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치와 시/ 박기섭

포장집 낡은 석쇠를 발갛게 달구어 놓고/ 마른 비린내 속에 앙상히 발기는 잔뼈/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낱낱이 발기는 잔뼈// 가령 꽃이 피기 전 짧은 한때의 침묵을/ 혹은 외롭고 춥고 고요한 불의 극점을/ 무수한 압정에 박혀 출렁거리는 비애를// 갓 딴 소주병을 정수리에 들이부어도/ 미망의 유리잔 속에 말갛게 고이는 주정(酒精)/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쓸쓸히 고이는 주정(酒精)

- 시조집『비단 헝겊』(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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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에 놓인 잘 구워진 꽁치는 그저 밥의 찬이나 술의 안주일 따름이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개입할 필요 없이 젓가락으로 후벼 살을 발려 먹기만 하면 된다. ‘포장집 낡은 석쇠’위의 꽁치라고 다를 건 없다. 정서의 반란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꽁치의 살아생전 저 태평양 푸른 바다 깊은 곳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돌아다니던 기억을 애써 발라낸다. ‘낱낱이 발기는 잔뼈’에서 고생대의 적막을 들쑤시기도 하고, 꽁치의 운명을 떠올렸다가 비릿한 비애를 건져내기도 하는 것이다.

시는 그런 것이고 시인은 대저 그런 인간들이다. 시인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면 삼라만상 그 모든 것에 촉수를 들이대는 탐구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잔뼈 갈라내듯 단지 시 한 편 건지려고 잔머리 굴리는 사람은 아니다. 매사에 그런 식이면 다른 멀쩡한 사람 눈에는 필경 밥맛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한 편의 시에는 고스란히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가 조용히 담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없는 기교로만 조합된 시인의 시를 읽을 때는 잔뜩 조미료를 들어부은 것 마냥 밍밍하고 찝찝하다.

금세기 미국인들의 글쓰기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킨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고 하지 않던가. 하물며 일반인의 글쓰기에서도 그리 주문하는데 시인은 더 말해 무엇 하랴. 진지한 열정, 몸을 내던지는 연소는 시인에게 필요불가결한 자구책이기도 하다. 시인은 때로 시대의 산소량을 재는 계기이며, 밤에도 깨어있는 정신의 불침번이다. 보통사람들이 잘 느끼지 못하는 산소의 총량을 시인은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유난히 시인들이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서정시건 서사시이건, 시의 제재가 자연이든 우주이든 그 침묵과 고독과 비애는 결국 인간 문제에 귀결되어 존재의 근원인 삶을 탐색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 과정에서 때로 반성적 사색의 시상을 전개할 때 ‘갓 딴 소주병을 정수리에 들이’붓기도 하는 것이다. 알코르가 아니면 냉수라도 상관없다. 시는 정신의 배설물이면서 동시에 정신을 정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만 꽉 막혀 변비가 심해질 땐 도리 없이 스스로 흠뻑 적셔보는 것이다.

그때 말갛고 쓸쓸히 고이는 주정(酒精)이 비록 지독한 비린내뿐일지언정, 그래도 시인은 끊임없이 회의하며 번민하고 애달아하는 몹쓸 화학자여야 한다. 자신의 시에 대한 치열한 회의를 품지 않는 시인은 그래서 미덥지 않다. 그 회의와 번민과 긴 방랑과 고통 가운데서 자기 세계를, 자기가 속한 세상을, 세계 속의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가는 도정인 것이다. 그리고 ‘미망의 유리잔 속에 말갛게 고이는 주정’ 한 방울을 얻기 위해 시를 쓴다. 뒤집어 말하면 나는 그러지 못해 시를 쓰진 못하고 감상을 빙자하여 남의 시에 사족이나 다는 것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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