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55) 후백제 견훤 (중) 왕건과의 싸움

발행일 2020-03-23 09:53:1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 지속적인 전쟁, 팔공산에서 왕건 신숭겸 도움으로 도망 구사일생

견훤산성은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 42번지 일대에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쌓은 산성으로 전해진다. 경북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산성의 동남쪽 성벽은 외부에서는 높이 15m 이상으로 높은 석축으로 쌓아 적군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견훤은 신라 사람이지만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백제를 건국해 스스로 왕이 되었다. 후백제 왕이 된 견훤은 당시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왕건의 고려와 심각한 대립현상을 보였다.

외교적으로는 후백제나 고려도 중국에 사대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견훤과 왕건이 서로 전쟁을 하면서 주고받은 편지글에도 사대적인 사상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견훤은 왕건과의 전쟁에서 크게 우세한 힘을 과시했다.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는 유명 장수들을 잃고 혼자 옷을 갈아입고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후백제는 건국 40여년 만에 패망하고 고려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말았다. 견훤은 전쟁에 이겼으나 정치에서 졌다는 사가들의 평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견훤과 왕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요약 소개한다.

산성 내부에는 우물지와 건축지 등의 유적이 남아 발견되고 있다. 산성의 외형 흔적 대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왕건은 918년에 수도인 철원의 민심이 변하면서 추대되어 고려 태조로 왕위에 올랐다. 견훤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공작의 깃털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 등을 선물했다. 견훤은 태조와 상극이었지만 화친하는 체하여 태조에게 푸르고 흰빛이 나는 명마도 선물로 보냈다.

925년 10월에 견훤이 3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도착하자 태조도 역시 정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승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태조는 작전상 화친해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려고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왕건은 4촌 아우인 왕신을 볼모로 보내고, 견훤도 역시 생질인 진호를 인질로 교환했다.

12월에 견훤이 거서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신을 후당에 보내 변국으로 자처하니 후당이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의 벼슬을 주고,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으로 하고 식읍을 2천500호로 했다.

동쪽 성문격으로 돌출된 성곽부분은 자연석에 다듬어진 돌을 석축처럼 쌓아 올렸다. 거대한 자연석을 곳곳에 활용해 성이 견고하다.
견훤은 926년 고려에서 진호가 갑자기 죽자 고의로 죽였다고 의심해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시켜 전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돌려보냈다.

927년 9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빼앗아 그 성에 불을 지르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가 군사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에 견훤은 고울부(지금의 울주)를 습격해 빼앗고 시림으로 진격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진격했다. 신라 왕과 그의 부인은 포석정에 나가 놀이를 할 때여서 크게 패하였다.

태조가 날랜 기병 5천으로써 공산 아래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인 김락과 신숭겸이 여기서 죽고, 모든 군사가 패배해 태조도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도망했다. 견훤이 승리한 여세를 몰아 방향을 돌려 대목성(지금의 약목)과 경산부와 강주를 약탈하고 부곡성을 쳤다.

930년에 견훤이 고창군(지금의 안동)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에서 여러 번 싸웠지만 패하여 시랑 김악이 사로잡혔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수습하여 순주성을 습격해 깨뜨리니 성주 원봉은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쳤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그 고을의 격을 떨어뜨려 하지현으로 만들었다.

동북쪽의 성벽도 곳곳이 허물어졌지만 비교적 원형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
-견훤의 편지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나라가 쇠퇴한 말기가 되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우므로 태조를 이끌어 들여 우호를 맺고 후원으로 삼으려 했다. 견훤이 태조가 먼저 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태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지난번에 신라 재상 김응렴 등이 족하를 신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요. 나는 6부 백성에게는 올바른 교화로써 타일렀더니 뜻밖에 간신은 피하여 도망가고 임금이 죽는 변고가 생겼소. 경명왕의 외4촌 아우인 헌강왕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니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어진 임금은 모시게 하여 이제야 자리가 잡혔소.

족하는 내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단지 유언비어만 듣고 온갖 계책을 다 써서 틈을 노리며 여러 방면으로 침략했으나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소털 하나도 뽑지 못했소. (중략)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바라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고 말에게 패강의 물을 먹이는 것이오.

견훤산성은 지방도에서 3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해발 800m 정도의 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산성가는 등산로는 넓게 조성되어 방문객들이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
그런데 지난달 오월국의 사신이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기를 “근래 양쪽의 볼모가 죽게 되어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관계를 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해 싸움이 그치지 않으므로 이제 이 일을 전담하는 사신을 경의 본도로 보내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냈으니 각기 서로 친하게 지내서 영원히 믿고 평화롭게 지내길 바라노라”고 했소.

내가 의리로는 왕을 높이 받들고 정리로는 대국을 충실히 섬기는 터에 왕이 타이르는 조칙을 듣고 즉시 공경하게 받들려고 하나 족하가 싸움을 그만둘 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오히려 싸우려고 하는 것을 염려하오. (중략) 마땅히 미혹하여 거듭 잘못되는 것을 경계해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라오.

북쪽 성벽 외부는 낭떠러지에 접해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지만 내부는 산책로처럼 조성되어 둘레길로 좋다.
-왕건의 답장

927년 정월에 태조는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냈다.

삼가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전한 조서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족하가 보낸 긴 사연의 편지도 받아보았소. 오월국의 조서를 받아 비록 감격은 더 했으나 편지를 펴보고 의심스런 마음을 금하기 어려웠소. 금번 돌아가는 사신 편에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하오.

근래에는 삼한이 액운을 만나고 전국에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도적떼가 되고, 논밭은 황폐하게 되지 않은 곳이 없소. 전쟁의 위험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난을 구하려고 스스로 선린의 우호를 맺었더니 백성들은 농사짓고 누에 치는 일을 즐기고 병사들은 7~8년을 한가롭게 쉬었소.

925년이 되자 이해 10월에 갑자기 사건이 생겨 교전하게까지 되었소. 족하가 처음에 적을 가벼이 여겨 바로 진격해 왔으나 이는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처럼 하다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후퇴하였으니 이는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았소. 그리고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한 후 하늘을 가리키면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즐겁게 화목할 것이며 만약에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죽일 것이다”고 했소.

신숭겸 장군은 왕건의 부하로 뛰어난 장군이었다. 왕건이 팔공산에서 견훤의 군사를 만나 고전할 때 왕건의 옷으로 바꿔 입고 적들의 눈길을 따돌려 왕건이 무사히 포위망을 벗어나게 했다. 신숭겸 장군의 동상.
내 또한 창칼을 쓰지 않는 무를 숭상하고 죽이지 않는 어진 것을 추구하여 드디어는 여러 겹 에워싸던 포위를 풀고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한 것은 남쪽 사람들에게 큰 은덕을 준 것이었소. (중략) 나의 마음에는 어떠한 악함도 품지 않고 왕실을 받드는 뜻만 간절하여 신라 조정에 도움을 주어 나라의 위기를 구해보려 했소.

그런데 족하는 털끝 같은 조그만 이익에 눈이 어두워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버리고 임금을 목 베어 죽이며 궁궐을 불태우고 대신들을 참혹하게 살해했으며 백성들을 도륙하였소. (중략) 나는 해를 뒷걸음치게 할 만한 깊은 정성과 큰 매가 새매를 쫓는 것을 본받아 개나 말처럼 충성을 다하기로 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킨 지 두 해가 지났소. (중략)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훈계하는 교서를 받았으니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겠소. 만일 족하도 삼가 명철한 조서를 받들어 흉악한 전쟁을 모두 멈춘다면 오월국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우리 강토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허물이 있는데도 고칠 수 없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글은 최치원이 쓴 것이다.)

신숭겸 장군이 왕의 옷으로 갈아 입고 팔공산 전투에서 전사한 곳에 왕건이 지묘사 절을 지어 향사를 올리게 했다. 1607년에 후손 신흠과 외손인 유영순 관찰사가 장군이 돌아가신 자리에 표충단을 쌓아 위왕대사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막바지 전쟁

932년에 견훤의 신하 공직이 태조에게 항복하자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붙잡아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서 끊었다. 가을 9월에 견훤은 일길을 시켜 수군으로 고려의 예성강에 침입토록 하여 사흘 동안 머물면서 염주, 백주, 정주 등의 배 100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한다.

934년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정예병사를 선발해 새벽 일찍 밥을 먹여 급습도록 했다. 영루에 닿기도 전에 고려 장군 유금필이 강력한 기병으로 이를 쳐서 3천여 명의 목 베자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견훤의 부하였던 술사 종훈과 의원 지겸, 용장인 상달, 최필 등도 태조에게 항복했다.

조선 현종때 표충사는 사액서원이 되고,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졌지만 1993년에 표충사를 복원하고 홍살문을 세웠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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