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목 무대

김석이

일제히 멈추어선 기대도 안고 간다/ 겹쳐진 그림자도 발등에 업고 간다/ 신호등 바뀔 때마다 입장하는 등장인물

오고가는 길목에 쏟아지는 시선집중/ 살펴볼 겨를 없이 떠밀려 간다 해도/ 막혔던 길을 젖히며 당당하게 손 흔든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잠시 멈춘 그 사이 펼쳐지는 파노라마/ 나는 늘 주인공이다/ 이십초의 주마등

-시조집 『소리 꺾꽂이』(발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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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이는 부산 출생으로 201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비브라토』『블루문』『소리 꺾꽂이』등이 있다. 등단 이후 줄기찬 도전의지와 장인 정신으로 자신만의 정신적 수맥을 찾아 천착을 거듭하는 시인이다.

집을 나서면 길을 간다. 걸어가는 길에 반드시 마주치는 것이 있다. 건널목이다. 신호등 앞에 선 이들이 꽤 모여 있으면 곧 신호가 바뀔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길을 건너려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다. 대체로 바쁜 느낌을 준다. 갈 길에 대한 생각, 할 일에 대한 궁구에 골몰하는 모습이다.

제목 ‘건널목 무대’에서 건널목에 무대를 결합했다. 놀라운 발견이다. 어떻게 조직화해야 우선 제목부터 시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오래 궁리했을 법하다. 이 경우 제목이 곧 글감인데 참신한 제목에 힘입어 시가 잘 전개되고 있다. 건널목은 사람들이 잠깐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니 무대가 된다.

일제히 멈추어선 기대도 안고 가면서 겹쳐진 그림자도 발등에 업고 가는데,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입장하는 등장인물은 늘 달라진다. 무대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아서 주인공이 따로 없다. 모두가 주인공인 셈이다. 기실 자신들은 등장인물인지 주인공인지 별 다른 생각이 없겠지만, 화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당신들은 모두 건널목 무대의 출연자이자 주인공이라고.

오가는 길목에 쏟아지는 시선이 집중되고 살펴볼 겨를 없이 떠밀려 간다. 그때 길을 가는 사람은 막혔던 길을 젖히며 당당하게 손을 흔들면서 나아간다. 목적지는 다 다르지만 저마다 중요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나에게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부단히 진행된다. 가끔 잠시 멈춘 그 사이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주시하기도 한다. 그 순간 나는 늘 주인공이 되는데 그 시간은 지극히 짧은 이십 여초의 주마등이다.

이렇듯 ‘건널목 무대’는 인생을 이십초의 주마등에 빗대며 강렬한 울림을 던지고 있다. 건널목 무대를 열심히 오고가다가 건진 뜻하지 않은 수확이다. 비단 건널목 무대만 그렇겠는가. 진정성의 화분에 건강한 삶의 씨앗을 심고 잘 가꾸게 되면 보다 좋은 무대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건널목 무대’는 그러한 희망의 메시지를 은연중 가슴에 품게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

또한 세심한 관찰이 시를 쓰는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준다. ‘건널목 무대’가 보여주는 삶의 진정성과 사유의 깊이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오롯이 창작에 전념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울림이 더욱 크다.

지나온 날들이 발밑에 엎드려 길이 되고, 낙엽처럼 떨어져나간 하루하루가 추운 등을 감싸줄 때 낙엽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겨울의 밑둥치에서 자라고 있는 초록의 꿈을 바람이 흔들어 깨운다.

건널목 무대에도 이제 따사로운 봄빛이 내리고 있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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