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경덕왕과 표훈대덕…하늘의 경고에도 ‘딸보다 아들’ 욕심에 대가를 치르다

<31> 경덕왕과 표훈대덕
경덕왕이 왕권의 안정을 위해 아들을 고집, 혜공왕은 반란군에 죽어 혼란기를 맞았다

신라 제35대 경덕왕은 형 효성왕에 이어 즉위했다. 젊은 효성왕의 죽음과 경덕왕의 즉위에는 귀족세력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권강화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도입했던 경덕왕 시기에 통일신라 불교문화와 종합예술이 최고봉에 이르렀다. 경덕왕릉 입구에 아름답게 조성된 소나무 숲길.
경덕왕이 통일신라 불교문화를 최고의 극치에 이르는 정점으로 끌어올린 시대의 통치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덕왕의 큰아들이 왕비의 폐비에 이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둘째 효성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 정치에 휘둘렸다는 것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경덕왕은 귀족세력이 오랜 기간 두텁게 자리를 잡고, 왕위까지 능히 간섭하는 정치적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여러 각도로 추진했다. 왕권강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치적인 노력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경덕왕릉은 12지신상을 조각한 호석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답사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불교적 사상이 통치이념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진표, 법해와 대현, 원표스님과 월명사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널리 스님과 교류를 맺었던 기록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안민가를 지어 바친 충담, 아들을 얻기 위한 노력에 관여한 표훈과의 교류는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를 뚜렷하게 조명한다.

삼국유사가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에 크나큰 영향을 행사했던 스님으로 분류하고 있는 충담과의 관계에 이어 표훈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경덕왕이 백률사 법회에 참가하기 위해 금강산을 오르는데 땅 속에서 목탁소리가 들려 파보니 사면에 불상이 조각된 거대한 바위가 나와 그 자리에 굴불사를 지었다. 현재 절은 사라지고 사면불만 남아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삼국유사: 경덕왕과 표훈대덕

왕은 옥경의 길이가 8촌이나 되었다. 왕비가 아들을 두지 못하자 폐위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했다. 후비는 만월부인이다. 시호가 경수태후이며 김의충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사를 불러 명을 내렸다. “짐이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대사께서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얻었으면 하오.”

표훈이 상제께 아뢰고 돌아와 왕에게 “상제께서 딸은 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고 답했다.

“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 주시오.”

표훈이 다시 상제께 이를 청하자 “한다면 할 수 있노라.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했다. 이어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였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

표훈이 와서 상제의 말씀을 전하자 왕이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라고 말했다.

경덕왕이 불국사를 최고의 사찰로 아름답게 조성했다. 가구식으로 돌을 짜서 다듬은 석축. 천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고 있다. 석축으로는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됐다.
곧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다. 왕은 무척 기뻤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자리를 이었는데 이가 혜공왕이다. 매우 어리므로 태후가 섭정했지만 조리가 고르지 못하고 도적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웠다. 표훈의 말이 증명된 것이다.

어린 왕은 여자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 이윽고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김양상과 김경신에게 죽임을 당했다.

표훈대사 다음으로 신라에는 성인이 나지 않았다.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꾸준히 국내외 방문객들이 이어지고 있다. 정면은 변함없는 최고의 포토존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의 고민과 표훈대덕

성덕왕이 이뤄 놓은 왕권의 기반이 한순간에 흔들려 버렸다. 김순원과 김순정, 김의충 등이 성덕왕에 이어 효성왕, 경덕왕까지 자신들의 딸을 왕비로 추천하면서 내정에 깊숙이 개입해 전권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병권, 인사, 재정, 형부, 공부, 예부 등 여섯 부문의 주요 관직을 꿰차고는 끝없는 힘겨루기로 권력구도를 재편하며 나라 살림이 기우는 것도 몰랐다.

경주 예술촌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역사과학관에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과학이 숨어있는 석굴암을 축소, 재현하고 있다.
경덕왕은 즉위 1년 만에 아들이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비를 내쫓고 새로운 왕비를 맞도록 하는 등 왕실 내부까지 귀족세력의 힘이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오자 왕권 강화를 위해 다양하게 관제를 개혁했다.

국학을 장려하기 위해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고 관직의 명칭을 크게 바꾸었다. 또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는 정찰을 임명해 권한을 주어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다. 지방관리들에게 월급 대신 녹읍을 주어 부정부패를 없애려 했다.

경덕왕에게 안민가를 지어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던 충담 스님을 기리는 충담재가 매년 경주 첨성대 사적지에서 진행되고 있다. 충담재에 참석한 스님들이 다도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
경덕왕은 대신들이 왕비와 후궁을 선택해 궁궐로 들여보내 놓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후계 구도를 잇기 위해 태자가 태어나지 못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했다. 이어 아들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끊임없이 왕비를 폐비하고 다른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간청했다.

경덕왕은 스스로 왕비를 지키지 못하는 지아비는 백성의 아비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대신들의 세력으로 폐비 절차를 밟는 일은 없애겠다고 다짐해 처음 이후 그를 지켰다.

경덕왕이 축조하게 한 석굴암의 구조. 신라불교예술과 과학기술의 최고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 예술촌 신라역사과학관에 축소 재현된 모습.
백성의 정신적인 평안을 위해 불교를 장려해 굴불사와 불국사를 건립하고, 석굴암을 축조했다. 내적으로는 관제 개혁에 이어 태자 살리기 전략을 구상했다. 대신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후궁세력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는 뛰어난 무인들을 암암리에 배치하고 운영하는 조직을 가동했다.

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거대한 용을 타고 바다를 건너오는데 옷자락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을 정도로 도력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궐로 초청해 국사를 맡겼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점잖게 사양하면서 “제게서 공부한 제자 표훈이 있사온데 옆에 두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자를 천거했다.

불국사를 지탱하고 있는 국보 청운교와 백운교의 하부구조. 천 년이 넘도록 돌다리를 받치고 있는 홍예기법의 건축술이 돋보인다.
경덕왕이 그의 말을 듣고 의상의 제자 표훈을 황룡사에 머물게 하며 법문을 들었다. 그때 저녁 공양 이후에는 표훈이 어김없이 황룡사 9층 목탑에서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표훈이 탑돌이를 할 때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였는데 발자국을 뗄 때마다 공중을 마치 평지처럼 내달으며 9층 목탑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탑 외부를 공중부양한 채 목탁을 치며 낭낭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웠다.

표훈은 이미 경덕왕이 자신의 도력을 시험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왕이 보는 앞에서 공중을 부양하며 탑돌이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왕은 표훈의 공부가 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주변을 지키며 후궁들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비밀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경주 동리목월문학관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 흥륜사에 안치되어 있던 신라10성의 인물을 그려 배치하고 있다. 경덕왕 당시 영험한 도력으로 이름 높았던 표훈대덕의 인물 그림.
이어 경덕왕은 누구든지 왕비와 후궁들이 아이를 낳는데 방해를 하거나 위해를 끼치면 역적과 같이 간주하고, 3대를 멸하겠다고 공포했다. 이어 여섯 명의 후궁들이 아이를 편안하게 낳을 수 있도록 각자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왕의 이러한 노력은 허사였다. 경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넘어가도록 왕비와 후궁 누구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왕비는 물론 여섯 명의 후궁들까지 아무도 임신조차 못했다.

경덕왕은 나이가 들면서 태자에 대한 욕심이 깊어졌다. 또 대신들의 끝 모를 정쟁에서 벗어나 편안한 태자의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왕은 대신들에게 천명했다. 왕비는 물론 후궁 중에서 가장 먼저 아들을 낳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 했다. 이어 태어나는 태자의 안전을 위해 왕실과 같은 수준의 호위를 받게 해줄 것이라 약속했다. 그 이후 3년이 지나 기적같이 왕비가 아들을 낳았고, 표훈이 동궁 주변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결계를 치고, 태자의 신변을 지켰다.

경덕왕은 태자가 8살 되던 해에 죽음을 맞으며 태자가 왕위를 잇고, 왕후가 섭정하며 대신들이 모두 협조하도록 유언했다. 대신들의 세력 다툼은 경덕왕이 죽은 이후 더욱 기승을 부려 아들 혜공왕은 끝내 반란군의 칼에 죽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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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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