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박물관 소식-거리에 낙엽/ 이문재

늦가을과 초겨울이 겹쳐지는 저녁입니다, 저녁이고 찬비 내립니다, 사람의 불빛들이 아스팔트 위로 번지르르하고, 나는 어둡고 추워서 알고 있던 이름들을 불러보는데, 그이들은 여기에 없습니다, 없고, 농업박물관 앞, 보도블록에 박혀 있던 가로수들이 낙엽을 떨어뜨립니다, 집광판이었던, 뿌리의 입이었던 활엽들이 젖어서 활강하는 걸 보고, 아 저것들이 방하착(防下着), 방하착하라, 하며 자진하는구나, 저것이 한 생애의 유언이구나, 라고 쓰려다가, 이내 치워버립니다 저 낙엽들은 뿌리로 내려가 만나지 못하고 매립지로 실려가겠지요, 그런데 어디 낙엽만 그런 것일까요, (중략) 농업박물관 앞, 깨진 보도블록 한 장을 들어내고 젖은 낙엽 한 장을 집어넣어 주었습니다, (하략)

- 시집『마음의 오지』(문학동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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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충정로에 있는 농업박물관은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농업의 중요성과 우리의 전통농경문화를 알리기 위해 농협중앙회가 세운 농업사전문박물관이다. 가로수들이 우수수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뭇잎은 뿌리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그 명을 다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서 제 뿌리가 얼지 않도록 덮어준 뒤 썩어 거름이 되어 땅을 기름지게 한다.

그 땅은 뿌리를 튼튼하게 하여 이듬해 다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낙엽뿐 아니라 만물은 그 생명을 다하면 근본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도심의 가로수 낙엽은 뿌리로 가지 못하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그냥 쓰레기매립지로 실려 간다는데 문제가 있다. 시인은 그 앞에서 ‘아 저것들이 방하착(防下着), 방하착하라, 하며 자진하는구나,’ ‘저것이 한 생애의 유언이구나,’라고 쓰려다가 이내 치워져버리는 것을 보고 멈칫한다. 좀 놔둬도 되겠건만 도심에서는 낙엽들이 쌓이고 뒹구는 꼴을 보지 못한다. ‘방하착’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편하게 가진다는 의미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도 곁에 두지마라는 뜻이다.

‘방하착’은 당나라의 선승 조수선사의 선문답에서 유래되었다. 내려놓으라는 말은 무엇인가에 아등바등 집착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로 흔히 쓰인다. 모든 것을 손아귀에서 내려놓고 모든 것에서 내려와 참으로 홀가분해지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탐욕을 버림으로써 무소유를 통한 인간의 자기회복이란 의미를 지닌다. 본디 낙엽의 쓰임이 그렇듯이 버린다고 그냥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어느 시점에서 모든 번뇌와 집착을 떨치고 한걸음 뒤로 빠질 수만 있다면 그게 곧 도인의 경지일는지 모른다.

걱정과 번뇌를 내려놓고 집착과 편견, 자신의 관념이 옳다는 것마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즉 원하는 바 없이 자신이 할 바를 하는. 말처럼 쉽지 않다. 불출마와 정치은퇴 바람이 불고는 있으나 얼마나 후폭풍을 만들어낼지 의문이고, 그들의 선언 자체가 ‘방하착’의 마음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작 정치에서 제 몸 하나씩 내려놓을 사람들은 따로 있고 넘치고 넘친다. 권력욕에 중독된 자들에겐 해독제가 없다는 것을 역사는 숱하게 증명해왔다. 여의도 앞, ‘깨진 보도블록 한 장을 들어내고 젖은 낙엽 한 장을 집어넣어 주고’ 싶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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