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미천에서/ 윤일균

예서 속 깊은 가을의 소리를 듣는다/ 개개비도 떠난 들녘/ 오랜 벗 같은 사람 하나/ 기울어진 농가 앞을 저물도록 서성거린다/ 고봉밥 먹여주던 큰 들 지나서/ 일백육십리 물길 아프게 굽이쳐 흘러 남한강에 이르도록/ 네가 키운 건 돌붕어 모래무지 메기만이 아니다/ 말하자면 청춘의 재 너머/ 기약 없이 흔들리는 시대의 물빛으로 너는/ 금모래 언덕 남한강 갈대들을/ 품마다 온종일 끌어안고서 앓다만 감나무처럼 서있다/ (중략)/ 내 아비의 탯줄은 아직도 예서 머물고 있는가/ 먹빛 그림자 어두운 빈자리/ 납작 엎드린 농가에서 달려 나오는 홀아비 삼촌의 해수기침소리/ 그 밤, 다시 뜬소문처럼 찾아들 때/ 흰 가루약으로 하얗게 부서져 흐르는/ 여주 점동면 도리마을 청미천가에서/ 나는 아직껏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시집 『돌모루 구렁이가 우는 날에는』 (b,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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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미천은 용인 문수산에서 발원하여 이천 여주를 거쳐 남한강에 합류하여 팔당호로 흘러들어간다. 예전에는 이름그대로 참 맑고 아름다웠던 강이다. 지금도 수로에서는 씨알 굵은 붕어들이 제법 올라오고 있으나 옛날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시인은 그 좋았던 시절의 ‘금모래빛’ 청미천을 오롯이 기억하며, ‘유년의 강가에서 노니는 꿈을 마신다’ 그러나 좋았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닮은 가족사가 어른거리고 시인은 그 언저리를 서성인다. ‘아직껏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고 했는데, ‘그 사람’에 포개어진 이가 여럿인 듯하다.

윤일균 시인이 최근 등단 16년 만에 첫 시집을 내고 지난 시월 마지막 밤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남한산성 검북리의 ‘성문밖 대안학교’에서 아이들과 행사장을 가득 메운 축하객들이 함께였다. 넉넉히 음식을 나누었고 기념행사에 이어 독립영화 ‘시인 할매’도 상영하였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오던 길 돌아본다. 남은 건 다양한 모양의 상처뿐이다. 오지게 아문 상처 중에 몇은 나름 시다”면서 “시집 속에 접힌 턱없는 나의 사랑에 단 한 사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러면 되었다”며 자신을 낮추고 무욕을 드러내면서 겸허해했다.

하지만 행사 마지막 순서로 시인 자신이 각혈하듯 ‘청미천에서’를 낭송하는데, 여태껏 그런 에너지와 열정을 다 쏟아 부은 낭송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좌중에서도 함부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얼핏 ‘오버’같기도 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시인의 진정성이었다. 진정성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그것은 스스로 내세운다고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태도나 행동, 말과 글을 종합하여 판단하고 부여한다. 진정성의 담보로 사람과 글의 일치도 느낀다. 가끔은 위선의 도구로도 쓰이지만 대체로 진정성은 무욕과 겸허의 형식을 수반한다.

시인은 건강상의 어떤 계기로 스스로를 낮추는 겸허한 삶의 자세를 갖추면서 뭇 생명을 예찬하기 시작했다. 삶을 통째 리모델링하는 수준으로 생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시인은 가치관이 바뀌었고 바뀐 가치관으로 굳건해진 삶을 살아간다. 시가 시인을 닮아가고 있었다. 주제넘게 발문을 썼지만 시집에는 삶의 욕망과 속도에 저항하는 시들로 가득했다. 시와 행간에서 시인의 밀도 높은 진실한 삶을 엿보았다. 장차 더 깊고 풍성해질 시인의 시와 소통할 것이라 믿는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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