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하대 다시 시작된 박씨 왕가의 두 번째 왕|| 나라는 기울고 매사냥 즐겨, 고려에 의존
경명왕대에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나라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또 궁예의 침략에도 상당히 많은 고을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다 왕건이 후고구려의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면서부터 경명왕은 사신을 보내어 화친정책을 추진했다.
결국 경명왕대에 신라는 경상도 지역 정도의 영토를 가진 열세의 나라로 전락했다. 내부 반란에 이어 지속되는 외세 침략을 감당하기에 신라의 국력은 이미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버렸다.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도 경명왕은 매사냥을 즐기는 등으로 향락에 빠져 신라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 왕실 스스로 나라의 멸망을 부추기는 형세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경명왕이 죽기 1년 전에는 경산부 등의 신라 장군에게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실정들이 역사 기록으로 전하기도 한다.
제54대 경명왕 때인 정명 5년은 무인년(918)인데 사천왕사의 벽화에 그려진 개가 짖었다. 3일간이나 경전을 읽어 겨우 물리쳤으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또 짖었다.
7년은 경진년(920)인데 2월에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금모사지의 집 정원에 거꾸로 서 있기를 열흘간이나 했다.
또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고 벽에 그려진 개가 뜰로 나와 달리다가 벽으로 다시 들어갔다.
경명왕 이름은 승영이고, 신덕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헌강왕의 둘째 딸 의성왕후다. 경명왕은 동생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는데 위응이 나중에 55대 경애왕으로 즉위했다.
경명왕은 917년부터 924년까지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국력이 극심하게 쇠퇴하는 과정을 겪었다. 경명왕 2년에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의 압박을 받아 나라의 존립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고 나라를 크게 일으켰다. 경명왕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수교하며 후백제를 물리치는데 군사적 도움을 받으면서 고려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경명왕은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매사냥을 즐겼다. 삼국유사 등에는 경명왕 때에 사천왕사에 있던 벽화 속의 개가 짖고, 흙으로 빚은 신상의 활줄이 끊어지고,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열흘 동안이나 거꾸로 서는 등의 천재지변과 기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사서에는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밀양 박씨 족보에 의하면 경명왕이 석씨와 결혼해 밀성대군, 고양대군, 속함대군, 죽성대군, 사벌대군, 완산대군, 강남대군, 월성대군 등 여덟 아들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53대 신덕왕의 아들 박승영은 917년 54대 경명왕으로 즉위했다. 경명왕은 즉위하면서 동생 박위응을 상대등으로,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화랑세력보다 우위를 점하며 나라 살림살이의 주체세력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즉위 2년에 일길찬 현승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는 어수선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후백제 견훤이 공격의 수위를 높여 대야성까지 함락되었다. 궁예의 후고구려도 한강 이남까지 밀고 내려와 신라의 영토는 결국 현재 경상도 정도의 영역으로 좁혀졌다.
경명왕은 이렇게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동생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실권 회복에 나섰지만 오히려 반란이 일어나고, 외세의 침략전쟁 등으로 나라는 저항의 힘을 잃고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
왕건이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자 경명왕은 고려를 나라로 인정하고 사신을 보내 친화정책을 도모했다. 왕건도 고려에 친화적인 신라와 손을 잡고 후백제 견훤을 손쉽게 견제하는 후삼국 형태가 갖추어졌다.
왕건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신라와 친화정책을 유지하는 동안 신라의 지방세력들은 앞다투어 고려에 투항했다. 경명왕 말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도 시도했지만 성사하지는 못했다. 경명왕은 스스로 나라를 유지하는 힘을 잃고 고려에 의존하면서 경산부의 장군에게도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경명왕시대의 신라는 고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경명왕의 정책 중에도 가장 큰 실정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자연재해도 잇따라 일어났다. 당시 중국과 발해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기온저하, 가뭄 등으로 기후가 변화하면서 자연재해로 독자적인 생산활동조차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실을 비롯한 왕경지역에서는 지방의 물자 유입이 필요했지만 지방세력들의 투항으로 이마저 어려웠다.
경명왕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군사력을 잃은 것은 오래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백성의 민심 또한 흔들렸다. 신라가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경명왕은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압박해오자 고려 왕건에게 아찬 김률을 사신으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왕건이 “신라에는 장육존상과 황룡사 구층목탑, 진평왕옥대 등의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옥대는 지금도 있느냐”고 물었다. 김률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돌아와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황룡사의 노승만이 이를 알고 전해주었다.
경명왕은 옥대를 찾아 제사를 올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재해와 외세의 침략이 이어지고 있지만 나라를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보물의 힘이라는 것이라 믿고, 비밀리에 보물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경명왕의 이러한 정치형태는 경애왕으로 이어져 신라는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기보다 종교적인 힘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전락했다. 결국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종교적인 힘을 구하려다 견훤의 칼에 나라를 잃게 됐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