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철환
▲ 오철환
먼저 맞는 것이 상책이다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국민연금제도가 시행된 지 삼십여 년이 넘어서고 베이비붐세대의 노령연금 수급이 개시되었다. 베이비붐세대는 전후 어려운 시절에 성장한 까닭에 먹고살기 바빠 별다른 노후준비를 하지 못했다. 대가족 농경사회에선 자식이 곧 노후대책이었다.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보험이었다. 소를 팔고 논밭을 팔아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그렇게 키운 인재가 고속성장의 자양분으로 작용하였다. 그 덕에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잘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전통적 가치관은 붕괴되었다.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바뀌었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문화는 불편한 관습으로 폐기되었다. 베이비붐세대는 낀 세대다.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버림받은 첫 세대다. 부모의 노후보험 역할을 떠맡았지만 자식에게 든 보험은 깨져버린 꼴이다. 노후준비는 강제로 가입된 국민연금이 거의 유일하다. 입을 잔뜩 내밀었던 것이 지금에 와선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수령액이 적은 것이 흠이긴 하다. 개선할 여지가 있다.

국민연금은 노후를 지켜줄 든든한 수호천사다. 은퇴자에겐 복지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금의 중요성에 비춰 그 설계와 운용을 완벽히 정비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세월이 흘러 여건이 변화할 경우에도 그에 맞춰 디테일을 신속히 조정해야 한다. 저출산과 노령화로 인한 제도의 문제점과 개편 필요성은 벌써 예견된 일이었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마냥 눈치만 보고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국민의 노후가 걸린 중차대한 사안을 표만 의식하여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것이다.

2054년경 국민연금기금이 고갈될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심각한 저출산과 급격한 노령화 때문이다. 기금 고갈을 막으려면 하루빨리 보험요율을 올려야 한다. 표를 깨먹는다고 하여 번연히 다가올 위험을 모른 척 해선 안 된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 비록 인기가 없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폭탄 돌리기를 하는 모양새다. 단일안을 제출해도 신속히 처리하기 힘들텐데 정부는 무려 다섯 가지 방안을 던져놓고 있다. 제도개편을 미룰수록 보험료 일시 인상의 충격은 그만큼 더 커진다. 당장 2088년까지 기금을 유지하려면 내년에 보험료율을 16.02%까지 올려야 한다. 이대로 갔다간 2030년이 되면 17.95%, 2040년이 되면 20.93%를 한 번에 올려야 한다. 기금이 고갈되면 매년 걷은 보험료로 연금을 지급해야 할 판이다. 보험료를 빨리 올리지 않으면 종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는다. 미룰수록 매를 번다. 이왕 맞을 매라면 먼저 맞는 편이 좋다.

국민연금 제도개편이 화급한 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엉뚱한 일에 한눈을 팔고 있다. 스튜어드십코드를 통한 기업 길들이기에 정신이 없다. 수익을 올릴 방안을 연구해도 모자랄 판에 기업경영에 개입하거나 지배구조에 간여하려고 한다. ‘염불보다 잿밥’이란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기금 투자는 수익성과 안전성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기업을 지배하거나 경영에 개입하기엔 전문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의 성격과도 맞지 않다. 스튜어드십코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면 연금사회주의로 갈 위험성이 크다. 우리 헌법정신에 비추어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책임투자도 연구과제다. 책임투자란 투자를 결정할 때 환경문제, 사회성, 지배구조 등을 고려하여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적이고 투명한 기업, 환경 친화적인 기업에 투자하고 비도덕적이고 환경 파괴를 일삼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음으로써 기업의 변화와 책임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긴 하지만 기금투자로 사회적 책임과 도덕성까지 한 번에 달성하겠다는 의도는 과욕이다. 투자는 수익성으로 승부해야 한다. 수익성 투자에 지나친 가치판단은 금기다. 기금투자에 느슨한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둘 수 있겠지만 기업에 대한 규제와 응징은 다른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정석이다.

국민연금기금은 오로지 국민의 돈이다. 따라서 그 기금은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국민을 위해서만 관리되어야 한다. 이념적인 목적이나 정치적인 의도로 이용되어선 안 된다. 이사장을 위시한 직원의 인사도 독립성과 전문성을 보장해야 한다. 국민연금 조직이 선거의 논공행상이나 정치인의 스펙을 쌓는 자리가 되어선 곤란하다. 세대 간 부담 전가가 일어나지 않도록 적시에 보험요율을 조정하는 일이 급선무다. 연금에 목메고 있는 은퇴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은퇴자의 유일한 기댈 언덕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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