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척화비와 인동의 문화재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요람도 비켜가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기간 구미공단 지역은 외지인의 방문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경북 북부 안동과 상주를 거치면서 기세를 얻은 낙동강은 구미들을 가로지르며 한층 도도해진다. 그 낙동강은 경상도의 젖줄이 되었고 구미를 한국 산업화의 기지로 만들었다. 구미에서 낙동강은 남북으로 흐르며 기존 시가지, 구미1공단과 인동, 구미2·3공단을 나눈다. 구미1공단에서 낙동대교를 건너면 2공단과 3공단, 구미공단 지킴이 인동(仁同)이 있다. 이 가운데 척화비는 눈에 띈다.

구미 척화비는 구미3공단에서 구미 산동 해평 방면으로 넘어가는 석현 고갯길을 넘어가다 길가에 서 있으며 150년 전 조선인의 결기가 그대로 서려 있다.

내용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온다.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다.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자손만대에 이를 경고한다. 병인년 짓고 신미년 세운다.) 뒤로 갈수록 글자가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다른 곳에 남아 있는 척화비와 문헌을 통해 글자를 해독한 것이다.

조선말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국내정치에 외치를 이용하기 위해 병인양요 이후 강력한 쇄국정책을 편다. 대원군이 1866년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학살하자 프랑스가 자국 신부의 학살을 핑계로 군함을 이끌고 조선을 침범, 개항을 요구한 것이 병인양요다. 5년 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 로저스 사령관이 군함 5척을 앞세우고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진격해 온 것이 신미양요다.

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 개항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대원군은 나라 문을 더욱 굳게 닫았다. 그리고 전국에 서양 오랑캐를 막아내자는 굳은 결의를 비석으로 새겨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서울의 종로 네거리와 부산 동래, 경주 등 도시에서 충청 전라도의 산골까지 전국 곳곳에 무려 200여 기의 척화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같았고 시기도 같았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땅 속에 파묻히거나 바다에 빠뜨려지기도 했고 부서지기도 했다. 지금 포항 장기면사무소나 청도, 부산 용두산공원 등에 33기가 남아 있는데 자연석 화강암 척화비는 이곳뿐이다.

구미 구포동의 척화비도 당시 한 석공이 조상의 묘지 상석을 만들려고 다듬다가 지역민들의 저지로 살아남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최근에야 이곳 길가에 자리를 잡고 이젠 경북도 문화재자료 22호로 지위까지 얻어 기억을 살릴 수 있게 됐다.

구미1공단에서 낙동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강의 동쪽 야산에 동락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 동쪽인 이곳은 칠곡군 인동면이었고 그 인동이 낳은 조선명유 장현광을 모신 사원이 동락서원이다. 동락(東洛)은 동방의 이락(伊洛)이니 송나라 학자 정호 정이 형제가 수학하던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말한다.

동락서원은 옆에 있는 한옥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를 그 모태로 한다. 여헌 장현광 선생이 57세 되던 1610년 제자 장경우 선생이 낙동강변 동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장현광 선생이 직접 부지암정사라 이름하고 만년을 이곳에서 강학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정사는 선생이 돌아가신 17년 뒤인 1654년 서원의 체제를 갖추고 이듬해 서원으로 개칭, 장현광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1676년 숙종때 동락서원이란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나 대원군때 철폐됐다. 1904년 영당을 새로 건립하고 1932년 지역 유림들의 뜻을 모아 사당을, 1971년 부속건물까지 복구해서 중창하고 장현광 선생과 장경우 선생을 배향했다.

외삼문인 준도문을 들어서면 윤회재와 근집재가 동서쪽에 자리하고 경북도 문화재자료 21호인 중정당 뒤로 사당인 경덕묘가 있다. 중정당 서쪽 처마와 붙어있는 신도비는 미수 허목 선생이 지은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다.

부지암정사에 동락서원이 들어서자 후손들은 당초 부지암정사 창건 뜻을 살리기 위해 1885년 정사를 건립했다. 그러나 구미공단이 들어서고 구미대교가 놓이면서 1975년 서원 옆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장현광 선생은 서원 옆 낙동강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있어 그 심오함에 흠뻑 빠졌었다고 오홍석 구미시 문화계장은 말한다. 그 깊이는 성리학의 깊이나 인간의 깊이와 같이 깊고 나의 마음과 같이 알 수 없는 깊이라며 부지에 대해 의미를 더했다.

서원 앞 400년도 더 된 보호수 은행나무는 여헌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데 암수 딴 그루인데도 해마다 엄청난 은행을 맺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기도처로도 유명해졌다. 후손 장세곤씨는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금줄을 쳐보기도 했지만 찾는 사람들의 정성을 막지는 못한다고 하소연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장현광 선생은 20세에 벌써 학문이 완숙 단계에 들어섰을 만큼 일생을 인간과 자연, 우주를 아우르는 학문과 저술에 바친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다. 7세에 부친으로부터 글자를 배우면서 글귀를 만들었고 8세에 부친이 돌아가신 뒤 자형 노수함에게 글을 배웠다. 18세에 공부한 것을 종합 포괄하여 앞으로 학문할 계획을 수립했으니 바로 ‘우주요괄’ 10첩이 그것이다.

향시에 두 차례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나가지 않았고 벼슬도 대부분 사양했다. 조정은 그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 잇따라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대부분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여헌학연구회의 자료에 따르면 선생에게는 37차례의 관직 제수가 있었으나 출사한 것은 외직 두 번과 내직 세 번이 전부였다. 선조는 38세의 선생에게 전옥서 참봉을 내렸으나 모친상 중이어서 부임하지 않았으니 처음 관직은 42살 때 보은현감(종6품)이었다. 그것도 6개월만에 병을 핑계로 그만뒀다.

보은현감으로 나갈 당시 선생이 밝힌 출처(出處)는 지금 세상의 관리들에게도 경계로 삼을 만하다. “벼슬에 나아갈 만한 의리가 없으면 벼슬하지 말 것이니, 학문이 넉넉하지 않고, 시기가 적당하지 않고, 예로서 대접하지 않으면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 단호한 선비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선생의 방대하고 심오한 학문은 유학과 제자백가의 학설은 물론 이단시하던 노자와 불교 사상까지도 비평과 수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주 자연인으로 일생을 살았고 자신의 호처럼 전국을 떠돌며 나그네처럼 살았으니 그 바탕을 도(道)에 두고 있으니 인조가 내린 선생의 제문에 “500년에 한 번씩 태어나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생전 두 번의 대사헌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84세에 인조의 남한산성 굴욕 소식을 듣고는 분개하여 동해안 입암산에 들어간 지 반년 만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지 20년 뒤인 1657년 효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강(文康)의 시호를 받았으니 선생의 인품과 충절을 공인받은 것이다.

마애여래불(摩崖如來佛)

인동 구미3공단에서 선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의 척화비를 가기 전에 맞은 편 산등성이에 높이 7.2m, 어깨폭 2.8m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 빚은 마애불(보물 제 1122호)이 풍상을 겪고 마모돼 가고 있다. 지금 문화재청이 안전 검사를 하고 있다는데 앞쪽은 멀쩡해 보여도 옆모습을 보면 바위의 균열이 심해 곧 부셔져 무너질 듯 위태롭기 짝이 없다. 구미공단이 들어서서 한국 산업화를 이룬 주역으로 성장해오는 동안 마애불이 지켜보고 또 지켜준 덕이었다면 오늘날 구미공단의 위기는 마애불의 위기에서 오는 것인가 턱없는 상상도 하게 만든다.

초승달 모양의 눈썹과 굳게 다문 작은 입술, 평평한 코와 어깨까지 늘어진 귀의 모습은 무심한 듯 근엄하고 자상한 속을 짐작케 한다. 옷을 걸쳤으니 그 선이 팽팽한 속살을 비치듯 얇아 바람에 날리는 듯하고 두 다리는 연화대에 얹었는데 풍만하게 보인다.

안내문에는 백제군에 쫓기던 당나라 장수가 한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 뒤에 숨어 목숨을 구한 뒤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불상을 새겼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 같은데 머리 위에 얹힌 판석은 고려시대 마애불상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한다.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동쪽 구미3공단 너머 천생산이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를 마애불도 이겨내지 못했음인지 옛날 산속이었을 마애불 앞은 공장들이 틀어막고 또 길이 나면서 마애불도 제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공단 주변환경과 차량 진동 등 산업화의 현장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문화재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안타까움도 있다.

1천년을 지켜오던 마애불이 문화재청의 프라스틱 보호 시설 설치 이후 습기와 진동에 균열이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고 보면 빠른 진단 결과가 나와서 안전하게 보호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구미공단도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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