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통신] 미국발 르네상스 ‘거리 예술’

발행일 2019-06-20 15:53:4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이성숙재미수필가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 거리 예술)만큼 미국을 설명하기 좋은 예술 영역도 없다. 스트리트 아트의 원조는 원색의 그래피티, 거리의 낙서라고 할 수 있다. 음지문화였던 셈이다. 음지의 낙서가 예술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미국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낙서는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그려져 있다. 대부분의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 소음에 가깝다. 15, 16세기까지만 해도 예술이란 왕실과 귀족, 성직자의 전유물이었을 뿐 아니라 모름지기 고상한 정신 활동의 소산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 후 부르주아(중산층) 계층이 생겨나면서 개성이 가미된 그림이 소비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규격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고집스런 중세미술의 눈에 거리 미술이 ‘예술’로 대접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 미술은 독백같은 형태를 띤다. 혼잣말의 생동감과 구체성, 그 무경계의 자유분방함이 펼쳐진다. 스트리트 아트는 1960년대 시작하여 80년대에 붐을 이루었다. 이 음지의 낙서에 예술가들이 참여하면서 회화적 요소가 가미되기 시작했고, 신흥 예술 장르로 발전한 것이다. 스트리트 아트에는 숭고함이 해체된 발랄함, 개인적 정서, 반항해도 좋은 미국적 유연함이 깊이 배어 있다. 이것들을 회의적으로 볼 필요가 있을까. 출생 배경 때문인지 스트리트 아트를 반달리즘적 시각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지만 작가가 살고 있는 도시나 시대를 가장 현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스트리트 아트이기도 하다. 역사가에게 그 시대를 기록할 의무가 있다면 예술가에게는 그들이 살아 있는 시대와 소통할 책무가 있다. 스트리트 아트는 아부나 비방이 아닌 시대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예술의 소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관객의 상식을 파괴한 예술, 익명의 예술. 스트리트 아트는 익명성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고발성과 반항성이 농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화나 초상화, 잘 알려진 성지 등을 그렸던 이전의 미술이 왕실과 귀족에 봉사한 예술이었다면 스트리트 아트의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봉사한다고 할 수 있다. 창조는 모방에서 기인한다고 하지만 오늘날 그들은 스스로 오리지널이 되어 스트리트 아트의 권위를 확장하고 있다. 미국의 토양이 이들을 자라게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스트리트 아트의 선구는 로스앤젤레스다. 시(City)는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벽을 제공하고 작가 정보와 작품을 직접 관리한다. 로스앤젤레스는 도시 전체에 수천 개의 벽화를 보유하고 있다. 다운타운에 있는 앤젤 시티 양조장 벽면을 중심으로 벽화가 펼쳐져 있다. 이 거대한 캔버스 앞을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지날 수는 없다.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다보면 ‘로스앤젤레스 심장(안티 걸 작품)’이나 ‘도시의 주름(JR 작품)’, 그 옆으로 펼쳐진 ‘나는 보톡스 중독자였다(트리스탄 이튼 작)’, ‘비누 거품을 부는 여인(킴 웨스트 작)’ 등 지역 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는 걸작들을 만날 수 있다. 옥션을 뒤흔든 뱅시((Banksy)의 작품도 이곳에서 만난다. 벽화 작품은 매달 바뀐다. 여기서 좀 떨어진 웨스트 8가, 메이시스 백화점 코너를 돌면 대형 천사의 날개가 그려져 있다. 날개 옆에는 ‘천사의 도시에 살고 있는 당신은 여신이다’라는 문구가 함께 적혀 있다. 즐거운 상상은 덤이다.

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들은 스트리트 기법을 작업실에서도 구현하여 전 세계 아트페어에서도 스트리트 아트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는 원색의 거친 터치로 강렬하게 그려진 캔버스 앞에 서면 그 자유함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한다. 주제들이 현실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거기에는 해학과 풍자, 익살이 스며있다. 웃음이 나는 것이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곳 전시회에 다녀왔다. 먼저는 산타모니카 에어포트 아트 페어로 산타모니카 지역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실을 개방하는 오픈 전시였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영국 사치 갤러리가 주목하는 작가 140인 전이 열리는 디 아더 아트 페어였다. 산타모니카 아트 페어는 물론이고 전 세계 작가가 한 데 모인 디 아더 아트페어에서도 스트리트 아트는 다양한 재료와 주제로 사람들 시선을 잡았다.

미국은 역동적이다. 그들은 젊다. 미국에 살면서 이들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자신감에 넘쳐 있다. 노예제 폐지, 끝없는 서부로의 개척정신, 사회 전반에 두텁게 형성된 기부문화, 드라이브 스루, 스트리트 아트까지 미국발 르네상스가 확산하고 있다.

호기심이 대접받는 나라. 아메리칸 드림이란 한 시대를 풍미하다 사라진 말이 아니다. 여전히 미국은 꿈이 실현되는 땅이다. 인간의 도전과 창의력을 높이 사는 국가정신은 앞으로도 미국을 문명주도국으로 남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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