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달밤

발행일 2020-02-27 16:19:3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달밤

이종문

그 소가 생각난다, 내 어릴 때 먹였던 소/ 사르비아 즙을 푼 듯 놀이 타는 강물 위로/ 두 뿔을 운전대 삼아, 타고 건너오곤 했던,/ 큰누나 혼수 마련에 냅다 팔아먹어 버린,/ 하지만 이십 리 길을 터벅터벅 걸어와서/ 달밤에 대문 앞에서 움모-하며 울던 소/

시조집 『그때 생각나서 웃네』(시학, 2019)

이종문은 경북 영천 출생으로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저녁밥 찾는 소리』『봄날도 환한 봄날』『정말 꿈틀, 하지 뭐니』『묵값은 내가 낼게』『아버지가 서 계시네』『그때 생각나서 웃네』등이 있다.

이종문의 시조는 거침이 없다.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검법이다. 그러나 남다른 내공과 기량으로 개성적인 시를 쓴다. 정형률에 충실하면서도 생각을 활달하게 전개한다. 특히 재치와 해학에 능하다. 시조가 자칫 엄숙주의에 빠지거나 단정함을 견지하려는 모범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탈피하고, 시원스러운 발상과 속도감 있는 보법을 통해 늘 새로운 시조를 선보인다.

‘달밤’은 동화적이다. 조곤조곤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행복감을 맛본다. 순한 눈빛의 소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번쯤 소의 얼굴과 마주해본 사람이라면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다. 다시 소가 집으로 찾아온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말을 귀담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홉 줄의 시조 ‘달밤’에는 내밀한 정서적 교감이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시절 소는 가축이자 한 식솔이나 다름없었다. 학교 일과가 파하면 집으로 돌아와서 책가방을 던져놓고 소 먹이러 갔다. 소는 눈빛을 나누는 친구였다. 가끔 소잔등에 올라타고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나이 들면 가끔씩 어린 시절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친구나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누나도 생각나겠지만, 그 중에서도 마당에 놀던 강아지나 닭도 있다. 그런데 화자는 그 소가 생각난다면서 어릴 때 먹였던 소를 등장시킨다. 그 소는 사르비아 즙을 푼 듯 놀이 타는 강물 위로 두 뿔을 운전대 삼아서 타고 건너오곤 했던 소였다. 그만큼 자주 타고 다니던 소였다. 몸과 몸이, 마음과 마음이 여러 차례 교감을 가졌다. 그런데 그 소를 큰누나 혼수 마련 때문에 장에 냅다 팔아먹어 버린 것이다. 그때 박탈감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이십 리 길을 터벅터벅 걸어와서 달밤에 대문 앞에서 움모하며 울었다. 그 울음소리를 화자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환한 달밤이었는데 온 동네에 퍼져 울리던 소 울음을 듣고 화들짝 놀랐을 법하다.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가. 기실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허겁지접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달밤’은 단순한 회고의 노래가 아닌 것이다. 사람과 자연이 한 호흡이 되어 상생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사실을 달밤에 다시 집으로 찾아온 소를 통해서 자각할 수 있다.

스쳐지나가는 추억담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 되찾아야할 본성을 일깨우는 눈물겨운 노래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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