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극단의 시대’

발행일 2019-04-22 15:59:2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여전한 ‘극단의 시대’

홍덕률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극단의 시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그렇게 불렀다. 파시즘, 유대인 대학살, 볼셰비키 혁명과 중국 문화혁명,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전쟁, 종교전쟁, 1, 2차 세계대전, 냉전과 매카시즘으로 점철된 20세기였으니 그렇게 부를 만하다. 이념, 종교, 인종 등, 온갖 이유를 들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100년이었으니, 그의 주장에 아니다 할 수도 없다.

이 좁은 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역시 ‘극단의 한 세기’였다. 35년이나 식민지 백성으로 살면서 ‘목숨 걸고’ 항거해야 했고 또 살아남아야 했다. 수많은 민간인들까지 동족간 전쟁으로 목숨과 가족을 잃어야 했다. 산업화도 전쟁하듯이 했다. 수많은 이들이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쳤다. 정치도 군사작전과 흡사했다. 고문과 투옥이 일상이었던 적도 있었다.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열된 대입 경쟁은 흔히 전쟁으로 불렸다. 초중고등학교 과정은 대입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군사훈련에 다름 아니었다. 크고 작은 전쟁과 한(恨)들이 온 사회에 넘쳐났다.

문제는 21세기 들어와 19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독도, 역사교과서 문제 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에도 반민특위가 한 정치인에 의해 도마에 올랐다. 이념갈등은 더 하다. 그 뿌리인 남북 관계는 최근까지 일촉즉발의 극한대결을 이어왔다. 지금도 툭하면 좌파, 친북, 빨갱이라며 타도 대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지난한 시도들도 이적행위로 매도되곤 한다.

정치권만의 얘기가 아니다. 민주시민의 덕목과 사람됨의 도리를 가르쳐야 할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겸손과 자비의 공동체여야 할 종교계도 다르지 않다. 맹신과 광기와 극단이 신성한 강단과 성전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염치도 없고 수치심까지 팽개친 인면수심이 어디서나 넘쳐난다.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극단의 문화’, ‘극단의 행태’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과도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한다는 것이다. 매사를 선악으로 나누고 모든 사람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한다. 말하자면 ‘전쟁 프레임’이다. 상대는 타도해야 할 적일뿐이다. 싸우는 것이 일이고 헐뜯어 쓰러뜨리는 것이 삶이 되었다. 이런 전쟁터에서는 누구라도 정신과 육신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둘째 특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리주의’, ‘일등주의’다. ‘전쟁 프레임’에서는 당연한 결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고 믿는다. 공정한 룰과 경쟁, 신사적인 매너 등은 한가한 얘기다. 권모술수와 거짓말도 능력으로 대접받는다. 최근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한다.

셋째는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다. 상대의 주장은 반대부터 하고 본다. 설령 어제까지 내가 주장했던 내용이라도 상관없다. 적이라고 생각하니 당연하다. ‘반대를 위한 반대’, ‘싸움을 위한 싸움’에 사활을 건다.

넷째 특징은 협상과 타협이 없다는 것이다. 자칫 이적 행위로 간주될 뿐이다. 그러니 중간 지대도 균형이란 것도 없다. 모두에게 유익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대화와 토론도 없다. 있더라도 형식일 뿐 대부분 천박한 우격다짐이거나 막말싸움이다.

다섯 번째 특징은 ‘무(無)논리’와 ‘반(反)지성’이다. 논리와 이성은 없고 감정만 나부낀다. 그것도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들이다. 예컨대 증오, 분노, 질투, 원한 등이다. 그런 감정들을 마음 한켠에 묻어두고 사는 선량한 이웃들까지 최대한 자극하고 부추긴다. 내 편에서 함께 흥분해 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동이다. 우리는 지금 반(反)지성과 선동의 전형을 목격하고 있다. 그것의 끝은 극단의 혐오사회와 공멸일 뿐이다.

2500년쯤 전, 플라톤은 철인 정치를 주장했다. 시민과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정치인에게는 엄격한 훈련과 자기통제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비슷한 시기, 공자는 군자에 의한 덕치를 역설했다. 현대 민주주의와는 어울리기 쉽지 않지만 그들의 문제의식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역시 비슷한 시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중국의 사상가들은 중용의 덕을 강조했다. 이성적일 것, 지나치지 않을 것, 신중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예수와 석가모니도 겸손하라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내려놓고 비우라고 했다.

서로 존중하는 고품격사회, 상생과 평화의 생명사회. 정녕 우리에겐 가질 수 없는 ‘유토피아’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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