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捨石)

발행일 2019-12-01 14:46:0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사석(捨石)/ 박무웅

할아버지에게서 처음 바둑을 배웠다/ 바둑은 두 집을 지어야 산다고 하셨다/ 이리저리 고단한 대마를 끌고 다녀도/ 한 집 밖에 남지 않으면 끝이라 하셨다// 대마불사에 목을 걸고/ 집과 집, 길과 길을 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오궁도화가 만발하여 보기 좋아도/ 한순간 낙화하면 끝이라 하셨다// 세상에는 버릴 게 없다는 할아버지 말씀대로/ 사석을 모아들이며/ 한 집 한 집 키워 나갔다/ 길과 길을 만들어 삶을 이어 나갔다// 판이 끝날 때마다 모아들이는 사석이/ 바로 나만의 묘수였다

- 국민일보 ‘아침의 시’(2008년7월15일)

바둑에서 의도적으로 버리는 돌을 ‘사석’이라고 한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돌을 버리면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거나 다른 실리를 챙기는 ‘사석전략’이란 게 있다. 바둑의 고수들은 어떤 돌이 앞으로 더 큰 가치가 있고 가치가 덜 한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적은 돌은 과감히 버림으로써 반드시 더 큰 대가를 얻는다. 그러나 하수들은 버릴 돌과 살려할 돌을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버리는 게 아까워 모두 살리려 하지만 결국에는 대마를 죽이고 판을 넘겨주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들의 한계이다. 그래서 나온 바둑교훈이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뜻의 ‘사소취대(捨小就大)’이다.

바둑에는 그 말고도 숱한 격언과 교훈이 있다. 그 가르침들은 바둑판에만 국한하지 않고 곧잘 삶의 지혜로 응용된다. 인생을 비롯해 정치나 경영에 두루 써먹어도 들어맞는 까닭은 바둑이 세상의 축소판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상에서의 경륜과 체득에 바탕을 두어야지 책을 통한 공부만으로 실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힘들다. 과거 안철수씨가 좋은 머리로 혼자 공부해 1급 수준의 바둑이라지만 그런 바둑에서 정치원리를 구하려 했으니 실패할 밖에. 정치는 경영과는 또 다른 복잡한 변수가 작동한다는 사실도 그는 간과했다. 전체 국면을 보는 눈이나 상대의 급소를 내가 먼저 선점해야 편해진다는 지혜도 바둑에서 가르친다.

바둑의 1교훈인 ‘너무 승부에 집착하다보면 오히려 그르친다.’는 ‘부득탐승(不得貪勝)’이란 말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바둑격언에 앞서 상대가 있고 장벽이 있는 상황에서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게 세상사고 정치이며 게임이 아닌가. 한때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화제였다. 바둑에서 ‘미생’은 아직 온전히 살지 못하고 생사가 불투명한 돌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리저리 고단한 대마를 끌고 다녀도’ ‘두 집을 짓지’ 않으면 살아있는 돌이라 할 수 없다. 정치판에서도 명심할 일이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이세돌이 토종 인공지능 ‘한돌’과 다음 달 은퇴대국을 갖는다고 한다. ‘한돌’은 앞서 국내 정상급 바둑 기사 5명과의 대국에서 모두 승리했다.

올해 세계 AI 바둑대회에서 3위에 오를 정도의 실력이다. 모두 3차례의 대국으로 처음엔 이세돌이 두 점을 깔고 두는 접바둑이란다. 1920년대 숙조부가 ‘국수’ 칭호를 들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바둑을 좀 두셨다고 하나, 난 늘지 않은 5급 실력에 그칠 만큼 그다지 소질이 없다. 돌을 안 잡아 본지도 10년이 넘었다. AI의 미래보다는 인간의 미래를 더 믿고 싶다. AI가 활개치는 세상에서 ‘길과 길을 만들어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세돌 자신의 명예와 인류의 자존심을 지켜주길 바라며 이세돌의 ‘묘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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