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연이 날아온다 / 이기형

발행일 2019-07-22 15:36:2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해연이 날아온다/ 이기형

한과 눈물로 살거냐/ 긴긴 세월을 허탕 치고도 못 말려/ 달구벌 멋은 잦아들고/ 만경벌 흥은 사위어가고/ 퍼지는 영어 열풍 어디로 가나/ 불야성 저 광란하는 나체춤의 의미는 뭐냐/ 나운규는 아리랑고개를 울고 넘었건만/ 분단고개를 울고 넘는 사람은 없다/ 국록 먹는 어른들은 말잔치로 밤을 지새우고/ 청바지들은 할아버지가 울고 넘은 박달재를/ 촐랑대며 넘는다/ (중략)/ 선열들의 피맺힌 목소리가 들린다/ 슬픈 사연 하도 많아 누선도 말랐느니/ 피 마르는 지겨움 가슴이 빠개진다/ 임 따라 어라연엘 가랴/ 임 맞으러 삼지연엘 가랴/ 지는 해야 빨리 져다오/ 솟는 해야 퍼뜩 솟아주렴/ 폭풍우 천 길 만파를 뚫고/ 바다제비 날아온다

- 시집『해연이 날아온다』(실천문학사, 2007)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47년 ‘민주조선’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이어 정신적 스승으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거함에 따라 허탈감에 빠져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 생활에 드셨다. 그러다가 1980년에야 신경림 시인, 백낙청 문학평론가 등을 만나 분단 조국 하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꿔 시작 활동을 재개했다.

이기형 시의 주제는 고스란히 민족의 안타까운 현실을 담은 통일에의 열망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민족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가슴 안에서 식지 않았다. 북에 어머니와 처자식을 남겨둔 채 월남한 선생은 2003년과 2005년 평양을 방문, 딸을 만났지만 어머니와 아내를 다시 보지 못한 그리움을 시에 담아 표현했다. 이 시를 포함 시집 속의 시들은 경색된 남북관계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날선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선생은 요즘 젊은 시인들이 통일을 비롯한 사회문제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민족통일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과제임에도 그 묵직한 주제를 다룬 시편들을 현실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젊은 시인들은 내 시를 보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요즘 시인들이 문학적 재주가 뛰어나면서도 역사,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는 해야 빨리 져다오, 솟는 해야 퍼뜩 솟아주렴’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고통의 분단시대를 살아온 시인이 시들지 않는 불꽃의 삶으로 염원해온 통일은 언제나 올지, 생전에 그토록 존경해왔던 몽양 선생과 함께 바다제비처럼 날아올 통일조국을 간구하고 계시리라.

“나는 이미 늙었다. 그러니 나는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이미 썩은 기둥을 너희들의 손으로 뽑아 버리고 조선의 소나무를 정성껏 다듬어 청년들이 바라는 새 조선의 집을 지어라. 모든 영예, 모든 직위가 청년들의 것이니 내 한 줌 거름이 되어 조선의 소나무를 살찌운들 무슨 한이 있으랴.” ‘여운형 평전’을 펴낸 이기형 선생의 몽양 추앙은 상상 이상이다.

선생께서는 을사늑약 이후 국채보상, 절연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적극 동참하며 술 담배를 딱 끊었다. 조선이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로 입에 안 대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 몽양이 술 마시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해방이 되자 이젠 마셔도 되지 않겠냐며 주위에서 권고했지만, 나라가 통일된 다음에야 마시겠다고 계속 술 담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날이 오긴 올 테지만, 두 분이 천국에서 대작하는 그 장면을 미리 그려본다.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