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흔적이 남았을까 / 최재목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간다/ 보일 듯 말 듯한 흙 틈새로/ 그들만이 아는 길 따라/ 끊임없이,// 그래서, 무슨 흔적이 남았을까/ 살펴봐도/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에도 다가서지 못하고/ 영원이란 건 더더욱 알 턱도 없는/ 그들이 다녔던 길엔,

『상처의 형식과 시학』 (지식과교양, 2018)

벌레 한 마리를 바라본다. 벌레는 그들만의 길을 따라 기어간다. 길도 없는 흙 틈새로 기어간다. 가는 길을 알고 가는 걸까. 끊임없이 가는 걸 보면 가고자 하는 곳은 있는 모양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움직인 거리는 미미하지만 그에겐 상당한 의미가 있겠지. 대구에서 서울 간 거리만큼 의미 있는 이동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기껏 미량의 흙만 보이지만, 그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의 호기심 어린 눈길은 느끼고 있을까. 경치는 살피고 가는 걸까. 그에게 어떤 생각이나 느낌은 존재하는 걸까. 그들이 보는 풍경이란 건 어떤 것일까. 인간이 정의할 수 없는, 그들만의 개념은 존재할까.

벌레가 간 길이 있지만 지나고 나면 그뿐이다. 그 흔적조차 없다. 흔적이 있으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발자국만이 흔적인 것은 아니다. 발이 없는 그가 발자국을 남겼을 리 없지만 발자국을 찾는다. 보이는 것만 흔적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흔적을 찾아본다. 보이지 않는 흔적은 느끼고 공감하는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싶지 않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탓이고 애정이 없는 탓이다. 그들을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건 어쩌면 인과응보다. ‘순간에도 다가서지 못하고 영원이란 건 더더욱 알 턱도 없는 그들이 다녔던 길엔’ 허무와 정적만이 흐른다.

벌레의 시각을 알고자 한다면 벌레의 눈을 가져야 하고, 개의 삶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개의 눈을 가져야 한다. 돼지우리나 개집에서 살았다는 천재 예술가의 에피소드를 맛이 살짝 간 기행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듬고 이해해보고자 하는 열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러한 시도는 맥을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돼지나 개는 될 수 없었지만 돼지우리나 개집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은 평소 밖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랐을 것이다. 벌레를 유심히 지켜보는 시인에게서 벌레가 되어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예술적 영감을 받아 시적 정서로 거듭났다. 쪼그리고 앉아 벌레를 연모하는 최재목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남을 알고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여서 자신의 입장에서 남을 볼 뿐 그의 관점에서 그의 사정이나 처지, 생각을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니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배려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 평생을 같은 집에 함께 살고도 남편은 아내를 알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다. 원점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통하고 배려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역지사지의 노력이 필요하다. 평생 노력해도 만족할 만큼 이루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시는 시인이 ‘생각하고’ ‘바라본’ 세계다. 시의 세계는 시인 나름의 개성적인 색깔과 향기를 지닌다. 시를 읽는다는 건 한 시인의 삶의 여정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오랫동안 고뇌하고 번민한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것은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보약이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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