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森林)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쎄멘트 장판 우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져간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 신조선(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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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은 밝음이 어둠으로 빨려들고 융합되면서 우주와 대지를 또렷이 인식케 한다. 황혼이란 이미지가 갖는 일반적인 의미로 한정지어 시를 읽자면 그리움이나 안타까움 등이 먼저 묻어날 수 있겠다. 그러나 시인이 시를 쓸 당시의 시대상황과 배경을 살핀 뒤 문맥을 짚어보면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으리라. 시인은 5월 어느 날 골방의 커튼을 걷으며 황혼에 젖은 바다와 그 위를 나는 갈매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골방에 난 창을 통해 ‘지구의 반쪽’까지 내다본다. 아니 어쩌면 이 예사로운 정경은 상상 속에서의 설정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골방’은 당시 시인들의 시에 흔히 나타나는 ‘밀실’이니 ‘동굴’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변별되는 확실하고 구체적인 이상 세계로 나아가는 연결통로인 셈이다. 이 시에서 ‘지구 반쪽’의 의미도 당시 제국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피지배민족을 뜻하며 의식의 연대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을 위해서 뜨거운 열정을 쏟아 부으며 살고 싶다는 육사의 꿈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다. 그의 시편들에는 조국을 위한 의로운 길이라면 언제든 기꺼이 목숨까지 던지겠다는 결의가 횃불처럼 강열하고 날선 바위처럼 비장하다.
그는 낭만적 현실주의자로서 식민지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민족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패트릭 화이트는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분량만큼 진보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삶 전반을 통해 얼마나 고통을 경험해보았을까 싶은 황교안 대표의 ‘지옥’ 운운한 발언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육사 애국시인 대구기념사업회’의 창립총회가 오늘(5월28일) 열린다. 대구시민들에게도 육사의 정신이 살아 숨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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