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불러오는 대화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더위가 이제 9부 능선으로 오르는 것 같다. 키 높이로 자란 글라디올러스가 열기에 지쳐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고 휴식을 취하는 자세다. 태어나면서부터 누렇게 물을 들여 익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자라던 노각은 내 팔뚝을 넘어 자랐다. 쌉쌀한 맛을 기대해본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텃밭은 김을 맸다. 돌아와 보니 잡초 정리지도사가 다녀갔던가. 과일과 채소는 보이지 않고 튼실하게 자란 잡초가 텃밭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질긴 생명력! 제 나름의 꽃을 피워 한번만 봐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척박한 땅에서도 불평해대지 않고 묵묵히 자라나는 저들의 끈기에 칭찬의 박수라도 보내야 할까.

문득, 뜨거웠던 뉴욕의 하루가 떠오른다. 세계여자의사회 창립 100주년 기념 및 국제 학술대회 축하 특별행사로 이스트 강변의 유엔본부를 방문하게 되었다. ‘여성의 건강: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를 위한 기본 요소 만들기‘라는 주제로 세계여자의사회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행사였다. 한국 여자의사회 회원들도 사전 허가를 얻어 참가하게 되었다. 우뚝 솟은 건물 사이의 뉴욕 도심은 정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헉헉거리며 오랫동안 걸어 겨우 유엔 본부에 도착하였다. 입장하기 전 총을 장전한 보안요원의 점검을 받아야했다.

헌데 이일을 어쩌면 좋으랴. 평소엔 평정을 잃지 않으시던 원로 선생님께서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들어보니 보안검색에 필요한 여권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닌가.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기억조차 없다고 하신다. 연로하신 선생님께서 정신적 충격으로 무더운 날 넘어져 버릴까 걱정되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로 긍정의 주문이지 않겠는가.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의 그 말. 하쿠나~! 마타타~! "문제없어요, 다 잘 될 거에요." 이왕 없어진 여권을 내내 걱정하기보다는 유엔의 문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 우선이지 않은가. 선배님을 무조건 위로했다. “여권은 누가 주워서 꼭 돌려줄 거예요.” 일단은 “근심 걱정 모두 떨쳐버리고 일단 부딪혀 봐요.” 허가증도 있고 한국의 주민등록증도 일단 증명해달라고 우겨 봐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연후에 여권 걱정하자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선배님은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내내 어두운 얼굴이다. 비난의 말도 누군가로부터 들은 모양이다. 모든 일 다 접고 빨리 임시여권 만들어야 귀국이 덜 늦어질 수 있다는 충고도 있었다. 그러니 세미나만 끝나기를 바라신다. 세션이 끝나자마자 영사관에 다녀와야겠다고 하시면서. 세계보건기구의 대표 연설도 미국항공우주국의 로켓과학자인 앨린 박사의 ‘우주가 남성과 여성에게 어떻게 다르게 영향을 미치나?’라는 열띤 강연도 귀에 스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계속 주문을 걸었다. “괜찮을 거예요! 어딘가 있을 거예요.“

“하쿠나 마타타~! ” 드디어 메일이 왔다는 알림이 뜨는 것이 아닌가. 바로 학회장 등록 데스크에서. 등록할 때 이름표와 책자는 받아들고서 신분확인으로 보여준 여권을 그곳에 두었던 것이라니. 걱정이 사라진 선배의 얼굴은 뉴욕의 밝은 햇살보다 더 화사하게 빛났다.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어떤 나쁜 상황이 생겼을 때 주변 사람의 대화유형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 원수 되는 대화, 그 다음이 멀어지는 대화, 마지막으로 다가가는 대화다. 원수 되는 대화를 예로 들면 상대방이 바로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여권을 아무데나 두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당사자는 스트레스가 급격하게 오르게 되지 않겠는가. 결국, 관계를 망치게 되는 말일 것이다. 일은 이왕 벌어진 것 아닌가. 기왕지사에 대해 비난하지 말고 감정을 다스려 문제해결에 필요한 사항을 차분히 점검하면서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또 하나는 멀어지는 대화이다. 상대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전혀 다른 관심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권을 잃어버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에서 점심은 무엇을 먹으면 좋을까 미리 계획을 세우며 질문하는 것 등 말이다. 세미나장에서 제일 좋은 자리는 어디일까? 묻는 이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서 자신만을 위한 대화이니. 우리가 상대를 배려하면서 나누어야 할 대화는 바로 다가가는 대화이지 싶다. 곤경에 빠진 상대를 발견한다면 어쨌든 기분이 나아지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으랴.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이더라도 아름다운 말로 대화를 청량하게 나누다 보면 시원한 바람도 곧 느낄 수 있지 않으랴. 얼마 남지 않은 무더위엔 ”구나, 겠지, 감사”의 말을 입에 달고 살아보자. ‘그렇구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만하기 다행이야~!감사하면서 기적을 불러보자.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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