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천사옥대

진평왕은 신라 26대 왕으로 54년 간 왕위에 있었다. 박혁거세 이후 천 년 신라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랜기간 왕좌에 있었다. 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이 신라 최대의 영토를 넓힌 뒤를 이어, 이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진흥왕 사망으로 진지왕이 왕위에 올라 문란한 정치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노리부 등의 귀족들이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평왕을 옹립했다. 진평왕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제도를 정비해 왕권 강화에 나섰다.



불교와 샤머니즘적 신앙을 접목해 왕권을 신성시 하는 풍토를 조성하는데도 성공했다. 진평왕 옥대, 하늘로부터 내려받은 보물 ‘천사옥대’를 만들어 절대적인 왕권을 세우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황룡사 9층목탑, 장육존상과 함께 신라 3대 보물로 전해지고 있다.



▲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무덤은 경주시 보문동 입구에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 보문사지, 동쪽으로는 명활산성, 서쪽 낭산의 선덕여왕릉과 황복사지, 북쪽으로 월성, 황룡사지 등 신라 천 년의 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무덤은 경주시 보문동 입구에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 보문사지, 동쪽으로는 명활산성, 서쪽 낭산의 선덕여왕릉과 황복사지, 북쪽으로 월성, 황룡사지 등 신라 천 년의 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진평왕은 왕위에 오르는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들이 없어 성골 귀족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도 많은 고충을 겪어야 했다.



김춘추와 김유신과 같은 절대적인 지지세력을 확보한 이후에야 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진평왕이 나라의 살림을 안정적인 기반 위에 올려둔 덕분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잇따라 여왕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



진평왕은 특히 삼촌인 진지왕의 아들 용수를 사위로 맞아들이고, 나랏일을 돌보도록 벼슬을 주어 왕권다툼을 예방했다.



진평왕의 즉위 과정과 신라 최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정치, 안정적으로 여왕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신라 중대 역사의 일면을 본다.



▲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키가 11척이라 기록해 신체가 매우 장대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금관총에서 발굴된 허리띠가 지금까지 나타난 신라시대 허리띠 중에서 가장 길고 장식이 화려하다.
▲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키가 11척이라 기록해 신체가 매우 장대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금관총에서 발굴된 허리띠가 지금까지 나타난 신라시대 허리띠 중에서 가장 길고 장식이 화려하다.


◆천사옥대 -하늘이 준 옥대

[청태 4년(937) 5월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반듯하게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가 10뼘으로 새겨 붙인 장식이 62개였는데 이것을 진평왕의 천사옥대라고 했다. 고려의 태조가 이것을 받아 궁중의 창고에 보관했다.]



제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며 성은 김씨이다. 태건 11년 기해(579) 8월에 왕위에 올랐다. 키가 11자였다.



내제석궁(다른 이름은 천주사이다. 이 왕이 창건한 것이다)에 행차했을 때, 섬돌을 밟으니 돌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주위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돌을 치우지 말고 뒤에 오는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고 했다. 바로 이 돌이 성안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개의 돌 중 하나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첫 해에 천사가 궁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상황께서 내게 명하여 옥대를 전해주라고 했습니다”라 하니, 왕이 친히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받았다. 큰 제사나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옥대를 사용하였다.



그 후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모의하면서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하였더니, 황룡사 장육존상이 첫째이고, 그 절에 있는 9층탑이 둘째며,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라 하여 왕은 곧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 진평왕릉에서는 사계절 다양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어 산책을 즐기는 시민과 전문 사진 작가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진평왕릉의 여름 저녁놀 풍경.
▲ 진평왕릉에서는 사계절 다양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어 산책을 즐기는 시민과 전문 사진 작가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진평왕릉의 여름 저녁놀 풍경.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구름 위의 하늘이 옥대 내리어 두르시니/ 천자의 곤룡포에 아담하게 어울리네/ 이로부터 우리 임금 몸 더욱 중후하니/ 내일 아침 강철로 섬돌 만들까 하네.



◆진평왕

진평왕은 신라 제26대 왕으로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54년을 재임했다. 박혁거세를 제외하고 신라 천 년 역사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진평왕대에 이르러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이 바야흐로 꽃을 피웠다. 그의 뒤를 이어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을 보필했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삼한 통일 위업의 기초를 다졌다. 삼한 통일의 모든 것이 진평왕으로부터 시작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평이다.



진평왕은 놓칠 뻔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열세살인 579년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인 사도부인이 수렴청정을 했다.



▲ 진평왕릉 주변에는 역사문화사적들이 많아 학자들을 비롯해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사진은 22일 삼국유사 기행단이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의 해설을 들으며 토론하는 장면.
▲ 진평왕릉 주변에는 역사문화사적들이 많아 학자들을 비롯해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사진은 22일 삼국유사 기행단이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의 해설을 들으며 토론하는 장면.


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의 뜻일 이어받아 전쟁을 치르면서도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을 신성화하는 데 진력했다. 진평왕은 자신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 백정, 부인은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 마야부인, 동생 둘은 석가모니 삼촌의 이름 백반과 국반으로 지었다. 가족 모두가 석가모니족으로 신성화 했다.



진평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동생 백반을 진정갈문왕, 국반을 진안갈문왕으로 임명해 왕실의 세력을 친정체제로 두텁게 했다. 동생 둘은 형의 좌우에서 형의 말을 충실히 듣는 심복으로 자라갔고, 자연스레 사도부인 같은 기존 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진평왕은 재위 6년 째 되던 해에 수렴청정에서 벗어나면서 건복(建福)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할아버지 진흥왕이 그랬던 것처럼 신라만의 독자적인 역사 만들기에 나섰다. 13년에는 남산성을 쌓고, 이어서 명활성을 고쳐 쌓아 왕경의 주변 방어태세를 굳건하게 했다.



주변국과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백제와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그치질 않았다. 신라가 팽창해 가는 만큼, 주변의 대항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 등의 침공에 대응해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까지 교류를 이어갔다. 원광법사와 담육 등을 중국에 보내 공부하게 하는 등 불교 진흥에도 크게 노력했다.



진평왕은 황룡사를 크게 중창했다. 동서 금당을 추가로 지어 1탑-3금당의 가람구조로 변화했다.



내부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재위 53년 칠숙과 석품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다행히 초기에 발각돼 칠숙을 잡아 처형시켰는데, 석품은 백제 국경으로 도망쳤지만, 끝내 붙잡아 처형했다.



진평왕은 사촌 동생 용춘을 사위로 삼았다. 이는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모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진평왕의 집념은 이루어졌다. 딸인 덕만으로 왕위를 이었다. 선덕여왕이다.



◆흔적

△진평왕릉; 경주 진평왕릉은 경주시 보문동 608번지 남촌마을 앞 보문들과 연접해 고즈넉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사적 제180호로 지정된 왕릉이다.



4만3천645㎡ 부지에 소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의 고목과 초목이 계절별로 꽃을 피우며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해 힐링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 진평왕릉은 느티나무와 소나무, 버드나무, 백양나무 등의 다양한 수종이 숲을 이루며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가 있어 쉼터 기능을 한다.
▲ 진평왕릉은 느티나무와 소나무, 버드나무, 백양나무 등의 다양한 수종이 숲을 이루며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느티나무 아래 벤치가 있어 쉼터 기능을 한다.


왕릉의 동쪽에 명활성의 흔적, 남쪽 보문사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석조 등의 역사유적들이 있다.

서쪽에는 낭산이 나지막하게 솟아 신문왕릉, 선덕여왕릉과 황복사 삼층석탑 등의 유적들이 즐비하다.



▲ 진평왕릉 북쪽의 소나무.
▲ 진평왕릉 북쪽의 소나무.


북쪽으로 보면, 신라 천 년 왕궁터 월성과 황룡사지, 분황사, 첨성대 동부사적지 등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문화유적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진평왕릉 꼭대기에라도 서면, 천 년의 화려한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마치 과거사가 살아 있는 현실로 부활해 눈앞을 지나간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싶다면, 진평왕릉으로 오라고 선전하고 싶다”는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의 신명나는 문화해설이 너무 사실적으로 들린다.



▲ 진평왕릉 서북쪽의 비룡 모습의 고목.
▲ 진평왕릉 서북쪽의 비룡 모습의 고목.
△남산신성과 남산신성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공통적으로 신라시대에 남산신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 591년에 축조했다. 전체 둘레 5천137m 포곡식 산성이다.



▲ 진평왕 13년에 쌓은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남산의 산성 흔적.
▲ 진평왕 13년에 쌓은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남산의 산성 흔적.


산성터에서 동, 서, 남, 북, 동남, 서남문 등 6개소의 문지가 발견됐다.



동문지는 옥룡암으로 이어지는 통로상에 있지만, 대부분 파괴되어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남문지는 해목령에서 전망대로 가는 순환도로와 연결되는 성벽에 위치하고 있다. 문의 폭이 5m 이고, 부근에 신라시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문루가 시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산성 내부에는 22개소의 망대가 확인된다. 망대는 동쪽과 남쪽에 18개소가 집중되어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 남산신성을 쌓은 내용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 신라시대 당시의 지방제도와 관제, 마을편제 등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남산신성 제2비,
▲ 남산신성을 쌓은 내용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 신라시대 당시의 지방제도와 관제, 마을편제 등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남산신성 제2비,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9년에 남산신성의 성벽을 증개축했다는 기록이 있고, 길이 100m에 이르는 긴 창고를 비롯, 3개의 대규모 창고터가 발견되면서 지금도 검게 탄 쌀이 보인다.





▲ 남산신성에서 10기의 비편이 발견됐다. 1, 2, 3비와 9비는 원형이 그대로 드러나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제3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 남산신성에서 10기의 비편이 발견됐다. 1, 2, 3비와 9비는 원형이 그대로 드러나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제3비.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남산신성터에서 비편이 발견되면서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 신해년 591년에 쌓았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됐다. 10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순서대로 이름이 붙은 8비와 9비는 남산신성 안에서 발견됐다.



또 1비와 2, 3, 9비는 거의 원상태로 발견돼 산성 축조연대는 물론, 산성을 쌓는데 동원된 인원과 책임자의 직명과 출신지명, 관등명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



남산신성비가 발견된 자리와 규모 등을 비추어 20개에서 200개 정도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성비는 신라 중고기의 지방통치체제와 역역동원 등에 관련한 문제, 촌락구조 문제 등을 파악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다시 쓰는 삼국유사: 진평왕

진흥왕의 큰 아들 동륜이 보명궁의 담을 넘다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 보명궁주는 진흥왕의 후궁이다. 태자 동륜의 죽음은 아버지의 여자를 사랑한 불륜의 끝이었다.



▲ 진평왕릉 남쪽을 지키고 있는 백양나무.
▲ 진평왕릉 남쪽을 지키고 있는 백양나무.


아버지를 잃었을 때 진평왕의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진평왕에게 두 가지 큰 짐을 지웠다. 불명예스럽게 죽은 아비의 자식이라는 짐, 사고가 없었던들 순조롭게 이어졌을 왕위가 한 순간 물 건너 간 것처럼 바뀌었다는 것이다.



진평은 이 두 가지 역경을 헤치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왕이었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을 바로 돌린 일이기도 했다.



▲ 진평왕릉 일대는 20여년 전만해도 울창한 숲으로 우거져 있었지만, 80% 이상이 고사하고 지금은 20% 정도만 남아있다. 고사목의 흔적.
▲ 진평왕릉 일대는 20여년 전만해도 울창한 숲으로 우거져 있었지만, 80% 이상이 고사하고 지금은 20% 정도만 남아있다. 고사목의 흔적.


동륜의 죽음으로 왕이 된 그의 아우 진지왕은 행실이 밝지 못했다. 진평에게 삼촌이 되는 진지왕은 자리에 오른 지 4년 만에 폐위되고, 20대 후반의 아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진지왕에게도 당시 아들이 있었다. 용춘 또는 용수라 불렸다. 이 아들은 나중에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와 결혼하여 김춘추를 낳았다.



그러나 왕위는 이 아들에게 이어지지 않고 진평왕에게 돌아왔다. 삼촌의 집안에 왕위를 빼앗기는가 싶더니, 사촌을 물리치고 무난히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 이후 박차를 가하는 신라의 발전 분위기로 보아 신라 귀족층, 노리부 등의 실세들은 보다 정치적이지 못한 진지왕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음탕하다는 이유로 왕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진흥왕과 여러모로 닮은 진평을 왕위에 올렸던 것이다.



진흥왕 말기에 진지왕을 지지하는 거칠부 세력과 진흥왕의 뜻과 같이하는 진평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다.



당시 병권과 내정의 실세였던 거칠부가 진지왕을 추대해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거칠부가 사망하면서 진지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진평왕을 지지하는 세력 노리부와 김후직, 진평왕의 동생 등이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왕위에 올렸다.



노리부는 가야 출신으로 진흥왕이 전쟁으로 정복한 땅의 인재들을 중용하는 정책에 힘입어 진흥왕을 따르는 핵심인물로 성장했다.



노리부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후덕함과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김후직과 함께 진평왕을 옹립하고 초기에 상대등에 올라 정사를 주도했다.



귀족 중심의 신라 중기 정치는 진평왕이 54년간 장기집권을 하면서 꾸준히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해, 후반기로 접어들어 절대적인 왕권정치 체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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