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혜공왕||8세에 즉위해 24세 죽을 때까지 소극적 정치, 김지정의 난에 살해됨

▲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주조를 시작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구리 12만 근을 들여 밀랍주조법으로 만들었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현재의 위치에 지어지면서 경주문화원에서 옮겨와 지금에 이르렀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 종각.
▲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주조를 시작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구리 12만 근을 들여 밀랍주조법으로 만들었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현재의 위치에 지어지면서 경주문화원에서 옮겨와 지금에 이르렀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 종각.
신라 제36대 혜공왕은 경덕왕이 하늘에 빌어 늦게 낳은 아들이다. 혜공왕은 8세에 즉위해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했다.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각간의 난을 비롯 많은 반란이 있었다.

혜공왕 시대에 많은 난이 일어났던 것은 측근과 반대하는 세력들 간의 정치적인 목적에서의 싸움과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오락에 빠져 이에 대한 반대세력들의 반란이 주를 이루었다.

혜공왕은 결국 김지정의 난이 발생해 김양상과 김경신이 진압하는 과정에 살해되는 비운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 성덕대왕신종이 1992년 이후 훼손을 우려해 타종이 금지되자 신종과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대종을 2016년 주조해 ‘신라대종’이라 이름짓고 경주 노동리 고분군이 있는 곳에 종각을 지어 기념행사 때마다 타종하고 있다.
▲ 성덕대왕신종이 1992년 이후 훼손을 우려해 타종이 금지되자 신종과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대종을 2016년 주조해 ‘신라대종’이라 이름짓고 경주 노동리 고분군이 있는 곳에 종각을 지어 기념행사 때마다 타종하고 있다.
혜공왕 때 처음으로 5묘를 지정해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5묘는 김씨의 시조 미추왕, 삼국통일의 주역 무열왕과 문무왕,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성덕왕과 경덕왕이다.

혜공왕은 경덕왕에 이어 성덕대왕신종을 완성했다. 성덕대왕신종은 원래 봉덕사에 있었는데 1460년 영묘사로 옮겼다가 홍수로 떠내려가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보관했다. 1915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현재 경주문화원 자리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을 새로 지어 지금의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보관하고 있다.

▲ 1915년 봉황대 옆 종각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을 현재 경주문화원 자리에 경주박물관을 조성하고 옮겨와 자정을 알리는 등의 용도로 종을 쳤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갈 때까지 성덕대왕신종이 있었던 경주문화원의 종각.
▲ 1915년 봉황대 옆 종각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을 현재 경주문화원 자리에 경주박물관을 조성하고 옮겨와 자정을 알리는 등의 용도로 종을 쳤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갈 때까지 성덕대왕신종이 있었던 경주문화원의 종각.
◆삼국유사: 혜공왕

대력 초년(766)이었다. 강주의 관청 건물 본관의 동쪽 땅이 점점 함몰하더니 연못이 되었다. 세로가 13척이고, 가로가 7척인데 어디선가 잉어 대여섯 마리가 나타나 점점 커지더니 연못 또한 따라서 커졌다.

정미년(767)에 이르러 천구성이 동쪽 누각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만 하고 꼬리는 3척쯤 되며 색깔은 타는 불 같았는데 천지가 진동하였다. 또 이해 김포현에서는 논 5경 가운데 모든 쌀알이 이삭이 되었다. 이해 7월 북궁의 뜨락에 별 두 개가 땅에 떨어지고 또 하나가 떨어졌는데 세별이 모두 땅속에 파묻혔다.

이보다 앞서 대궐 북쪽 뒷간 속에서 두 가닥 연꽃이 피어났고, 또 봉성사 밭 가운데서 연꽃이 피었다.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와 잡으려 했으나 놓쳤다.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공작새가 수없이 모여들었다.

▲ 성덕대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주조한 성덕대왕신종. 국립경주박물관에 울음을 멈추고 신라 역사를 고증하고 있다.
▲ 성덕대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주조한 성덕대왕신종. 국립경주박물관에 울음을 멈추고 신라 역사를 고증하고 있다.
안국병법의 하권에 따르자면 천하에 군사가 큰 난을 일으킬 것이었다. 이때 대사면을 내리고 살펴보며 조심하였다.

7월3일 대공 각간이 군사를 일으키자 왕도와 5도의 주군 모두 96명의 각간이 서로 싸워 큰 난이 일었다. 대공 각간의 집은 없어지고, 그 집의 보물과 비단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신성과 장창에 불이 나 타버렸다. 역모를 저지른 무리의 보물과 곡식은 사량과 모량 등 마을 가운데 있었는데 또한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난은 석 달 남짓 되어 그쳤다. 상급을 받은 자가 자못 많았고, 죽임을 당한 자도 무수히 많았다. 표훈대사의 말에 나라가 위태롭다 함이 이것이다.

▲ 성덕대왕신종을 그대로 닮은 신라대종. 경주 노동리에 자리해 행사때마다 성덕대왕신종의 울음을 흉내내고 있다.
▲ 성덕대왕신종을 그대로 닮은 신라대종. 경주 노동리에 자리해 행사때마다 성덕대왕신종의 울음을 흉내내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공왕의 죽음

혜공왕은 어려서부터 후궁과 여자들에 둘러싸여 자라면서 심성 또한 점점 여성스러움에 길들여졌다. 왕위에 올라 있었지만 어머니의 섭정으로 정사가 진행되자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의존적인 경향을 보였다. 혜공왕이 성인기에 접어들었어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 등의 대신들이 정치를 주물렀다.

김양상 등의 대신들이 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그들의 전횡이 심해지자 실세에서 밀려난 혜공왕의 삼촌과 사촌, 김사인을 따르던 대신들이 반기를 들면서 대신들 간의 갈등이 심화됐다.

▲ 봉덕사가 홍수에 떠내려가고 1915년까지 종각을 지어 성덕대왕신종이 있었던 봉황대 북쪽.
▲ 봉덕사가 홍수에 떠내려가고 1915년까지 종각을 지어 성덕대왕신종이 있었던 봉황대 북쪽.
혜공왕 초기에는 김사공과 김사인 등의 대신들이 상대등과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휘둘렀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김양상이 상대등에 오르는 등으로 세력의 균형이 바뀌면서 대립의 강도가 커졌다.

김사인 계열의 김대공과 대렴 형제가 각간들의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공 형제는 지방의 귀족까지 상당히 많은 세력을 규합했지만 결국 궁궐 내부까지 진입하지는 못했다. 중앙세력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이 두텁게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96명의 각간들이 서로 패가름을 하여 전쟁을 치른 결과 대공 형제는 실패해 죽음을 맞았다.

▲ 1915년 일제강점기 봉황대에서 경주문화원으로 옮겨가는 성덕대왕신종.
▲ 1915년 일제강점기 봉황대에서 경주문화원으로 옮겨가는 성덕대왕신종.
대신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지만 혜공왕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혜공왕이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음색에 빠져들며 정사에는 소홀하고, 대를 이을 후계자 또한 마땅치 않았다. 이러한 정황들은 무열왕의 12대손인 김경신이 최고 권력에 대한 꿈을 꾸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특히 혜공왕이 여색을 가까이하는 한편 대신들의 자제 가운데 인물이 뛰어난 남자를 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밤을 보내는 등으로 대신들의 공적으로 떠올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반란과 대신들의 이합집산은 김경신이 자신의 자리를 굳혀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김경신은 내물왕의 직계인 김양상이 상대등의 자리에 앉자 적극 동조자가 되어 김주원과 함께 내물왕계 인물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했다. 경신은 김양상을 앞세워 병권을 거머쥐고, 인사·재정·공부에 이어 형부까지 전권을 수중에 집어넣었다.

김경신은 반골기질이 뚜렷한 김지정을 희생의 제물로 점지했다. 그의 아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혜공왕의 여자 아닌 남자로 만들었다. 이어 속이 달아오른 김지정을 벽지 고을로 보낸다는 소문을 흘려 감정의 꼭짓점을 한껏 자극했다.

김지정이 김경신의 그물망에 뛰어들었다. 김지정은 지방의 귀족세력까지 두텁게 포진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각간의 난을 교훈 삼아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지방의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궁궐 내부 깊숙이 동조세력을 심었다.

혜공왕이 24세의 생일을 자축하는 잔치를 1주일에 걸쳐 벌이는 기간이 김지정이 잡은 반란 D-Day였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김양상과 김경신의 무리도 왕의 잔치에 적당히 취해 자리를 피하고, 자신의 세계로 빠져드는 혜공왕의 침소까지 김지정은 쉽게 접수했다.

김지정이 자신의 아들을 노리개로 삼은 혜공왕을 단칼에 죽였다. 그러나 나라의 왕좌에 오를 주인공을 정하지 못했다. 김지정의 무리가 왕좌를 두고 옥신각신할 때 궁궐 내외부의 분위기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을 그대로 복사해 신라대종을 제조한 사연을 기록한 신라대종주종기.
▲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을 그대로 복사해 신라대종을 제조한 사연을 기록한 신라대종주종기.
김경신이 깔아둔 덫이었다. 김지정을 지원하고 나섰던 궁궐 내부의 조력자 대부분이 김경신의 사주를 받은 첩자들이었다. 혜공왕의 죽음을 묻어두고 자신들의 공을 서로 추켜세우기도 하며 어수선한 분위기에 빠져 지방의 동조세력 우두머리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벌이던 어느 날. 술을 마신 김지정의 무리는 모두 약물에 마취되어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다음날 아침 포승줄에 묶여 올가미를 쓴 채 무릎을 꿇었다. 김지정의 일족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

김경신은 무열왕의 10대손 상대등 김양상을 왕위에 올렸다. 김경신의 잔꾀로 왕위에 오른 김양상이 제37대 선덕왕이다. 이어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어 나라의 전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김경신은 김양상의 조카 김주원이 서열상 자신의 윗자리에 있어 다음 전략을 추진해야 했다.

김양상은 천성이 곱고 선이 굵지 않았으며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김경신이 주장하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왕관을 쓰게 되었고, 왕위에 오른 지 6년에 접어드는 시기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혜공왕과 선덕왕의 죽음은 김경신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조작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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