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잔치 국수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달이 기울어가니 더욱 쌀쌀하게 느껴진다.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로 병원에 들렀다. 반색하며 인사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퇴원 예정이었던 아이였다. “왜 아직 여기 있어?” 하고 물으니 꽃 잔치 국수 먹고 가려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주말 특식으로 나오는 잔치 국수가 녀석에게는 알록달록 고명이 얹혀 장식한 꽃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국수처럼 보였을까.

‘꽃 잔치 국수‘ 그 이름이 그냥 ‘국수’보다 왠지 예쁘게 들려 더 맛이 있을 것만 같다. 녀석은 그것이 너무너무 맛있어서 꼭 한 번만 더 먹고 가려고 졸라대었다니. 아이들을 데리고 방송통신대학에 다니며 공부하고 일하느라 늘 바빠서 동동거리곤 하던 그의 엄마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호흡기가 약한 두 아이가 덜컥 병이 나서 모두 입원해있었으니 얼마나 더 심신이 지쳐서 그녀가 힘 들었을까. 얼른 퇴원하여 집에서 쉬고 싶을 터인데, 철없는 녀석은 해맑은 얼굴로 꽃 잔치 국수 노래를 불러댄다. 열에 들떠서 엉엉 울어대다가 이제는 몸이 회복되어 국수라도 먹으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어머니는 아이들이 면을 아주 좋아한다며 하염없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좋은 시절이 오면 그리운 부모님께 기분 좋게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중국 여인, 그녀는 오늘도 피곤할 터인데도 아이들의 청을 들어주느라 한 발짝 뒤에서 다소곳이 서 있다. 어쩌면 좋은 시절은 오늘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고 또 그 먹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좋은 시절이고 행복한 날이지 않겠는가.

적게 가지고도 늘 밝은 얼굴로 아이들을 거두는 그녀를 보면서 참으로 소박하고 만족한 삶을 떠올린다. 문득 금강경의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체의 모든 법은 마치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아침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은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만사는 잠시 머무르다 사라지는 것이다. 이 세상이 모든 것이 다 그러지 않던가. 그러니 사랑도 나누고 아픔도 서로 나누어 가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건 없이 생색 없이 베풀라는 것이 바로 경전의 가르침일 것이다.

겨울로 접어드니 인생의 덧없음을 절절히 깨닫게 된다는 이들을 더러 만난다. 덧없이 사라질 인생이니 더더욱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찾아 들어 자꾸만 집착하게 된다고. 하지만 요즘엔 미니멀리즘이 대세인 것 같다. 무엇이든 단순하게, 가진 물건뿐만 아니라, 생각도 생활도 단순하게 정리하고 감정도 낭비하지 않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다.

집안의 생활용품, 옷가지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캠핑이나 여가활동에서 필요한 장비와 용품을 최소화하면서 적지만, 더 좋은 것을 추구한다. 독일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단순하게 사는 것이라는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다. 그는 미니멀리즘이란 무조건 줄이는 게 아니라 ‘나쁜 것’을 줄이는 것이라고 했다. 한때는 물건을 정리해 수납을 잘하는 것이 살림을 잘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필요한 것만 남기고 사용하고 ‘비움’, ‘덜어냄’이 미덕인 시대가 되었다. 정리의 기본은 ‘버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수납을 잘할수록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쌓아둔다고 풍요해지는 게 아닌데도 버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도 없다.

일본 정리상담사 곤도 마리에는 그녀의 책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했다. 찬장 속에 수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쌓여있는 식기와 와인 잔들은 공간만 차지하는 짐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쓸지도 모르고 누군가로부터 받은 의미 있는 선물이라며 버리지 못한다. 이미 오래전에 사뒀던 것들에 대한 애정은 쉽게 식지 않던가. 마음에 드는 옷을 사면 한 달이 즐겁고, 좋은 차는 6개월이 신나고, 좋은 집도 1년이 지나면 만족감이 줄어든다고 하지 않은가. 덜어내고 비우고, 꼭 쓸 것만 취하는 선택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지나가면 각자에게 쓸모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은 자연스레 구별된다.

아무리 단순하게 살아도 손에 익은 만년필, 잘 깎아 가지런히 놓아둔 연필, 쓰기 편한 일기장은 기쁨을 주는 것들이지 않겠는가. 아이가 ‘꽃 잔치 국수’를 기다리듯 우리가 모두 고대하는 그 무엇은 언제쯤 얻을 수 있을까.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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