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법성사…금오산 채우는 법성사 개울 물소리…도심 가까운 절에서 잠시 쉬어간다

발행일 2019-11-19 09:07:4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5> 금오산 법성사

금오산에 수많은 절, 옥림사터에 현대 들어 창건

통일신라시대 추정되는 석가여래불상 문화재자료



금오산 법성사에서 보이는 금오산 정상. 금오산은 예부터 남숭산이라 불리며 신라불교가 처음 전해진 구미에서도 불교의 성지처럼 여겨졌던 곳이다.
구미시 도개면 모례의 집에서 움트기 시작한 신라불교는 낙동강 건너 선산읍으로, 국보 182~184호로 지정된 금동여래입상,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된 고아읍으로, 이어 구미의 명산 금오산 등 구미 전역으로 확산했다.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신라불교의 성지로 우뚝 선 것이다.

구미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한 금오산은 예부터 지역의 명산, 신령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

◆남숭산이라 불린 금오산, 수많은 절터 남아 있어

금오산이 불교와 관련 깊다는 것은 옛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원래 대본산이었던 금오산은 한 때 남숭산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중국 황하강 유역에 있는 중국 오악 중의 하나인 숭산과 생김새가 비슷하다해 붙여진 이름이다.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숭산이라 하고 황해도 해주(천태종과 관련이 깊다)에 북숭산을 두었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 천태종을 창종한 후 문도들을 이끌고 남숭산(금오산)으로 옮겨와 수도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1편 신라 이후의 구미불교 중 선봉사 이야기에서 다룬 바 있다.

그가 대각국사 의천으로 호국불교 포교와 국정 자문에 임하면서 남숭산의 품격과 위상을 높였다.

금오산은 해발 1천m를 넘지 않는 산이지만 굳이 숭자(嵩字)를 붙여 중국의 유명한 숭산에 비겨 칭한 것은 모두 불교와의 연관성에서다.

이렇듯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절이 금오산에 자리를 잡았다.

1968년 진행했던 선산지구고적조사 보고서에는 ‘금오산은 계곡마다 물소리와 목탁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또 다른 조사에서도 유구와 유적, 표석이 남아 있는 금오산 평지와 산록부, 정상부에 입지한 절터 18곳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 조사에서 확인한 금오산 평지와 곡저부의 절터는 대혈사, 갈항사, 선봉사, 옥림사 등 7곳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가운데 신라의 고찰 갈항사와 대각국사비가 있는 선봉사의 경우 규모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비해 산록에 있던 절은 2단이나 3~4개의 계단식 터를 갖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며 규모도 작았다.

물론 정상부에 있었던 절 또한 규모가 상당히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현존하는 약사암과 같이 입지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성안의 동남쪽에 있었던 진남사는 터의 규모로 보아 상대적으로 잘 갖추어진 가람배치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금오산 절터, 지형에 맞춰 규모와 가람배치

또 금오산에 자리했던 절들은 금오산의 지형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으로 지어졌다.

산록배치형인 구미시 수점동 절골의 절터는 남과 북의 단애가 결정되는 지점의 폭포수나 병풍바위 등 수직적 구조를 배경으로 가람을 배치해 성속의 공간 구분이 명확한 도량조건을 갖췄다.

또 현존하는 약사암과 같이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봉사와 동양사는 정상의 장점을 살려 가장 먼저 해를 맞거나, 구미지역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절을 지었다.

금오산 정상 보봉에서 조금 내려선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양사터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자기, 옹기파편, 구들장 일부가 발견됐다.

특히 약사암이나 보봉사 처럼 해발 8~900m 수준의 봉우리와 정상부에 입지한 절터는 거대한 암석이나 화강암 단애를 배경으로 조형된 것이 지형적 특색이다.

금오산에 있던 절에 대한 기록은 최현의 일선지에도 등장해 그 존재를 입증하고 있다.

일선지에 ‘금오산의 최상봉이 보봉이다. 봉 아래에 작은 사찰이 있으니 곧 보봉사이다. 남동쪽 수백 리를 두루 바라볼 수 있다’라던가 ‘동양사는 보봉사 동쪽에 있다. 아침 햇빛이 먼저 비치기 때문에 이름으로 하였다. 시선이 미치는 곳은 보봉과 다름이 없고, 산에는 해송이 많다’고 적었다.

또 ‘전종사와 보제사는 금오산 서쪽 기슭에 있었다. 임진란에 함께 불탔다’고 기록하고 ‘도선굴은 금오산 북쪽에 있다. 상하로 푸른 절벽이 천 길이나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가운데에 바위 구멍이 있다.(중략) 민간에 전하길, 고려의 신승 도선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한다’고 전한다.

법성사 표지석.
◆고려시대 창건했던 옥림사터에 재창건한 법성사

이렇듯 남숭산, 즉 금오산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신령스러운 산으로 예부터 많은 절이 모여 있었다.

이곳에 현재 천 년 고찰 약사암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해운사, 고려말 창건했다가 폐사됐다는 옥림사터에 지어진 법성사 등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법성사는 현대 창건한 절이다.

금오산 상가 주차장에서 구미시 형곡동을 잇는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형곡동 전망대에 미치지 못해 오른편에 법성사라는 절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법성사 인근에 제법 규모를 갖춘 옥림사가 있었다고 한다. 옥림사는 고려말에 창건해 조선 중기인 정조 때 폐사됐다가 다시 고종 때 중건된 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시 폐사됐다고 한다.

조선말인 고종 때 재건 당시에는 법당 6칸과 방 10칸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법성사는 구미지역에서 도심에 가장 가까운 절 가운데 한 곳이다. 이 절은 1962년 7월 해운사 주지로 부임한 지우 스님이 현 절터에 토굴을 마련하고 수행했던 곳이다.

이후 1991년 4월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해 정면 3칸 규모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2층 누각형식의 종각, 천불전, 요사채, 종무소 등을 갖추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법성사를 바라보면 절 앞으로 키만 늘씬하게 키운 소나무 몇 그루가 종각과 대웅전을 가리고 섰다.

종각을 통해 대웅전을 올려다본다. 언제 칠했는지 단청이 가을 단풍마냥 곱다. 종각 아래인 천왕문에 들어서면 양편으로 사천왕이 그 큰 눈을 부라리며 호기롭게 지키고 서 있다.

불교에서는 이 사천왕이 수미산(불교의 우주론 중 가장 근본이 되는 상상의 산) 중턱에 살면서 4방위를 관장하며 악으로부터 이 세계를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천왕문에 있는 사천왕 역시 부처님의 성역을 악과 사사로움으로부터 지켜내는 상징이라고 한다.

종각루 아래 천왕문을 누하진입하며 올려다 본 금오산 법성사 대웅전. 누하진입은 종각루 아래를 지난다는 말이다.
대웅전에 다가가기 전에 종각 아래, 즉 천왕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누하진입이라고 한다. 종각루 아래를 지난다는 말이다. 이는 절을 찾은 이가 부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라는 절 건축의 숨은 의도이다.

종각을 통과하면 조금은 넓은 마당이 나타나고 계단 위로 대웅전이 앉아 있다. 초기에는 법당과 요사채를 같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대웅전 왼편에 요사채를 새로 지었다.

금오산 법성사 경내에 있는 석가여래불상.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584호로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구미시 송정동에 사는 동래 정씨 일가가 100여 년 넘게 보관해 오던 것을 법성사에 기증해 오늘에 전한다.
대웅전 오른편 뒤쪽에 문화재가 한 점 있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584호인 금오산 법성사 석가여래불상(좌상)이다.

이 불상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헌종 6년(1840) 하고미면에 살던 정민기씨의 꿈에 5대조 할아버지가 자신의 소유 전답이 있는 원남동 일명 부처골에 나타났다. 이튿날 아침 그곳에 가보니 부처 형상의 불상이 있어 그 자리에 토담집을 지어 보존 관리해왔다는 것.

이후 1965년께 지금의 구미문화예술회관(구미시 송정동)이 있는 곳으로 옮겨와 보관하다가 이 일대가 신시가지로 조성되면서 1970년께 법성사 창건주인 지우 스님과의 인연으로 법성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이 석가여래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대좌 위에 나나의 돌로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불두는 마멸이 심한 상태였다.

그래서 보존 중 마멸되거나 부서진 곳을 시멘트로 고쳤다가 2009년께 시멘트 등을 걷어내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아직 곳곳에 고쳤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불상은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약병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고 있다.

금오산 법성사 산신각. 일반적인 전각과는 다른 모습으로 석굴 형태를 띠고 있다.
대웅전 왼편에는 절에 있는 전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형태의 전각이 하나 있다. 산신각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 남겨진 무속인의 건물을 부수려 했으나 중장비 기사가 이를 꺼려 형태를 남겨둔 채 법당으로 꾸민 것이라고 한다.

법성사는 그 규모와 맞게 단출하다. 아니 깔끔한 인상이다. 법성사는 왕성한 사회봉사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1996년 봉사단체인 자비회를 결성한 법성사는 2002년에는 법운사회복지회를 설립하고 효행장학금과 중·고생 급식비, 학자금, 저소득층 생활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라오스 동북부 생쾅주 반폰통 지역의 교육지원 사업 등에도 적극적이다.

법성사는 금오산 도수령에서부터 내려오는 개울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법성사 왼편은 금오산 도수령에서 흘러내리는 개울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있다.

금오산은 원래 계곡이 깊지 않아 물이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법성사 옆 개울은 마를 날이 없다.

앞서 선산지구고적조사 보고서에 ‘금오산은 계곡마다 물소리와 목탁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었다. 아마도 이 말은 법성사 개울 물소리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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