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돌 하나 나 하나

서연정

형상이 화려한가 향낭이 있길 한가/ 비바람 아픈 매질 온몸에 받는 바위/ 생식의 방법이라곤 깨어져 뒹구는 것/ 피 맺힌 속울음은 꽃문양을 새긴다

가슴을 깨는 소리 귀 시린 노래일까/ 바닷가 몽돌밭 가득 꽃내 살내 비리다

슬쩍슬쩍 지나친 모서리 골목에서/ 반만 뜬 눈 반만 연 귀 서로가 낯선 우리/ 그 모습 비로소 예서/ 말문을 둥글리고 있다

-『광주에서 꿈꾸기』(2018년, 미디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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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정은 광주 출생으로 1997년 중앙일보 지상시조백일장 연말 장원,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먼 길』『문과 벽의 시간들』『무엇이 들어 있을까』『동행』『푸른 뒷모습』『광주에서 꿈꾸기』등이 있다.

시대가 참 어수선한 때에 ‘몽돌 하나 나 하나’를 읽는다. 몽돌은 형상이 화려하지도 향낭이 있지도 않다. 비바람 아픈 매질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바위가 오랫동안 궁구하다가 생각해낸 것 즉 바위의 생식 방법은 깨어져 뒹구는 것임을 화자는 일깨워준다. 여기서 생식이라는 시어가 등장한 것은 뜻밖이지만 적절하고 재미있다. 바위가 오랜 날을 지내면서 피 맺힌 속울음을 머금은 것을 눈치 채고 그 울음이 꽃문양을 새긴다고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슴을 깨는 소리 귀 시린 노래일까, 하고 반문한다. 바닷가 몽돌밭 가득 꽃내와 살내가 비리기 때문이다.

끝으로 슬쩍슬쩍 지나친 모서리 골목에서 반만 뜬 눈 반만 연 귀 서로가 낯선 우리가 등장하면서 몽돌과 나, 우리와 몽돌이 내밀한 교감을 하며 비로소 예서 말문을 둥글리고 있음을 읊조린다. 바위의 생식 작용으로 이렇듯 삶의 의미는 심화·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 ‘방랑자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예측 불허의 코로나19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 작품 속에서 그러한 내용은 없다. 방랑이 아니라 방황이요, 우왕좌왕하며 안절부절못할 때가 많은 시대다. 요즘 사람들은 너나나나 할 것 없이 광활한 신대륙에 미궁을 짓기 위해 갖은 힘을 다 쏟고 있다. 만나자마자 친구여, 하면서도 내미는 그 손은 차갑다. 어느새 SNS 젖꼭지 물고 외로운 이야기꾼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타인의 기억에서 삭제될까 봐 불안해하고, 소리를 따라다니며 그림자를 드리우기에 급급해 한다. 미궁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의 메아리이기도 하다. 메아리도 그러한데 메아리의 메아리이기에 그 공허함의 정도가 어떠한지 상상이 갈 것이다.

우리는 장구한 역사 속의 한 점 티끌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자존이 있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불멸을 항시 꿈꾼다. 그래서 어떤 달콤한 꼬임에 쉽게 미혹되기도 한다. 시인은 명편을 남기기를 원한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할 때 세상에 널리 빛나기를 소망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작품으로 불멸을 꿈꾼다. 결코 불멸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언어는 미묘하고 생명력이 있어 좋은 작품은 스스로 역동성을 가지고 백년 이백년 후에도 인구에 회자할 수 있다.

숙연한 순례의 길에 한 줄의 시는 힘이 된다. 꿈 없이 어찌 인생을 경영하랴. 꿈꾸는데 가장 적합한 문학의 한 갈래가 시조가 아닐까? 혹자는 문학의 쓸모없음에 경악한다. 그러나 문학이 없다면 시민사회도 없을 테고 삶의 현장은 폭력이 난무하는 검투장이 될 것이다. 이왕이면 많은 이들이 시조를 읽고 썼으면 좋겠다.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 가운데 이만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닌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몽돌 하나 나 하나’를 쓴 서연정 시인, 빛고을 광주에서 더 많은 시의 꿈을 펼치기를 빈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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