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으로 안정적인 정착을 이룬 귀농 1세대 강소농||무인 판매장 설치로 인건비를 절약하는

▲ 당일 새벽에 수확한 참외 포장작업을 하고 있는 안병문·문정내 공동 대표.
▲ 당일 새벽에 수확한 참외 포장작업을 하고 있는 안병문·문정내 공동 대표.
‘첫 번째, 1호, 1세대’의 연관어는 무엇일까. ‘도전’일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 들어갈 때는 누구나 주저한다. 두려움도 느낀다.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를 동물의 세계에서는 ‘첫 번째 펭귄’이라고 한다. 펭귄이 먹이 활동을 하기 위해 천적인 바다표범이 있는 바다로 뛰어들기 전에 무리 전체가 머뭇거린다. 용기 있는 펭귄이 먼저 뛰어들면서 전체 무리를 이끄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새로운 도전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르지 않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70∼80년대 ‘이농행렬’이 도시로 이어질 때 반대로 농촌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귀농행렬이 늘어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생소한 광경이었다.

▲ 문정내 대표가 새벽에 수확한 참외를 선별해서 포장작업을 하고 있다.
▲ 문정내 대표가 새벽에 수확한 참외를 선별해서 포장작업을 하고 있다.
도전정신과 용기를 가지고 역발상으로 귀농을 감행한 주인공은 칠곡군에서 ‘해라농장’을 운영하는 안병문(62)·문정내(62) 공동대표다. 참외와 포도를 각각 1만 2천㎡, 벼 4만㎡를 재배해 연간 2억 원의 소득을 올리는 강소농이다. ‘해라농장’은 귀농하면서 함께 고생한 큰딸의 이름에서 따왔다.

◆ 귀농 1세대의 안착

“좋게 말해서 귀농이지, 실상은 억지 귀농이었습니다.”

성공한 귀농인이라는 주변의 칭찬에 대한 안 대표의 답이다. 안 대표는 서울에서 가방 판매업을 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알짜배기 사업장이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신학기엔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그때 당시 교실은 콩나물시루 같았다. 그것도 모자라 2부제 수업도 진행했다. 그러니 학생용 가방의 수요는 넘쳐났다.

▲ 안병문·문정내 공동대표가 한창 익어가는 거봉포도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 안병문·문정내 공동대표가 한창 익어가는 거봉포도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730만여 명에 이르는 베이비붐 세대를 생각하면 답이 쉽게 나온다. 계속될 것 같던 호황은 소리 없이 떠나갔다. 1983년 교복자율화가 시행되면서 학생들은 학생용 가방 대신 배낭을 메고, 경제성장으로 고급 메이커 제품을 찾았다. 많은 판매업자가 도산했다. 그 행렬에 안 대표도 서 있었다. 덩달아 건강도 나빠졌다.

1985년에 빚 2천만 원을 안고 농촌으로 들어왔다. 방 하나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방이 좁아 등을 구부리고 새우잠을 잤다. 밤에 잠을 자는 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일을 하는 것이 편했다.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틈이 나면 품을 팔았다. 트랙터와 콤바인을 할부로 구입해 밤낮없이 일했다. 가을철에는 강원도 철원까지 가서 일했다. 봄에는 모내기, 가을에는 벼 베기, 겨울에는 논갈이를 했다. 주변에서 트랙터가 불쌍하다고 할 정도였다.

▲ 안병문 대표가 한창 성장하고 있는 거봉포도의 초기 생육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 안병문 대표가 한창 성장하고 있는 거봉포도의 초기 생육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덕분에 자리를 잡아 나갔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귀농이었지만 이제는 농사의 고수로 통한다. 소득도 만만찮다. “이 정도로 자리 잡은 것도 불평 한 마디 없이 힘든 일을 함께해 준 아내 덕분이다”면서 아내의 헌신을 앞세웠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2017년 ‘새농민상 본상(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시상금 200만 원은 ‘호이장학금’으로 기탁했다.

◆부부가 함께 짜는 영농계획

안 대표의 농사짓는 방식을 보면 남들과 작은 차이점이 하나 있다. 영농계획을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세운다. 통상적으로 남편이 계획을 세우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매년 1월이 되면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한 해 계획을 수립한다. 사소한 농작업도 서로 의논해서 진행한다. 특히 품종을 선택할 때는 더욱더 그렇다. 농촌에서 여성의 역할은 훨씬 크다. 꼼꼼한 눈썰미와 섬세한 손길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해라농장에서 운영하는 무인판매점, 칠곡군 1호점이다.
▲ 해라농장에서 운영하는 무인판매점, 칠곡군 1호점이다.
특히 농촌에서는 부부가 하루 종일 함께 일하기 때문에 소통이 필수 요소다. 사소한 의견 차이가 큰 충돌로 발전할 수도 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영농교육도 함께 받고, 병충해 방제 등 농사 전반에 대한 토론도 벌인다. 때로는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서로 존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주변의 부러움에 안 대표는 “어렵던 시절 헌신해 준 아내에 대한 보답이다”면서 “농장의 진짜 주인은 아내다”고 강조했다.

◆무인판매장 운영

“농장 앞 도로변에 무인 판매대를 만들어서 포도와 참외를 팔아 봅시다.”

무인판매장을 운영해 보자는 아내 문 대표의 제안에 따라 2008년부터 농장 앞에 무인판매장를 설치했다. 아무도 하지 않은 색다른 시도였다.

▲ 해라농장의 참외 포장 모습.
▲ 해라농장의 참외 포장 모습.
주변에서는 도난을 걱정했지만 문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농장 인근에 있는 2개의 골프장에 하루 3~400명 이상이 드나든다. 큰 구매력을 가진 A급 고객이다. 이런 사람들은 농민이 내놓은 농산물을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무인판매장을 운영하면 고품질의 신선한 농산물을 인건비 부담없이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고객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편하다고 한다. 걱정했던 도난사고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 해라농장의 멜론 포장 모습, 겉 모양은 참외처럼 보이지만 멜론이다.
▲ 해라농장의 멜론 포장 모습, 겉 모양은 참외처럼 보이지만 멜론이다.
이를 두고 부부는 신뢰사회의 승리라고 말한다. 농장에서 생산되는 포도의 80%를 무인판매장에서 판매한다. 거봉 등 5개 품종의 포도를 다양한 규격으로 포장해 소비자가 선택하기 좋게 구성했다.

◆농업의 포트폴리오

“칠곡은 참외 주산지이고 소득도 상당하지만 참외 떨어지면 돈도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면서 연중 소득이 발생하는 농업 구조가 필요하다는 게 안 대표의 설명이다. 맞는 말이다. 많은 농가가 봄부터 비료와 농약 등 농자재를 외상으로 구입하고 수확 철에 갚는다.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일이다.

▲ 해라농장에서 생산하는 삼색포도.
▲ 해라농장에서 생산하는 삼색포도.
안 대표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농업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다. 참외와 포도, 벼를 주작목으로 재배한다. 봄에는 참외, 여름에는 포도, 가을에는 쌀로 소득이 발생한다. 농작업도 마찬가지로 봄부터 가을까지 골고루 나누어진다. 소득과 노동력이 집중되지 않아 안정적인 농장 운영이 가능하다.

최근 소비 트랜드에 맞춰 혈관에 좋다는 캔탈로프 멜론을 재배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7월이 넘어서면 가격이 하락하는 참외 대신 다른 소득원을 개발한 것이다. 참외를 조기 폐기하고 멜론을 재배해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다.

◆농사 고수의 비결은 흙과 관찰 그리고 품질

안 대표는 농사를 잘 짓는 기본은 ‘땅과 관찰’이고 그 결과는 품질이라고 강조한다. 토양은 모든 작물의 생명의 근원이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땅이 좋지 않으면 품질 좋은 농산물생산을 기대하기 어렵다.

▲ 지주식으로 재배하는 멜론.
▲ 지주식으로 재배하는 멜론.
안 대표가 벼농사를 짓는 이유도 이것과 이어져 있다. 볏짚을 이용한 좋은 퇴비생산 목적이 크다. 가을에 볏짚 베일을 만들고 1년 동안 발효를 시켜 황토와 우분을 혼합해 뿌린다. 땅심을 살리는 것이다.

세심한 관찰도 중요한 과제다. 온화한 성격의 부부지만 농장에 들어서면 눈초리가 매서워진다. 시설하우스의 온·습도는 물론 작물의 생육 상황과 병충해, 토양 상태 등 모든 것을 세세하게 살핀다. 마치 손자 돌보듯 한다.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장·단기 대응방안을 세우고 농업전문기관의 도움도 받는다.

▲ 안병문·문정내 공동대표가 한창 익어가는 거봉포도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 안병문·문정내 공동대표가 한창 익어가는 거봉포도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관찰은 곧 작물과의 소통이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이 특별해 보였다. 고품질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한다. 스마트 팜 시설을 도입해 노동력을 절감하고 그 여력을 농작물 관리에 투자한다. 품질 향상을 위해 친환경적인 자재를 활용한 영양제나 액비를 만들어 사용한다. 참외 대목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신토좌’ 대신에 ‘단호박’을 사용하는 것도 특별한 방법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참외 당도가 16~17브릭스 정도로 높고 식감이 좋아 인기가 높다.

◆농민이 운영하는 농산물 직판장 운영이 꿈

안 대표는 요즘 큰 그림을 그린다. 농민이 운영하는 ‘농산물 직판장’이다. 일종의 로컬푸드매장이다. 이것 역시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력을 최소화한 무인판매방식을 계획하고 있다.

단순한 농산물 판매에서 벗어나 카페와 갤러리 기능을 합친다는 복안이다. 농민은 농산물을 판매하고, 소비자는 신선한 농산물 쇼핑을 하면서 휴식도 할 수 있는 복합공간이다. 판매와 힐링을 겸하는 윈윈매장이다.

미술을 전공한 둘째 딸이 관심을 가지고 준비를 위해 바리스타 교육과 요리교육을 받고 있다. 이미 농장 옆에 작은 부지도 마련했다. 농장 인근 골프장 이용객들이 구매력을 갖춘 소비층이기에 직판장의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글·사진 홍상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경북도농업기술원 강소농 민간전문위원



김종엽 기자 kimj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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