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가 뜨는 동안/ 신철규

여기는 그늘이고, 저기는 환한 빛 속이야// 커튼이 쳐진 교실은 어둑하고/ 커튼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촛대처럼 길게 늘어져/ 교실 바닥을 두 쪽으로 쪼갠다// 우리는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무지개를 바라본다/ 처음과 끝이 희미해서 아슬아슬한 무지개/ 손으로 잡기에는 너무 멀고 뛰어가면 사라져버릴// (중략)/ 지구가 생기고 난 뒤 한 번도 멸종된 적이 없는/ 구름에 대해 생각하는 오후/ (중략)/ 너의 슬픔은 찰랑거린다/ 그 수면에 손바닥을 갖다 대면/ 오른눈은 반달 모양으로 웃고 왼눈엔 주먹만한 눈물이 맺힌다// 우리가 평생 동안 흘릴 눈물을 모은다면/ 몸피보다 더 큰 물방울이 눈앞에 서 있을 거야// 누군가 텅 빈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우리는 가만히 숨을 멈추고 몸을 포갠다/ 훈풍이 불어와 커튼을 펄럭이자/ 우리의 등 뒤로 뚱뚱한 거인의 그림자가 늘어진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자의 어깨를 토닥인다// 여기는 투명한 그늘이고/ 저기는 여전히 물방울이 타오르고 있어.

-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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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무지개를 자주 쳐다보면서 공상하고 꾸었던 고운 꿈이 있었다면 당연히 평생을 간다. 꿈과 동심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떠있는 달이고 무지개이거늘 요즈음은 무지개를 볼 기회가 적다. 교실에 앉아 턱을 괴고 우두커니 바라본 무지개는 우리가 자라면서 흔히 보아왔으나 마지막으로 목격한 게 언제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이젠 귀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처음과 끝이 희미해서 아슬아슬한 무지개’ 어렸을 적 무지개에 대한 추억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때의 순수한 꿈과 가슴 두근거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는 소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구약에 의하면 신이 더 이상은 홍수로 생명체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노아에게 보여준 약속의 표식이 ‘무지개’였다. 사람이면 누구나 하늘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볼 때 가슴이 뛰고 아련함에 젖어든다.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송사리 떼 같은 햇살이 스쳐간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어른이 되더라도 순수한 모습을 주문한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그 꿈과 순정한 마음, 그리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늙어 죽을 때까지 지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의 등 뒤로 뚱뚱한 거인의 그림자가 늘어’지면서 산통을 깬다. ‘여기는 투명한 그늘이고 저기는 여전히 물방울이 타오르고 있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른이 되면서 사라지고 없는 꿈의 자리에 헛된 욕망들만 수북이 쌓여있지는 않은가. 아름다운 것들에 무덤덤해지고 건성 건성의 타성에 길들여지는 것은 아닐까. 박범신 작가는 이럴 때 당장 필요한 것은 삶의 방식을 단호히 바꾸어 ‘나’와 ‘우리’들이 ‘혁명적’으로 깊어지고 고요해져서 진실로 ‘사랑의 얼굴을 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순수의 회복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리라. 가정의 달 5월도 오늘이 마지막이고 어린 시절의 무지개 추억도 끄트머리가 희미해질 것이다. 5월이 가도 하루 한 번이든 열한 번이든 우리 맑은 어린이로 되돌아가야하리.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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