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 BC18년에 위례성에서 나라 열어 660년 사비성에서 막내려||성왕 사비성으로 천도해

▲ 백제는 시조 온조가 기원전(BC)18년에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워 660년까지 678년에 이르는 동안 화려한 문화예술과 뛰어난 건축기술, 아름다운 도자기 제조법 등으로 오늘날까지 명맥이 이어진다. 부여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된 곳에 이전 복원된 위례성 전경.
▲ 백제는 시조 온조가 기원전(BC)18년에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워 660년까지 678년에 이르는 동안 화려한 문화예술과 뛰어난 건축기술, 아름다운 도자기 제조법 등으로 오늘날까지 명맥이 이어진다. 부여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된 곳에 이전 복원된 위례성 전경.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 마지막 왕 김부대왕에 대해 소개한 데 이어 느닷없이 백제의 처음도 아닌 한참이나 진행된 남부여로 불리던 시기를 늘어놓고 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러나 백제를 234년부터 286년까지 52년이나 다스렸던 8대 고이왕을 사실적인 시조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중국의 역사서 주서에서 백제의 시조를 고이왕으로 보는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 이와 함께 고이왕이 백제의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강화시킨 업적이 그를 시조로 모시게 한다.

백제시대를 연 사람들을 온조, 고이왕, 근초고왕, 근수구왕, 개로왕 등으로 본다. 이어 백제중흥기에 이어 멸망에 이른 동성왕, 무령왕, 성왕, 위덕왕, 30대 무왕, 31대 의자왕이 역사서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무령왕은 무녕왕으로 표기되며 501년부터 523년까지 25대 백제왕으로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해양으로 멀리까지 진출해 백제의 위상을 크게 높인 왕이다. 최근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학계 연구에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무녕왕의 아들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백제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백제는 한강유역 위례성에서 시작해 백마강 일대 사비성에서 678년 역사의 문을 내린다. 31대 의자왕의 굴욕, 삼천궁녀의 낙화암 전설과 함께 비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 백제역사유적지구 위례성 밖에 당시 백제 백성들의 다양한 삶을 조명해 복원한 모습.
▲ 백제역사유적지구 위례성 밖에 당시 백제 백성들의 다양한 삶을 조명해 복원한 모습.
◆삼국유사: 남부여와 전 백제

부여군은 전 백제의 왕도이다. 소부리군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성왕 26년은 무오년(538) 봄에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했다. 지명은 소부리이고,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다. 소부리라는 것은 부여의 다른 이름이다.

한편 여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부여군 서쪽 자복사의 높은 자리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여주 공덕대사가 수놓은 휘장이기 때문이다. 또 옛날 하남에 임주자사를 두었는데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에 ‘후한서에 삼한이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사(北史)에 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와 닿아 있고, 서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한강에 닿았다고 한다. 그 도읍은 거발성이라 한다. 고마성이라 하는 이도 있다. 그밖에 또 오방성이 있다.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 국보 제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백제시대 석탑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특이한 양식은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중요자료로 손꼽힌다.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 국보 제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백제시대 석탑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특이한 양식은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중요자료로 손꼽힌다.
통전에는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까지 미쳤다’고 경계를 설명한다.

구당서에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이다. 그 동북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를 건너 월주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그 왕이 사는 곳에는 동서로 두 성이 있다’고 전한다.

신당서는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를 경계삼고, 남쪽에는 왜국이 있는데, 모두 바다 건너서이다.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기의 본기는 백제 시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인데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여의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 백제의 문화유산으로 자랑하는 것은 건축기법과 함께 아름다운 도자기 제조법이다. 지금도 백제의 땅 곳곳에 남아 있는 도예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백제역사유적지구.
▲ 백제의 문화유산으로 자랑하는 것은 건축기법과 함께 아름다운 도자기 제조법이다. 지금도 백제의 땅 곳곳에 남아 있는 도예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백제역사유적지구.
두 아들을 낳았는 데 큰아들은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이들은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과 마려 등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그들이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부아악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열 명의 신하가 보필을 하게 되어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한나라 성제 홍가 3년(BC 18) 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위례성으로 되돌아 왔다. 나라이름을 고쳐 백제라 했다. 백제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를 성씨로 삼았다.

▲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 절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당간지주로 보물 제23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 절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당간지주로 보물 제23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오랜 뒤 성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겼다. 지금의 부여군이다. 옛 전기에서는 동명의 셋째 아들 온조가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은 병진년(BC 5)인데 도읍을 한산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고, 제13대 근초고왕 때인 함안 원년(37)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얻고 북한성으로 도읍을 옮겨 105년을 지냈다.

제22대 문주왕이 즉위한 원휘 3년은 을묘년(475)인데, 도읍을 웅천으로 옮겨 63년을 지냈다. 제26대 성왕에 이르러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했다. 제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 미륵사의 당간지주는 같은 모습으로 동서에 두 기가 쌍으로 제작되어 서있다. 서쪽의 당간지주와 뒤쪽으로 복원 중인 미륵사지 서탑이 보인다.
▲ 미륵사의 당간지주는 같은 모습으로 동서에 두 기가 쌍으로 제작되어 서있다. 서쪽의 당간지주와 뒤쪽으로 복원 중인 미륵사지 서탑이 보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관산성 전투의 교훈

백제는 BC 18년 온조가 창건해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678년간 한반도에서 삼국의 균형을 이루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면서 특별한 문화를 만들었다.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현대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도자기 생산 기술은 지금까지 일본 등지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백제는 26대 성왕이 공주에서 지금의 부여 사비성으로 천도한 것을 포함해 다섯 번이나 수도를 옮겼다. 처음 한강유역 위례성에서 백마강 유역의 시대로 크게 나누어 지지만 성왕은 사비성으로 천도해 나라 이름을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치고, 중국 양나라와의 교류에 이어 일본과의 교류도 두텁게 펼치며 나라의 힘을 키웠다.

▲ 미륵사지 석탑은 동서 쌍탑으로 건축되었다. 백제 무왕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우리나라에 남은 최대의 석탑이자 가장 오래된 목탑 형식의 석탑이다. 높이 14m에 이르며 9층으로 조성됐다. 국보 제1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미륵사지 석탑은 동서 쌍탑으로 건축되었다. 백제 무왕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우리나라에 남은 최대의 석탑이자 가장 오래된 목탑 형식의 석탑이다. 높이 14m에 이르며 9층으로 조성됐다. 국보 제1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성왕이 신라와의 화친을 통해 부여에서 힘을 키워 고구려의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회복했다. 그러자 고구려가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견제했다.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고 백제와의 맹약을 버렸다. 이어 고구려에서 빼앗은 한강유역을 진흥왕이 백제로부터 빼앗아 영토를 넓혀버렸다.

성왕은 아들 창을 앞세워 신라에 대한 복수전을 펼쳤다. 이미 기세가 오른 신라를 백제는 당하지 못했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은 죽음에 이르렀다. 아들 창 또한 왜나라에서 온 장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했지만 백제는 크게 패했다.

성왕은 신라의 배신에 크게 분노했다. 아들 창에게 왕좌를 넘기고 거짓 장례를 치르게 하고 도움을 청하러 왜나라로 달려갔다. 성왕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택했다. 국내에서는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한 아들 창이 아버지 성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승려 100명을 선발해 3년간 위로법회를 열게 했다. 겉으로는 승려들의 법회였지만 이들은 전쟁을 치를 무서운 장수를 키우는 훈련원이었다.

▲ 미륵사지 서탑으로 동탑과 함께 국보 제11호로 지정돼 있지만 아직 복원이 완성되지 않고 있다.
▲ 미륵사지 서탑으로 동탑과 함께 국보 제11호로 지정돼 있지만 아직 복원이 완성되지 않고 있다.
또 왜나라 후쿠오카 지역으로 100여 명의 청년을 몰래 데리고 건너가 무술 수업을 하면서 힘을 기르는 한편 신라를 협공하기 위한 병력을 지원받기 위해 불법과 도예, 건축 기술 등의 선진문화를 전파했다.

성왕의 길은 멀고 험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백제와 가까웠던 소가시 세력이 모노노베시 세력에 밀려 지원할 여력을 잃었다. 가까스로 성왕의 지원으로 소가시 세력이 3년이 지나 겨우 모노노베시 세력을 몰아내고 후쿠오카지역의 실력자로 자리를 회복했다. 이어 백제를 지원해 1천여 명의 군사를 신라로 보냈지만 이미 성왕은 병으로 사망하고,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다시 군사를 일으킬 힘이 없었다. 결국 성왕은 재기에 실패하고 이역만리 왜나라에서 눈을 뜬 채 세상을 하직했다.

성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위덕왕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고, 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신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무왕시대로 이어지는 제2의 부흥기를 마련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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