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사랑의 비극은 무관심~

서머싯 몸

…미련스럽게 생긴 나이 든 배불뚝이 선장이 있다. 선장의 낡은 배는 사업차 사모아 원주민 마을의 작은 포구에 정박한다. 선장은 길을 잘 아는 사람같이 오솔길을 따라 개울까지 가서 다리를 건너간다. 거기엔 서양식 집이 있고 ‘닐슨’이라는 백인이 살고 있다. 닐슨은 선장을 집으로 맞아들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닐슨은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낯익은 느낌을 받는다. 닐슨은 그 곳에서 일어났던 사랑이야기를 선장에게 들려준다. ‘레드’라는 젊은 백인 조각미남과 ‘샐리’라는 아름다운 원주민 소녀의 사랑이야기다. 30년 전, 두 미남미녀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닐슨의 집 자리에 있던 오두막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레드는 섬을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샐리는 레드를 일편단심 잊지 못했다. 그 때 닐슨은 폐결핵을 앓아 사모아로 들어와 요양하고 있던 참이었다. 맑은 자연환경과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건강을 되찾은 닐슨은 사랑을 잃고 괴로워하던 샐리를 우연히 만났다. 닐슨은 우수에 찬 샐리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닐슨은 주위의 도움으로 샐리와 결혼하여 같이 살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오직 레드만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십오 년이 흘렀다. 샐리도 살이 처지고 검붉게 변했다. 살찌고 흉측한 선장이 나타난 것은 그 때쯤이다. 이야기를 마친 닐슨이 선장의 이름을 묻는다. 선장은 원주민들이 자신을 ‘레드’라고 부른다고 멋쩍게 말한다. 닐슨이 평생 질투했던 연적이 천박한 모습으로 눈앞에 앉아있었다. 그때 샐리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극적으로 상봉한다. 놀랍게도 샐리는 레드를 알아보지 못한다. 샐리가 그리워한 연인은 아폴론을 닮은 스무 살의 조각미남이다. 닐슨은 사랑의 허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무엇 때문에 이런 여자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가. 닐슨은 형의 병 핑계를 대면서 샐리를 떠날 생각을 드러낸다.…

세월이 가면 누구나 젊은 날의 빛나는 모습을 잃는다. 영원한 건 없다. 불타오르던 남녀 간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차갑게 식는다. 사랑하는 연인이 급작스레 헤어지는 잔인한 운명은 어쩌면 축복일 수 있다. 마르고 닿도록 살아서 서로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상황이 가혹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운명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은 좀처럼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열병을 앓는다. 뜻하지 않은 별리로 인해 펼쳐지는 고뇌에 찬 삶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일진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그게 행복에 겨운 비명으로 비칠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고통이다. 사랑의 진정한 비극은 죽음도 별리도 아니다. 하루만 못 만나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했던 연인이 그냥 무덤덤하게 되거나 어디서 뭘 하는지조차 서로 궁금하지 않는 상황은 우울한 비극이다. 진정한 비극은 무관심이다.

닐슨은 샐리를 사랑했지만 샐리는 떠나간 레드를 사랑했다. 엇갈린 사랑이다. 한때 사랑했던 두 사람의 재회는 그 연인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그 극적인 순간은 허무하게 끝난다. 진정한 사랑과 다정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여차하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떠나갈 것 같았던 상상은 사랑의 천박한 허상이다. 오랜 시간 동안 속은 것이 분하다. 사랑의 이름으로 어렴풋이 비쳤던 맑은 영혼마저 산산이 흩어진다. ‘서머싯 몸’은 「레드」에서 사랑과 외모의 허무함과 부질없음을 잘 보여준다.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채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리는 건 또 웬일일까.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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