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의 증자라 불리던 의자왕, 신라를 침범해 30개 성을 빼앗다, 집권 후반기 여색에 빠져

▲ 의자왕이 즉위 15년 이후 신라와의 전쟁을 통해 국경을 확장하고,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후궁들의 치마폭에 빠져 귀족들의 문란한 정치로 나라의 힘이 쇠약해 졌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웅진, 지금의 공주 공산성으로 도망했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항복했다. 공산성의 서쪽 문루 금서루.
▲ 의자왕이 즉위 15년 이후 신라와의 전쟁을 통해 국경을 확장하고,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후궁들의 치마폭에 빠져 귀족들의 문란한 정치로 나라의 힘이 쇠약해 졌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웅진, 지금의 공주 공산성으로 도망했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항복했다. 공산성의 서쪽 문루 금서루.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 왕조사는 56왕 중 36왕에 대해 길게 이어 기록하고 있지만 백제에 대해서는 아주 인색하다. 678년 백제 역사를 남부여시대, 무왕, 그리고 후백제 이야기로 줄이고 있다. 백제 멸망의 역사 의자왕 20년은 쥐꼬리만큼도 언급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백제 마지막 왕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백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의자왕은 어릴 때는 효심이 깊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으며 지혜로워 동방의 해동증자로 불렸다.

수수께끼의 서동,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삼십 대에 세자로 책봉됐다. 의자왕으로 왕좌에 오르면서 선정을 베풀며 성군 소리를 듣는 한편 직접 신라 정복전쟁에 나서 30여 성을 빼앗는 성과를 올렸다.

무왕에 이어 나라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집권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여색에 빠져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678년 백제의 막을 내리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의자왕이 신라의 주적이 되어 삼국통일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던 것은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여 성문에 내걸었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김춘추의 뿌리 깊은 원한으로 결국 의자왕은 백마강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투신해 꽃 무리로 지는 전설을 남기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

▲ 공산성 서쪽 성문으로 가장 높게 쌓아올려 지은 누각이다. 금서루 전경.
▲ 공산성 서쪽 성문으로 가장 높게 쌓아올려 지은 누각이다. 금서루 전경.
◆역사: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

-출생: 백제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해동의 증자로 불릴 정도로 효심이 깊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두터웠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아버지인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595년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유명한 설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했다. 선화공주가 의자왕의 어머니라고 설명한다.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이유는 외가가 적국인 신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 공산성 서북쪽에 우뚝 서 있는 정자 공산정이다. 백제 왕궁 관련 유적을 비롯해 금강과 금강철교 등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1970년에 새로 지은 정자로 이전에는 유신각 또는 전망대로 불렸지만 시민공모를 통해 새로 공산정으로 부른다.
▲ 공산성 서북쪽에 우뚝 서 있는 정자 공산정이다. 백제 왕궁 관련 유적을 비롯해 금강과 금강철교 등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1970년에 새로 지은 정자로 이전에는 유신각 또는 전망대로 불렸지만 시민공모를 통해 새로 공산정으로 부른다.
한편 선화공주라는 인물은 존재했으나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익산 지역 유력한 호족의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된 것은 632년, 무왕 33년의 일이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서야 태자로 책봉된 것이다. 그에 대한 내부 견제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 즉위: 의자왕은 641년 왕위에 오른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 공산성은 백제시대 대표적인 왕성으로 웅진성으로 불렸다. 1천500년 전의 화려했던 백제의 웅진시대를 느낄 수 있다. 고대성곽의 흔적을 따라 복원된 성은 2천660m에 이른다.
▲ 공산성은 백제시대 대표적인 왕성으로 웅진성으로 불렸다. 1천500년 전의 화려했던 백제의 웅진시대를 느낄 수 있다. 고대성곽의 흔적을 따라 복원된 성은 2천660m에 이른다.
의자왕은 즉위한 그해부터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나서 직접 전쟁에 나서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전쟁의 선봉에 서서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백제 멸망을 가져온 원인도 이때 비롯됐다.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면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을 비참하게 죽였다는 데 있었다. 딸과 사위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어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어 네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황산벌전투의 영웅 계백장군 동상.
▲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어 네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황산벌전투의 영웅 계백장군 동상.
의자왕은 집권 초기 외교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즉위한 해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조공하며 관계를 다졌고,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또 고구려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의자왕은 집권 전반기에 곳곳에서 신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의자왕의 타락: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의자왕은 크게 변했다. 그해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대단히 사치스러웠다. 이듬해 왕이 궁인들과 더불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의자왕 17년에는 왕이 아들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기 식읍을 내려주기도 했다.

의자왕의 치세가 흐트러진 이유는 은고라는 여인이 의자왕의 마음과 함께 권력을 거머쥐면서 벌어진 전횡 때문이다. 권력 기반을 다진 의자왕이 외형적으로 왕권이 안정되자 긴장감이 풀어진 탓이라는 해석도 있다.

▲ 공산성 공산정에서 내려다 본 금강과 금강철교 전경.
▲ 공산성 공산정에서 내려다 본 금강과 금강철교 전경.
-백제의 멸망: 백제가 이러한 분열을 겪고 있을 무렵 나당연합군이 침입했다. 13만 대군을 이끈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물도에 정박했고,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백제의 동부 전선을 빠른 속도로 돌파했다.

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공격에 백제의 조정은 대책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의자왕은 우선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에 맞서게 했다. 백제군은 열 배가 되는 적들과 만나 네 번 접전해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마침내 패전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백마강, 지금의 금강 줄기에 낙화암을 둘러보는 황포돗대 나루터가 운영되고 있다.
▲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백마강, 지금의 금강 줄기에 낙화암을 둘러보는 황포돗대 나루터가 운영되고 있다.
당나라 군사까지 사비성에 들이닥치자 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웅진성을 지키고 있던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에 항복하게 했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었다. 태자 효를 비롯 왕자들과 대신, 장병, 그리고 백성 1만2천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삼천궁녀: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에는 삼천궁녀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전쟁의 승자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왜곡되고 있다.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풍악을 즐겼던 곳에 지어진 정자 백화정. 백마강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낙화암 정상에 자리해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풍악을 즐겼던 곳에 지어진 정자 백화정. 백마강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낙화암 정상에 자리해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왕의 여자

의자왕은 지혜롭고 용맹했던 무왕과 선화공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수업을 받으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그러나 무왕이 백제 귀족들의 전략에 따라 많은 후궁을 들여 50여 명의 자식을 두게 되면서 후계구도가 복잡하게 경쟁적인 형상으로 전개됐다.

왕실에 여식을 들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입지 강화를 위해 제각각 외손을 태자로 책봉하려는 권모술수를 펼치며 의자왕의 태자 책봉에 태클을 걸었다. 의자왕이 신라인의 핏줄이라는 것이 가장 큰 핑계로 거론되었다.

무왕의 안정적인 왕권 유지를 위한 강력한 의지로 결국 의자왕은 삼십 대 후반에 태자에 책봉되고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의자왕은 왕위에 즉위하면서 태자 책봉에 걸림돌로 작용했던 세력들은 거침없이 숙청을 단행했다. 또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신라를 보란 듯이 짓밟는 전쟁의 정복군주가 되었다.

▲ 백제의 부여시대 120여년을 지탱했던 부소산성, 궁궐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산성내부에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과 고란사, 반월루, 영일루 등의 많은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왕궁의 방어시설로 기능했던 곳이다.
▲ 백제의 부여시대 120여년을 지탱했던 부소산성, 궁궐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산성내부에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과 고란사, 반월루, 영일루 등의 많은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왕궁의 방어시설로 기능했던 곳이다.
의자왕은 15년간 강력한 이미지를 풍기는 전쟁의 왕으로 군림하다, 아비 대신 전쟁터에 나온 여장부 은고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적진 속으로 깊숙이 뛰어들어 칼춤을 추다 위험에 빠진 은고를 구해낸 의자왕의 부하 사랑에 감동한 은고는 그날부터 온전히 의자왕의 여인이 되었다.

은고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남장을 한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의자왕은 이성적으로 눈을 뜨게 되고, 온전히 목숨을 바쳐 헌신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여장부 은고의 치마폭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 부여로 접어드는 도로 입구에 천 년고도 부여임을 환기시키는 사비문이 높게 서있다.
▲ 부여로 접어드는 도로 입구에 천 년고도 부여임을 환기시키는 사비문이 높게 서있다.
전쟁에서 돌아온 의자왕은 사비성을 환락의 성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성의 동북쪽 경계이자 천연요새로 만든 백마강 언덕 낙화암에 정자를 짓고, 궁궐의 남쪽에는 인공연못을 만들어 궁남지를 꾸며 고구려와 신라 등 삼국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정원 예술을 기록했다.

의자왕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은고와 후궁들의 치마폭에 빠져 나랏일을 잊은 5년, 귀족들의 문란한 정치가 낙화암 삼천궁녀의 전설을 남기며 백제의 문을 닫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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