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무(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계간『창작과 비평』 197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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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면서 시업의 길로 들어선 시인은 곧 낙향해 10년 넘도록 시를 쓰지 않았다. 1956년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침울하고 가난한 시기였다. 그의 낙향은 등단 무렵 유행한 모더니즘 정서와 자신의 시풍이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술회하였다. 이후 농사와 날품팔이로 전전하던 그는 7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농무’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을 재개했다. 10년 동안 만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노래와 얘기를 대신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쓴 시편들이다.

시에는 우리들 삶의 모습과 정서가 표현되어야 하고,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때 감동을 준다는 시론을 그는 줄곧 펴왔다. ‘농무’는 선생의 평소 시에 대한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으로, 고단한 민중의 삶에서 시의 소재를 찾아내 농민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한국 현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처음엔 이문구 작가의 주선으로 한 ‘유령출판사’에서 3백부 자비로 출간되었던 이 시집이 2년 뒤 75년 ‘창비시선’ 1호로 간행되는데, 지금까지 75쇄는 찍었을 것이고 어림잡아 75만 부는 족히 팔려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살면서 시집을 한 번도 사본 일이 없거나 평소 시를 무슨 사교가 전파하는 전도 ‘찌라시’처럼 여기는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시’일 수도 있겠다. 7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해체되어가는 농촌의 피폐한 현실을 생생하게 떠올려주는 시는 농민의 울분과 암담함이 역설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렇듯 힘 있는 언어로 독자들을 감동시킨 시가 전에 또 있었던가. 당시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짓는 농민의 답답한 심정과 발버둥치는 모습이 오히려 ‘날라리를 불고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변주된다.

그들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거나 ‘서림이처럼 해해대’며 즐거운 듯하지만(꺽정과 서림은 홍명희의 '임꺽정'에 등장하는 인물로 서림은 나중 꺽정을 배신한다), 결국은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며 자신들의 삶을 자학하거나 체념하고 만다. 오늘날 농촌의 모습은 예전에 비해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지만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흘린 땀에 비해 그 대가는 알량하고 미래는 불안하기만 하다. 추수를 앞둔 들판에서 피를 뽑으며 주름웃음 짓는 늙은 농부의 모습이 TV에 비춰졌다고 신바람이라 생각지는 마시라.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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