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도 떠나고 말면 / 정완영

발행일 2019-08-28 15:39:3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여름도 떠나고 말면/ 정완영

번개 천둥 비바람도 한 철 잔치마당인데

잔치 끝난 뒷마당이 더욱 적막하다는데

여름도 떠나고 말면 쓸쓸해서 나 어쩔꼬//

무더운 여름 한 철 나를 그리 보챘지만

그 여름 낙마(落馬)하고 텅 비워둔 하늘 아래

푸른 산 외로이 서면 허전해서 나 어쩔꼬

- 시조집 『시암의 봄』 (황금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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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白水) 정완영 시인께서 타계하신지 3년이 되어 그제(8월27일)가 선생의 3주기였다. 3년 전 그 뜨거운 여름을 다 견디고 막 한숨을 돌릴 즈음 부음을 들었다. 백수(白壽)를 누리실 줄 알았는데 이태를 앞두고 안타깝게도 우리들 곁을 떠나신 것이다. 1919년 기미생인 선생께서는 내 아버님과 갑장이신데 내 아버지보다 27년을 더 건강하게 장수하신 셈이니 선생의 향년은 백수나 다름없다. 선생은 20대부터 시조에 뜻을 두고 시창작과 동인활동을 해오다가 한국전쟁 때 고향인 김천으로 피난을 와 ‘백수사(白水社)’라는 문구점을 차렸었다.

이때 동네사람들이 그를 ‘백주사(白主事)’라 부르곤 했는데 선생의 호가 된 연유가 아닌가 짐작된다. ‘백수(白水)’는 김천의 ‘천(泉)’을 나눈 것으로 깨끗한 물, 오염되지 않은 물이 되어 세상을 정화코자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생은 1960년 ‘해바라기’로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지만, 그 자신 등단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삶 속에서 시를 즐기고자 했다. 그런 백수의 모습에 주변의 지인들이 더 답답해했고, 결국 백수의 처남이 몰래 신문사에 작품을 출품하여 당선된 것이라고 한다.

선생의 이력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닌 것 말고는 특별한 학력이 없다는 것이다. 공부 대신 방방곡곡 유랑 생활로 스스로 깨우치면서 감성을 가슴에 담아왔던 게 문학의 밑천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생의 시는 솔직담백하여 꾸밈이 적다. 선생께서는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노력해야 하는가를 몸소 후학들에게 보여주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시조에서 가람 이병기와 노산 이은상을 맨 앞에 둔다면 그 뒤를 이어 김상옥과 이호우 그 다음에 백수를 세우는 것이 거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이는 현대 시조의 초창기, 계승기, 완성기의 맥락과 통하며 상징적으로 시조의 초장, 중장, 종장과도 비슷하다. 선생은 평소 시조에서 종장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시의 윗부분이 수석이라면 마지막 시조의 종장은 수석의 받침돌이라고 했다. 아무리 명석이라도 받침대가 좋지 않으면 명석이 될 수 없다. 받침대처럼 종장에서 위의 시를 딱 떠받쳐야 명시가 된다는 것이다. 이 시의 종장도 그러하다. ‘여름도 떠나고 말면 쓸쓸해서 나 어쩔꼬’ ‘푸른 산 외로이 서면 허전해서 나 어쩔꼬’ 그 귀결점이 눈물겹다.

선생께선 마지막 생의 이별을 고해야할 지점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번개 천둥 비바람’ 잔치도 끝난 마당, 이 풍진 세상에서 이제 살 만큼 살았다는 듯 스스로 몸에 힘을 스르르 빼셨던 것이다. 예전 문교부장관 국회의장을 두루 지낸 민관식씨는 2006년 89세로 타계하기 전날에도 테니스를 3게임이나 치렀을 정도로 체력이 탁월했다. 그런 체력이야 언감생심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게는 말고 나도 세상 떠나는 날 강민 선생이나 백수 선생처럼 조금은 쓸쓸하고 헐렁하게 잠시 의식을 잃고서 스르르 힘을 빼고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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