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본, 아프리카/ 문인수



‘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린 의사 출신, 고(故) 이태석 요한 신부의 삶을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중략)/ 그는 다만 아프리카를 앓다가 갔다. 사랑은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사랑하고 사랑한 일. 할 일이 엄청 많이도 남아 있었던 이, 그를 데려간 하느님의 뜻이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화면 속 벽안의 어느 노신부는 그것이 바로 하늘의 신비라고 말했다./ (중략) 깜깜한 극장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때마침 눈꼬리를 찍어내고 싶었다. 어, 손수건이 없었다. 낌새를 알아챈 네가, 너의 손길이 어둠속을 더듬어 내게 번진 물기를 꼭, 꼭, 눌러 닦아주었다. (하략)



- 시집 『적막 소리』.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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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시인의 <~>이란 시가 있다. 역사책을 읽을 때 이름 다음에 괄호하고 생몰연도만 표기된 숫자 사이 <~> ‘멸치꽁지’같은 이 ‘작은 파선’속에 한 인간의 생애가 고스란히 꼼짝없이 체포되어 요약된 것이 마땅하냐는 눈초리의 시다. 한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살아낸 생과 그 절절한 과정들을 저 파선 안에서 어찌 이해하고 전달받을 수 있을까. ‘~’ 속에 일괄 파묻히는 것에 대한 허망을 토로하지만, 그것도 교과서에 오를 만한 인물이면 모를까 티끌조차 남지 않는 대부분의 생은 어쩌란 말이냐.

우리 현대사에 국한하더라도 영웅에 버금가는 헌신적인 삶을 살다간 의인은 적지 않았다. 그들조차도 대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져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10년 전 우리를 그토록 뜨겁게 하고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을 뿌리게 했던 이태석 신부의 파선(1962. 10. 17 ~ 2010. 1. 14)은 달랐고, 우리는 어김없이 매년 이맘때면 그리움으로 그를 소환한다. <울지마, 톤즈> 그의 아프리카 ‘탁본’은 워낙 강렬하고 선명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쉬 지워지지 않고 숭고한 삶의 표상으로 그를 되새기기 때문이다.

수단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야할 전사들이 우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의 선종 시 좀처럼 울지 않는 톤즈 사람들이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이 영화가 상영될 당시 신부님의 삶은 교회의 안팎으로 그 파장이 컸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신 자승 스님에 의해 불교의 총본산인 조계사에서도 영화가 상영되었다. “불교에서 지향하는 이타행(利他行)과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 중생을 제도한다)을 천주교 신부님께서 구현했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영화가 끝난 뒤 스님의 말씀이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생애가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했으며, 드디어는 눈물로 고해성사토록 했다. 신부님은 그들에겐 구세주요 예수의 다름 아니었다. "Everything is good." 이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난 신부님의 삶은 담양 성직자 묘역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토록 영혼의 큰 떨림을 주신 신부님의 삶과 업적은 당연히 수단의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선종 10주기를 맞아 고향 부산에 기념관이 개관되었고, ‘울지마 톤즈2’ <슈크란 바바>가 개봉되었다.

‘슈크란 바바’는 수단어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란 뜻이다.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 속에 깃든 비의의 긴 파선(~) 가운데 얼마나 머물 수 있으며, ‘탁본’을 간직할 수 있을까.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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