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령 체조/ 이상식



고향에 갈 때 마다 아버님은 맏손자의 팔과 등허리 어루만지며 왜 이렇게 약하냐고 밥 많이 먹으라고 반 꾸중 반 애원하시곤 했다/ 추석 차례는 끝났다 아버님은 음복이 과한 탓으로 취기가 있으셨지만 예의 맏손자를 앉혀놓고 사랑의 잔소리 늘어놓으신다 그러다가/ 불현듯 일어나서 광에 가시더니 쇠뭉치를 들고 나오셨다 녹과 먼지가 뒤덮인 아령이었다 당신께서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썼던 운동기구란다/ 그러니까 50년 전의 골동품인 셈이다 아버님은 맏손자를 위해 조교처럼 시범을 보이신다 칠순 노인의 쇠잔한 육신과 거친 숨소리가 뿜는 율동/ 아버님도 맏아들도 맏손자도 눈시울 붉혔다

- 시집 『춘란은 향기로 말한다』(아르코,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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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시절 변영태 외무장관은 해외출장을 나갔다 귀국하면 출장비를 아껴 남긴 달러를 반드시 국고에 반납한 청렴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집을 떠나 어디를 가더라도 아령을 갖고 다니며 운동하는 분으로도 유명하다. 예전에 내가 아는 집안의 한 친척 어르신께서도 그와 같은 아령 마니아이면서 곧은 선비풍이시라 아령과 청렴강직의 이미지는 늘 겹쳐지곤 한다. 그래서 일단 시인의 아버지도 그런 분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 아버지가 추석 때 고향을 찾은 아들과 손자에게 꾸지람을 널어놓는다. 하지만 그 꾸중은 손자를 향한 어쩔 수 없는 내리사랑이다. 약해보이는 손자에게 ‘밥 많이 먹으라’는 소리는 누구나 하는 기본이고, 성이 차지 않은 아버지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취기를 빌어 광에서 녹슬고 있는 아령을 꺼내와 시범까지 보이신다. 귀한 맏손자가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쇠잔한 알통을 내보이며 거친 숨소리를 뿜어댔다.

내리사랑은 어린 자식으로 내려갈수록 깊어지는 사랑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주 사랑이다. 16세기 조선시대에 ‘이문건’이란 사람이 쓴 ‘양아록’이란 육아일기가 있다. 귀양살이 와중에 손자가 태어나면서부터 자라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면서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손자가 커가면서 생기는 갈등상황도 낱낱이 기록하였고 매를 드는 대목도 나온다. “놀기 좋아하는 애들이라 누가 날마다 부지런히 책을 들여다보겠는가.

할아버지는 다만 네가 모든 것을 소중히 하길 바란다. 꾸짖어 나무랐지만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틈만 나면 떼를 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직접 나가 데려와서 뒤통수와 엉덩이를 때리자, 고개 숙이고 엎드려 울기에 내 마음도 아팠다.” 이문건은 손자가 더 이상 자신의 품속에 품을 수 없는 존재란 것을 깨달은 연후에야 일기쓰기를 중단했다. 물론 손자에 대한 사랑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손자와 아들 앞에서 아령체조 시범을 보이는 칠순노인의 가락과 기세로 보아 시인의 아버지도 손자라 해서 마냥 오냐오냐 하실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광경에 ‘아버님도 맏아들도 맏손자도 눈시울 붉혔다’고 하니, 그 성정들로 미뤄봐서는 장차 손자와의 갈등을 그리 염려할 바는 아닌 듯하다. 아들이 두고 간 아령을 이사 오면서 가져와 가끔 들었다 놨다 한다. 손녀를 안아본지 한참 되었다. 이제 만6세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간단다. 가까이 있지 않아 같이 놀아줄 수도 훈육할 수도 없다보니 “할아버지, 언제 와?” 그 소리만 귓전에 맴돈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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