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국어시간/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하략)



- 시집 『땅의 연가』(창비,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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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도 상관없지만 시에서 ‘히노마루’는 일장기, ‘기타나이’는 더러운 놈이라는 뜻의 일본어다. 일본에 의해 빼앗긴 우리말과 글을 되찾아 채 가꾸고 다듬기도 전에 다시 일본어를 익히고 영어를 배워야 했던 현실이 시인으로서는 못내 부끄럽고 서글프다. 출세하려면 국어보다 외국어를 더 잘 알아야 하는 풍토가 시인으로서는 못마땅하다. 이 시가 발표된 지도 40년이 훌쩍 넘었다. 그렇지만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말 가꾸기에 대해 말하면 오히려 글로벌 환경에 쫓아가지 못해 뒤떨어진 사람의 넋두리로 받아들이는 세상이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겨레의 바탕인 우리말의 힘을 깨닫기보다는 여전히 외국어를 더 중시하는 환경과 생각의 똬리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점방이나 아파트, 심지어 공공시설의 이름도 외국어로 지어야 멋있다고 여긴다. 아파트 이름은 죄다 외국어이거나 외래어 풍으로 꼬부린 우리말이다. 멀쩡한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아파트 가치가 상승하리라 믿고 실제 그렇게 했다. 그래서 아파트는 온통 ‘빌’ 아니면 ‘뷰’고 ‘타운’이니 ‘파크’, ‘타워’와 ‘캐슬’이 되었다. 요즘은 이것도 한물가서 불어에다 라틴어까지 동원되고 있다.

말과 글의 우리 것은 여전히 홀대받으며 국가기관이 오히려 앞장서고 있는 형국이다. 행정용어에는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는 한자조어가 수두룩하게 남아있고 새로 만들어지는 용어들은 죄다 어려운 영어다. 글로벌도 좋고 국제화도 이해하지만 덮어놓고 이러는 거는 아니라 본다. 지나친 외래어 남용은 국가 정체성과도 무관치 않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구호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이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아무리 미국에 기대고 눈치를 보는 처지로서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언가.

2003년 강원국 청와대 연설 비서관을 처음 만난 노무현 대통령은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 말로 최대 적이네” “평소에 사용하는 말을 쓰는 것이 좋네, 영토보다는 땅, 식사보다는 밥, 치하보다는 칭찬이 낮지 않을까?” 국가원수의 우리말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말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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