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선생/ 권혁소

백창우의 동요 ‘내 자지’를/ 너무 무겁게 가르쳤다고/ 학부모들에게 고발당했다// 늙어서까지 젖을 빠는 건 사내들이 유일하다고/ 떠도는 진실을 우습게 희롱했다가/ 여교사들에게 고발당했다// 아파트 계단에서 담배 피고 오줌 쌌다는 주민 신고 받고/ 홧김에 장구채 휘둘렀다가 애한테 고발당했다// 자지는 성기로 고쳐 부르겠다/ 젖 같은 얘긴 하지 않겠지만 만약 하게 될 일이 있다면/ 사람이나 포유동물에게서 분비되는/ 새끼의 먹이가 되는 뿌연 빛깔의 액체로 고쳐 말하겠다/ 그리고 애들 문제는 경찰에 직접 맡기겠다// 잘 있어라 나는 간다/ 수목 한계선에 있는 학교여

-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엽다』 (삶창,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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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의 한 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중인 시인이 일선현장에서 겪은 자신의 교육이념과 현실간의 괴리를 솔직 담대하게 표현한 시다. 현실에서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학습권이 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양질의 수업을 받을 권리가 학생에게 있듯이 교사에겐 수업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동시에 학생도 수업을 방해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으며, 교사는 수업을 혼란 없이 잘 유지하여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교육현장에서는 이러한 권리와 의무가 보장되고 존중받아야함에도 여러 형태로 그렇지 못한 사례들이 자주 발생되고 있다.

교사에게 교육적 권위를 갖게 하고 학생에게는 실효성 있는 인성교육이 처방일 터이지만, 교육현장은 학생과 교사의 역할과 관계가 무너진 지 오래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교권침해가 급증하면서 교사들의 고충이 날로 늘고 있다. 교권침해 행위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 매뉴얼도 없고 학교에 맡기는 형편이다. 학교의 자율권은 교사가 교육의 주체로서 우뚝 제 자리를 지켰을 때 순기능을 다한다. 경쟁과 성적만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학생의 인성교육과 올바른 사제관계의 정립은 늘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요구되지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며 체벌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학생생활지도범위의 한계가 모호하여 시에서처럼 갈등을 빚는 사례가 잦아 교사가 소신을 가지고 교육에 임하기 힘든 실정이다. 교권이 실추되면 학교가 무너지고, 나아가 사회까지 무너지는 무서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오줌이 누고 싶어서 변소에 갔더니/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고 볼라고 볼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안 보여줬다” 초등3학년 아이가 작시한 백창우의 동요 ‘내 자지’다.

어떻게 ‘너무 무겁게’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지’는 국어사전에 등록된 우리의 표준어이다. 언급 자체만으로 망측하게 여기는 학부모가 있다면 그 또한 문제다. 근원적인 문제는 다른데 있는데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오래 전 교육부 성교육 교재에 “여자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 “자극을 주는 옷차림을 피하라.”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성차별적이고 성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남학생들은 점점 거칠어지고 여학생들의 치마 길이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열린 교육이 절실하다. 열린 교육에 대한 삐딱한 시선도 있지만 미래의 우리 아이들에게 인간의 균형적 발달을 강조하는 전인교육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이리라.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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