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우리는 아무도 패배하지 않는다

이성숙

재미 수필가

날씨가 적당히 흐린 날은 뉴포트 비치가 좋다. 4월의 이른 아침. 해변은 건강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물속에 들어가기에는 이른 시간이고 바닷물은 아직 차갑지만 바다에는 한가득 서핑족이 떠 있다. 둑방으로 올라선다. 긴 둑방 끝에는 낚시 통을 옆에 둔 어부들이 빈틈없이 앉아 있다. 은빛 고등어가 열댓 마리씩 낚여 올라온다. 감탄을 연발하는 내게 막 고기를 잡아 올린 남자가 한 통 가득한 물고기를 거저 가져가라며 농을 건넨다. 내가 손사래를 치자 그는 그렇다면 미끼값으로 5불만 내고 가져가란다. 그의 흥정이 유쾌하다. 그 아침을 그대로 보낼 수 없어 나는 값을 치르고 고등어 한 통을 고무통째 받는다. 살아 팔딱이는 고등어를 바다에서 만나는 느낌은 특별하다.

고등어가 물통을 넘어 솟구친다. 갈매기와 펠리칸이 물통 위로 배회하고 신신한 아침 공기는 바다를 배경으로 출렁댄다. 태양은 구름을 못 이겨 멀리서 실루엣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공기는 더 차고 사람들 말소리는 낡은 필름 속 영화 대사처럼 더디게 들린다. 어쩌면 차원이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하다.

내게 고등어를 판 어부가 웃어 보인다. 그의 굵은 주름위에는 샛노란 장난기가 묻었다. 하바나의 그 노인처럼 의지적이지는 않아도 바다를 안고 사는 그의 삶이 어쩐지 낭만으로 가득 차 보인다. 그래, ‘그의 모든 것은 늙거나 낡아 있었고 그의 파란 눈은 아침 생기에 빛나고 있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사투를 벌이지는 않지만 낚싯대 드리운 그의 눈빛은 진지하고 고기를 낚아챌 때는 바다와 내기를 하듯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운동복 마크가 새겨진 그의 재킷에는 꼬깃꼬깃 바다가 묻어난다. 정오가 되면 그는 몇 푼의 돈과 고등어를 안고 호기롭게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윽고 그가 낚시 도구를 챙겨든다. 정오가 훌쩍 지났다. 날씨가 흐린 탓인지 찌를 내리기 바쁘게 고등어가 물려 올라오는 바람에 일어날 시간을 놓쳤다고 했다. 바닷물은 검고 깊다. 난간에 매달려 바다를 굽어본다. 육안으로도 고등어 떼가 장관이다. 과연 4월은 고등어가 제철인 때다.

문학과 예술은 문명의 반작용으로 태어난다고 했던가. 물통, 낚싯대, 찌를 썰던 칼자루가 빈 고등어 통에 담긴다. 때 국물에 절은, 그가 한나절을 머물던 텐트가 접힌다. 거뭇거뭇하니 빛바랜 텐트와 낚싯대는 어부의 삶을 지탱해 온 장치들이다, ‘별빛과 달빛이 수없이 앉았다 갔을’. 하루를 정리하는 어부의 손길이 기도처럼 숭고하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햇살에 그을린 얼굴과 깊게 패인 주름, 흰머리, 체구에 비해 단단하게 단련되어 보이는 손가락 마디는 그의 삶의 기록일 터다.

잠시 머물렀던 물 마을 하바나에서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낳았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어도 패배할 수 없다던. 오늘 고등어를 낚은 어부는 내일쯤 고래를 잡을지 모른다. 볕이 들지 않는 작은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의 등에 햇살이 앉는다. 모든 것이 충만한 삶이란 도태를 의미하지 않던가. 고래를 잡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어부의 삶을 밀고 가리라. 천적이 없는 존재는 자멸하고, 배부른 돼지는 살아남지 못한다. 세포조차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형질만이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법이다. 어부의 손등에 불거진 심줄은 인류가 다음 세대에도 살아남을 것임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다시 새벽을 기다려 집을 나서고 고등어를 거저 가져가라며 행인에게 말을 건넬 것이다. 선한 얼굴에 주름을 피우고 살 오른 고등어를 길어 올릴 것이다.

어부가 지나간 둑방을 따라 걷는다. 마파람이 머리칼을 젖히자 비린내가 폐로 침투한다. 둑방 난간에는 미끼로 사용되던 조갯살과 갯지렁이가 생선 피와 뒤섞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두께가 5㎝는 됨직한 나무 도마가 옹이 자국처럼 움푹 패여 있다.

백사장에는 날개를 접은 펠리칸이 먹이를 쪼아대느라 분주하고 하늘에는 갈매기가 소란하다. 어부가 떠난 자리에 몸집 큰 갈매기가 잽싸게 내려앉는다. 파편이 된 미끼가 그의 식량이다.

둑방 아래쪽으로는 새벽 어시장이 갈무리 중이다. 해산물을 팔던 상인은 좌판을 푸른색 비닐로 덮어씌우고 네 귀퉁이를 고무줄로 단단히 조인다. 새벽 장은 매주 한 차례씩 열린다. 늦깎이 손님을 기다리는 것인지 좌판을 열어 둔 곳이 두어 집 있지만 관광객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는 내게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안쪽에서는 남자 두 명이 긴 고무장화에 빗자루를 든 채 물 고인 바닥을 쓸어내고 있다. 광장에는 특산물 수레와 야채 상인이 진을 치고 있다. 길가에는 장신구를 파는 사람, 야자수 아래서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 마른 과일을 들고나온 아주머니, 꽃을 파는 청년이 자리하고 있다. 모두가 화사한 얼굴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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