소 위대하다는 진리를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명언이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제3막 아리아에서 만토나 공작이 부른 칸초네 ‘여자의 마음’에 나오는 갈대도 유명세를 탄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이라 노래했다. 이 노랫말도 파스칼의 명언 못지않게 친숙하다. 또 대중가요 가수 박일남이 불러 유행시킨 ‘갈대의 순정’도 뺄 수 없다. 남자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한 메타포가 특이하다. 여자와 남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다는 비유는 갈대가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속성에 착안한 은유다. 여자의 마음도 갈대, 남자의 마음도 갈대,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명제로 귀결되는 억지춘향이 우습다. 무리지어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갈대는 바람에 쉽게 휘어지긴 하지만 잘 꺾이진 않는다. 이러한 갈대의 강인한 모습을 인상 깊게 지켜본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갈대의 메타포가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그 상징성이 만인의 공감을 사기 때문이다. 바람에 잘 흔들리는 특징 외에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듯 보이는 자연스럽고 의연한 갈대의 자태도 주목 대상이다. 갈대를 평화로운 풍경이나 한가로운 정경으로 차용한 경우가 그러하다. 김소월 시인은 갈잎의 평화롭고 한가로운 느낌을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서 잘 살려내었다.

갈대꽃 무리가 한 줄기 바람에 술렁인다. 언덕위에 뜬 달이 시인의 흰머리를 희롱한다. 시인이 갈대가 되고 갈대가 시인이 된다. 바람에 수군대는 갈대가 시를 읊고 시인은 갈대가 쓴 시에 화답한다. 조기섭 시인은 달빛 아래 일렁이는 희뿌연 갈대꽃의 향연을 보면서 우탁 시인의 백발을 본다. 백발가를 읊조린다. ‘한손에 막대 들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오랜 세월 햇살에 바래인 듯 희뿌옇게 일렁이는 갈대꽃은 모진 세월을 겪은 백발의 화신이다. 마음은 청춘인데, 검디검던 머리칼이 언제 하얗게 쇤 것인지. 이제 겨우 인생을 알 듯 하건만 머리엔 서리가 내리고 서녘 하늘엔 해가 저문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더니 어느 듯 가슴속 깊숙이 들어와 앉았다. 돌아올 수 없는 고개를 넘어 멀리 가버린 얼굴들이 그립다. 가기 전에 원 없이 사랑하고, 있을 때 잘 해 줄 걸. 소중한 만남에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에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돌아보면 무상하고, 숨 한 번 몰아쉬면 공으로 돌아가건만, 헛된 상념이 왜 그리도 많았던가. 아직 못 다한 말들이 남았는데 벌써 눈 어둡고 머릿속이 하얗게 쇠니 때늦은 깨달음에 백발이 어지럽다. 시인의 가르침이 귓전에 쟁쟁하다. 문득 고개 들어 먼 산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랜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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