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쾌재정

이른바 패스트트랙 문제로 당파싸움이 한창인 날 쾌재정을 찾았다. 여의도의 풍경은 쇠뭉치를 휘두르는 난장판이었지만, 한적한 농촌은 딴 세상처럼 평화로웠다.



모내기 철 가까운 봄날이어서 들녘은 생명의 온기로 부풀었고, 산새들은 짝을 지어 보금자리를 찾고 있었다. 자연의 여여(如如) 함에 비추어 보건대, 세속의 민낯은 참혹한 것이었다. 참혹을 넘어 민망한 것이었다.



오만과 독선과 탐욕 때문일 것이다. 권력의지의 주된 에너지원이 오만과 독선과 탐욕일 때 나쁜 정치판이 성시를 이루는 법, 작금의 여의도 살풍경이 그 대표적인 본보기일 터이다. 논밭을 일구는 농부에게, 노래하는 새들에게, 이 맑은 봄날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지... 마음속에 되뇌며 차를 달렸다.





내 차의 내비게이션은 이곳이 내가 찾는 그곳이라며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농로(農路)에 내리라 한다. 텅 빈 들녘 경운기 곁에 내리라 하니 황당한 일이었다.



주변에 ‘쾌재정’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유적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었다. 밭갈이하는 농부도 그런 곳은 모른다 했고, 안내 표지판도 찾을 수 없었다.





차를 되돌려 수소문을 나섰다. 문 잠긴 경찰 지구대를 지나, 주민잔치 한마당이 열리고 있는 이안면 사무소를 거쳐, 철길 밑 굴다리를 지나, 다시 내비게이션이 데려다준 곳 또한 그곳, 그 자리였다.



교통경찰이 귀띔해준 야트막한 동산이 시치미를 떼고 나를 맞았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까운 저 숲속에 쾌재정이 있을 것이었지만, 쾌재정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농가의 텃밭이 앞길을 가로막고, 발길 끊긴 지 오래인 듯 우거진 잡초가 뒷길을 지우고 있었다. 이끼 낀 너럭바위를 지나 흐린 옛길의 흔적을 더듬어 마침내 ‘쾌재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581호)에 이르렀다. 위리안치된 선비처럼 남루한 모습이었다.



냇물이 동쪽으로 흘러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고, 산이 냇물에 임하여 마치 누에의 머리같이 된 곳에 정자가 있어 나는 듯하다. 이름하여 ‘쾌재정’이라.



‘동쪽으로 학가산, 서쪽으로 속리산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갑장산을, 북쪽으로 대승산을 바라본다. 강산이 아름다워 비단결 같도다. 그 주인은 누구인고, 채기지(蔡耆之)로다’와 같이 쾌재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기문(記文)은 옛 시인의 허사였다.



쾌재정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문장가, 중종반정공신으로 인천군에 봉군되었던 난재 채수(1449-1515) 선생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그는 이곳에서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설공천전)을 쓴다. 저승을 다녀온 설공찬(薛公璨)이 당시의 정치인들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을 이야기로 만든 (설공천전)은 허균의 (홍길동전) 보다 100년 앞서 쓰인 패관소설이다.



훈구대신과 신진사림의 갈등, 요즘 말로 하자면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의 세력다툼으로 영일이 없었던 조선 중종 조의 정치적 상황이 그 배경이다.



주인공 설공찬이 들려주는 저승 이야기는 이렇다. 저승에는 남녀차별이 없어 여성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높은 벼슬을 할 수 있다는 것. 이승에서 아무리 큰 권력이 있었어도 저승에서는 그 사람의 행적에 따라 벌을 받는데, 그 예로 당 태종은 사람을 많아 죽여서 지옥에 있다는 것. 아무리 임금이라도 반역을 저질렀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풍속에 비추어보면 가히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특히 반역에 대한 부분은 중종(中宗)이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민감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중종과 권신(權臣)들의 눈에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조정은 (설공천전) 필화사건으로 들끓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아옹다옹으로 날밤을 새우나보다.



중종 3년(1508) 9월의 일이었다.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妖妄)한 것이며, 중외(中外)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文字)로 옮기거나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府)에서 마땅히 행이(行移) 하여 거두어 드리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라고 사헌부가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은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으나, 법을 따로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럼에도 채수를 교수(絞首)해야 한다는 탄핵 상소가 계속되자,



그가 지은 (설공찬전)이 괴이하고 허탄한 말을 꾸며서 문자로 나타낸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혹하게 하므로 ‘부정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히고 인민을 선동하여 미혹케 한 율(律)’에 의해 사헌부가 교수(絞首)로써 조율했는데, 파직만을 명한다.





이와 같이 임금은 거듭 극형이 아닌 파직을 명한다. 그러나 요망한 사설로 민심을 어지럽힌 채수를 교수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조정의 여론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9월20일 조강(朝講)에서 영사(領事) 김수동(金壽童)이 “채수(蔡壽)가 만약 스스로 요망한 말을 만들어 인심을 선동시켰다면 사형으로 단죄함이 가하지만, 다만 기양(技癢)의 시킨 바가 되어 보고 들은 대로 망령되이 지었으니, 채수를 교수로 단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형벌(刑罰)과 상(賞)은 중(中)을 얻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태평광기), (전등신화) 같은 유(類)를 지은 자도 모조리 베어야 하겠습니까?” 라고 채수를 두둔한다.



임금은 “(설공찬전)은 윤회화복의 설(說)을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케 하였으니, 채수에게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수함은 과하므로 참작해서 파직한 것이다”라는 설명으로 필화사건을 매듭짓는다.



배타적 이념과 진영의 치킨게임으로 ‘궤멸’, ‘청산’과 등과 같은 섬뜩한 말들이 흉흉한 작금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어느 한 쪽에 휘둘리지 않는 임금의 자세는 돋보이는 바 있다.



중종실록에 실려 있는 선생의 (졸기·卒記)는 선생의 사람됨을 이렇게 적고 있다.



채수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에서는 폐비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조급하며 허망하여서 하는 일이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늘 시주(詩酒)와 음률(音律)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떳떳하지 않은 말이 많기 때문에 사림(士林)이 부족하게 여겼다.



사림의 평가가 어떠하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선생은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선비였다는 사실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한 공로로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는 과정과 경위가 그것을 말해준다.



따르지 않을 때는 목을 베어 오라는 엄명과 함께 거사 주도한 박원종은 수하를 시켜 선생을 반정에 동참시키게 한다. 저간 사정을 알게 된 선생의 사위 김감(金勘)은 ‘장인이 올 리가 없다’는 생각에 선생을 취하도록 술을 권한다.



만취한 상태로 부축을 받아 궐기 장소에 인도된 선생은 영문도 모르는 채 반정에 참여한 공신이 되고,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3등의 녹훈을 받게 된다. 술기운에 떠밀려 얻게 된 공신 책봉이 선생에게는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었다. 염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부끄러움이 선생의 낙향을 부추긴다. 여의도 사람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정쟁 없는 시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쟁의 앞뒤 맥락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염치가 있고 없고의 차이로 나뉘는 서로 다른 클래스가 있다.



채수 선생에게서 보듯, 부끄러움을 아는 자의 부끄러움은 후세를 경계(警戒)하는 (설공찬전)을 낳고,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보듯,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의 저 잘난 민낯은 민생파탄의 난장판을 낳는다. 염치 있는 세상이 보고 싶은 이유이다.



강현국(시인, 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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