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진덕여왕||선덕여왕의 유언으로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 고독한 사랑에 빠지다

▲ 경주 현곡면 오류리 소나무 숲속에 위치한 신라 제28대 진덕여왕릉. 사적 제24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봉분을 보호하는 호석을 세우고 12방향의 지신상을 부조로 새겨 왕릉으로서 손색이 없다.
▲ 경주 현곡면 오류리 소나무 숲속에 위치한 신라 제28대 진덕여왕릉. 사적 제24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봉분을 보호하는 호석을 세우고 12방향의 지신상을 부조로 새겨 왕릉으로서 손색이 없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4촌 여동생이다. 선덕여왕은 죽으면서 성골인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어가도록 유언을 했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진덕여왕의 즉위에 힘을 보탰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아버지 쪽으로 보면 6촌이지만, 어머니 쪽으로 보면 모두 이모가 된다.



진평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어렵게 정책적으로 제도를 마련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선덕여왕대에 이르러 백제와 고구려 등과의 전쟁에 휘말려 다시 진골세력, 귀족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게 됐다.



진덕여왕은 가까스로 알천공, 조카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지지세력에 힘입어 왕위를 유지했지만, 김춘추가 왕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설도 만만찮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춘추의 아들 법민의 외교에 힘입어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겨우 다져가고 있었다.



▲ 진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은 소나무 숲길이다. 여름에도 그늘이 깊고, 다양한 초목과 꽃으로 어우러져 역사문화답사객들은 물론 시민들의 산책로로 인기다.
▲ 진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은 소나무 숲길이다. 여름에도 그늘이 깊고, 다양한 초목과 꽃으로 어우러져 역사문화답사객들은 물론 시민들의 산책로로 인기다.
◆삼국유사: 진덕왕

제28대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라, 친히 태평가를 지어 비단을 짜서 태평가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 이것을 당나라에 가져다 바쳤다. 당나라 황제가 가상히 여겨 이를 포상하여 계림국왕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 진덕여왕릉이 바라보이는 능선은 아름다운 소나무 숲으로 조성돼 있다.
▲ 진덕여왕릉이 바라보이는 능선은 아름다운 소나무 숲으로 조성돼 있다.


태평가의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당나라가 왕업을 열었으니/ 높디높은 황제 포부 창성하리라./ 전쟁이 끝나니 천하가 평정되고/ 문치 닦아 옛 왕들을 따르시네…(중략)…/산악의 정기는 보필할 제상을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런 어진 인재 등용하네./ 5제 3황 닦은 덕이 하나로 이루어져/ 우리 당나라 황실 밝게 비추리.



▲ 진덕여왕 때에도 대신들이 중요한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화백회의를 만장일치제로 채택하고 있었다. 경주시가 도당산에 조성한 화백정으로 오르는 산책로.
▲ 진덕여왕 때에도 대신들이 중요한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화백회의를 만장일치제로 채택하고 있었다. 경주시가 도당산에 조성한 화백정으로 오르는 산책로.


이 왕의 시대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죽지랑의 아버지), 무림공(호림공, 자장의 아버지), 염장공, 유신공이 남산 오지암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때 큰 호랑이가 좌석으로 뛰어 들어왔다. 여러 공들이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웃고 이야기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맨 윗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런 땅이 있어서 큰일을 의논할 때는 대신들이 반드시 이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은 꼭 이루어졌다. 네 영지 중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이고, 둘째는 남쪽의 오지산이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이 왕 때에 처음으로 설날 아침에 예를 행하였고, 시랑이라는 호칭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흔적

△진덕여왕릉: 진덕여왕의 릉은 현곡면 오류리 산48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사적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주변이 소나무숲으로 우거져 있고, 진입로는 등산하기 좋게 조성되어 있어 가볍게 산책하듯 오를 수 있어 탐방객들이 기분 좋게 접근할 수 있다.



▲ 역사문화탐방객들은 진덕여왕릉에서 많은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진덕여왕의 국정운영보다 여성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천 년이 지나도 무궁무진하게 싹을 키운다.
▲ 역사문화탐방객들은 진덕여왕릉에서 많은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진덕여왕의 국정운영보다 여성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천 년이 지나도 무궁무진하게 싹을 키운다.


진덕여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승만이다. 진평왕의 친동생인 국반갈문왕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 박씨이다. 진덕여왕은 자질이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무척 총명했다고 한다.



진덕여왕은 즉위하면서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김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는 등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이어 김춘추 등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해 외교관계를 두텁게 하면서 군사적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는 정책을 썼다. 김유신을 압독군주로 임명해 백제의 공격을 막는 등 나라를 지키는 무장의 선봉으로 삼았다.



진덕여왕은 649년 의관을 중국식으로 하고, 연호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당나라의 앞선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다.



정치적으로 중국에 예속되는 경향이 커졌다는 평도 있다. 반면 집사부를 설치하고, 알천, 죽지, 김춘추, 김유신 등의 친위세력을 중용해 왕권 강화에 나섰다.



왕은 또 651년부터 새해를 맞아 백관들이 왕에 대해 인사를 행하는 정조하례제를 실시했다. 이를 두고 현대의 신년교례회의 효시라는 해석도 있다.



▲ 진덕여왕 시절에도 나라의 중요한 일은 남산의 북쪽 오지암, 지금의 도당산에서 대신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만장일치로 의견을 채택하는 화백제도가 이때 시행되고 있었다. 화백제도의 뜻을 기리기 위해 화백정을 세워 탐방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 진덕여왕 시절에도 나라의 중요한 일은 남산의 북쪽 오지암, 지금의 도당산에서 대신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만장일치로 의견을 채택하는 화백제도가 이때 시행되고 있었다. 화백제도의 뜻을 기리기 위해 화백정을 세워 탐방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도당산과 화백회의: 신라시대 네 곳의 영지 중 남쪽의 오지산은 도당산을 말한다. 도당산은 남산의 북쪽 봉우리다. 남산을 황금색 자라를 닮은 모양으로 보아 금오산이라 불렀다. 이때 금오산의 북쪽 도당산은 자라의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 도당산 화백정에서 북쪽으로 보면 월성과 월정교가 한 눈에 보인다.
▲ 도당산 화백정에서 북쪽으로 보면 월성과 월정교가 한 눈에 보인다.


신라의 대신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회의는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채택하지 않는 화백제도였다. 현대의 민주주의와 같은 맥락의 제도로 신라가 일찍부터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해석이다.



경주시는 이에 도당산에 화백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신라시대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신라의 천년궁성 월성에서 월정교를 지나 도당산을 거쳐 남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탐방객들은 이 등산로를 따라 남산을 오를 때 대부분 도당산의 화백정에서 땀을 훔치고, 목을 축이며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 기회가 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덕여왕의 사랑

진덕여왕은 미모가 빼어나 많은 사람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죽지랑, 원효, 김유신, 자장, 의상 등의 걸출한 인물들도 알게 모르게 연인의 대상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 소나무 숲과 다양한 초목이 우거져 탐방객들이 편안하게 걷게 하는 도당산의 등산길.
▲ 소나무 숲과 다양한 초목이 우거져 탐방객들이 편안하게 걷게 하는 도당산의 등산길.


특히 6부대신의 위치에 있던 죽지랑의 아버지 술종공과 자장의 아버지 무림공(호림공)은 세력의 강화를 위해 은근하게 며느리로 삼으려는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죽지랑은 문무를 겸비하고 진덕여왕이 중용하기도 했다. 자장은 일찍이 중국으로 유학의 길에 올라 불교에 심취해 속세와의 인연을 멀리하며 진덕여왕과의 인간적 관계에는 경계를 두었다.



백제와의 전투에서 유신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운 화랑 원효의 기상과 사상적으로 무장한 거침없는 달변에 진덕여왕은 흠모의 마음을 키웠다. 원효의 훤칠한 외모와 늠름한 기상을 대한 여성들은 진덕여왕처럼 단번에 빠져들기 마련이었다.



▲ 도당산 화백정으로 오르는 산책로.
▲ 도당산 화백정으로 오르는 산책로.


한창 꿈을 키우며 나라의 동량으로 성장하던 원효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사춘기이기도 했던 원효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지게 했고, 끝내 불도의 길을 걷게 했다.



진덕여왕은 삼년상을 마친 원효를 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이 품고 있던 흠모의 정을 노골적으로 털어 놓고, 동반자의 길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원효는 이미 불자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정한 다음이라 진덕여왕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구도의 길을 떠났다.



▲ 사학자들이 진덕여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현곡 오류리의 진덕여왕릉.
▲ 사학자들이 진덕여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현곡 오류리의 진덕여왕릉.


결국 진덕여왕은 나라의 일은 상대등 알천공을 비롯한 대신들에게 맡기고, 인간적인 깊은 고뇌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끝내 자신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한 여왕은 쓸쓸하게 고독한 최후를 맞았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김춘추의 여식 요석은 원효를 향한 마음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기획연재 중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새로운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인위적으로 구성한 픽션입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