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게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 1990)

..................................................................................................................

기다림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클수록 기다림은 애절하다. 미리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마음은 간절한 그리움이다. 기다림이 간곡하면 신경이 곤두선다. 발자국 소리에 지극히 민감하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랑이 쉽게 이루어지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핑크빛 마음을 용케 알아채고서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한다. 사랑은 제 때 이뤄지지 않는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기다림의 고통을 안다. 오지 않을까 불안·초조하다. 불길한 조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가고 상상은 현실로 다가온다. 잘못될 수 있는 일은 결국 잘못되기 마련이다. ‘머피의 법칙’이 기다림에도 적용된다. 문을 열고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지만 번번이 실망한다.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힘이 빠지고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애간장이 탄다. 기다림에 지치면 전화를 생각한다. 받지 않을까 봐 두렵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용기를 낸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왠지 받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이다. 세상 전부를 준다 해도, 목숨이 끊어진다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할 사랑이라면 애시 당초 시작하지도 않았다. 만남이 성사됐던들 그렇게 애절하였을까. 허나 가슴 속에서만 품어오던 사랑은 더욱 막무가내로 말릴 수 없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주저앉지 않는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지금 마냥 기다릴 때가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어코 만날 터이다. 아주 먼 곳에 있어도 상관없다. 사랑은 벌써 오래전부터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으리라. 사랑의 믿음은 확고하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이 아까울 따름이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간다. 행여나 길이 엇갈리면 어떠랴. 사랑하는 이여, 그대를 만나러 그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다오. 그대를 만나러 가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낼 수 없다. 불같은 열정을 어쩌랴. 지금 이 순간, 그대에게 가는 것 이상의 의연한 전략은 없다.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시인의 착어는 또 다른 은유를 품는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