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 아우를 어느 봄 꿈에 보고

뻐꾸기가 쓰는 편지-먼저 간 아우를 어느 봄 꿈에 보고 박기섭뻐꾸기 봄 한철을 갈아낸 그 먹물을 내가 받네 내가 받아 한 장 편지를 쓰네 어디라 머리칼 한 올 잡아볼 길 없는 네게 너 있는 그곳에도 봄 오면 봄이 오고 봄 오면 멍든 봄이 멍이 들고 그런가 몰라 서럽고 막 그런가 몰라 꽃 피고 또 꽃 진 날에 너 나랑 눈 맞춰 둔 그 하루 그 허기진 날 말로는 다 못하고 끝내는 못다 하고 꽃이면 꽃이랄 것가 꼭 꽃만도 아닌 것아 너 다녀간 꿈길 끝에 찬비만 오락가락 오락가락 찬비 속에 목이 젖은 먼 뻐꾸기 젖은 목 말리지 못한 채 먹점 찍는 먼 뻐꾸기-《발견》(2019, 겨울호).....................................................................................................................박기섭은 달성 마비정 출생으로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키 작은 나귀타고』『默言集』『하늘에 밑줄이나 긋고』『엮음 愁心歌』『달의 門下』『角北』『서녘의, 책』등과 시조선집『비단 헝겊』이 있다. 그는 등단 이후 주정과 주지를 넘나들며 개성적인 목소리의 발현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현대시조가 나아갈 방향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내밀한 서정세계로 출발해서 냉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주지적인 시조 세계를 개척하여 시조가 단아한 서정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새롭게 일깨우는데 크게 기여했다.‘뻐꾸기가 쓰는 편지’는 그가 얼마나 농밀한 서정세계를 시조로 잘 읊조리는지 여실히 알게 하는 시편이다. 부제 먼저 간 아우를 어느 봄 꿈에 보고라는 구절에서 보듯 크나큰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뻐꾸기 봄 한철을 갈아낸 그 먹물을 내가 받네 내가 받아 한 장 편지를 쓰네라는 대목에서 이미 그 곡진함은 다 전해진다. 내가 받네 내가 받아라는 표현은 다른 이는 도저히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반복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종장 어디라 머리칼 한 올 잡아볼 길 없는 네게는 더욱 절절하다. 아우의 머리칼 한 올이라도 잡아 보고 싶은 그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더욱 애타는 것이다. 먼저 간 아우를 어느 봄꿈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잊고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늘 간절한 마음이 있어 꿈에 본 것이다. 그것도 봄 꿈이다.얼마나 애절하면 봄 앞에 멍든을 수식하고 있을까. 또한 서럽고 막 그런가 몰라라고 혼잣말을 한다. 꽃 피고 또 꽃 진 날에 그럴까 하는 생각이 절실하다. 그리고 너 나랑 눈 맞춰 둔 그 하루 그 허기진 날 말로는 다 못하고 끝내는 못다 하고 꽃이면 꽃이랄 것가 꼭 꽃만도 아닌 것아라면서 아우를 부르니 슬픔은 극치에 다다른다.‘뻐꾸기가 쓰는 편지’는 이렇듯 애잔하다. 작품의 배경이 된 먼저 간 아우로 말미암아 고조된 슬픔이 네 수의 시조로 체현되어 그 절절함이 심금을 울린다. 그만이 운용하는 절묘한 리듬과 말의 되풀이로 시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는 점도 한몫을 하고 있다. 내가 받네 내가 받아, 봄 오면 봄이 오고 봄 오면 멍든 봄이, 그 하루 그 허기진 날 말로는 다 못하고 끝내는 못다 하고, 찬비만 오락가락 오락가락 찬비 속에, 목이 젖은 먼 뻐꾸기 젖은 목 말리지 못한 채, 라는 대목에서 보듯 앞 구절을 받아 뒤 구절로 넘기는 치밀한 시적 장치로 음악성을 확보함으로써 가락이 넘실거리면서 의미를 심화시킨다. 그만이 해낼 수 있는 개성적인 작법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유리를 향하여

유리를 향하여 이기철나는 봄의 온유, 여름의 염열, 가을의 소조, 겨울의 냉혹보다/ 한 언어가 내게로 다가올 때의 수정 같은 초조/ 그 긴장된 순간의 불꽃을 노래하고 싶다// 유리 언어여, 내 마음의 보석이여/ 너는 내 고통의 내용이고 기쁨의 항목이다/ 내 정신의 한 그릇 밥이고 내 마음의 한 그릇 물이다// 그러나 내게는 겨울나무를 덮어줄 외투가 없고/ 혹한의 들판을 엎어줄 이불이 없다/ 내게는 내 추운 겨울을 닫아버린 구두 속의 온기가 있고/ 내 벗어버린 옷가지에 남은 먼지 같은 체온이 있을 뿐/ 내게는 이 쓸쓸함과 저 적막을 한데 기울 바늘이 없고/ 이 질시와 저 저주를 일거에 꿰뚫을 창이 없다// 내 참담의 내용을 다 기록할 노트가 없지만/ 나는 유리의 이름으로 내 삶의 세목을 축약하겠다/ 오래 흘러 평지에 드는 물처럼/ 수채화 걸린 복도를 지나는 아름다운 사람처럼/ 내 걸어가 닿고 싶은 곳은/ 지는 잎새 소리가 문고리에 매달리는 황혼녘의 집이다//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마신 술은 내 사랑임을/ 내가 저주한 하루들은 내 생애임을/ 이미 내 염원의 반쯤은 숯이 된 지금/ 나를 떠난 시간에 나는 돌 던질 수 없다// 내 알몸으로 거리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시간이 오면/ 뜨거워 살이 데는 불꽃의 언어를 식히며/ 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펭귄이 걸어간 극지의 흰 눈 속을/ 나는 맨발로 걸어가리『유리의 나날』 (문학과지성사, 1998)................................................................................................................... 어느 날 갑자기, 시심이 불꽃처럼 홀연히 찾아올 때의 맑은 영혼을 노래하고 싶다.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고 활짝 핀 꽃처럼 향기를 내뿜을 것이다. 욕심을 남김없이 내려놓고, 가리거나 감출 것도 없다. 투명한 유리 언어로 마음의 보석을 찾아보리라. 정신과 마음은 고통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추위에 떠는 나무와 혹한의 허허들판을 구원할 힘과 능력은 시인에겐 없다. 발이 얼지 않을 정도로 겨우 추위를 막아줄 온기가 구두 속에 조금 남아있고, 몸이 얼지 않을 만큼 미약한 체온이 옷가지에 의지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쓸쓸함과 적막함을 뭉뚱그려 꿰찰 바늘이 없고, 질시와 저주를 꿰뚫을 창도 없다. 삶의 내용을 세세히 기록할 노트도 없다. 하지만 삶의 엑기스를 유리 언어로 쓰고 싶다. 항상 낮은 자세로 높은 곳보다 바닥이 더 즐거운 물의 마음을 가진 삶, 수채화 같이 싱그러운 삶을 흠모한다. 잎새 지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은 고즈넉한 황혼녘의 집을 향하는 삶을 소망한다. 내면 깊은 곳에 수정궁을 짓고 유리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 해골의 물을 마시고 득도한 선사처럼 유리에 닿는 삶을 염원한다. 문득 유리에 닿는 날이 찾아오면, 모든 병자들에게 입 맞추고 거지에게 무릎 꿇을 각오가 되어 있다. 삽 한 자루로 남산을 옮기는 수고를 해야 한다면 기꺼이 삽을 들고 우공의 뒤를 따를 양이다. 사랑을 술에 담아 마신 나날들이 벌써 반이나 불타 스러졌다. 이제 와서 지난 세월을 원망하진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 빨가벗어도 오점이 없는 삶이 유리를 향한 길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몸을 태우고 숯만 남길 뜨거운 언어를 차갑게 식히며 냉철한 유리의 언어로 시를 쓰고 싶다. 펭귄이 걸어간 흰 눈 속,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맨발로 가야한다 하더라도 유리를 향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 남아 유리의 경지에 도달 할 수만 있다면 풀잎처럼 세상 가운데 흔들리며 살더라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 길을 갈 생각이다. 오철환(문인)

풀 김수영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김수영 전집』 (민음사, 2015).................................................................................................................. 지구는 풀의 전성기다. 나무가 많긴 하지만 풀의 기세를 당할 수 없다. 야생화나 이름 없는 들꽃은 풀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유명세가 있는 꽃들은 풀이기를 거부하지만. 인간이 버릇을 그렇게 들인 탓이다. 허나 시인이 보는 풀은 바람에 흔들릴 정도의 키가 제법 크고 늘씬한 풀이다. 키가 작거나 땅바닥에 바짝 붙어 기는 잡초를 불러올 상황은 아니다. 어쩌면 강가에 일렁이는 갈대일 수 있고, 산등성이에 군집하는 억새풀일 수 있다. 갈대나 억새풀은 아니더라도 쭉 빠진 몸매를 과시하는 강변의 물풀 군락 앞에 서있는 시인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동쪽 하늘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동풍이 비를 싣고 온다. 하늘하늘한 풀들은 서편으로 떠나가는 바람의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바람의 뒤태를 돌아보며 짧은 만남을 못내 아쉬워한다. 바람은 야속하게 돌아보지도 않지만 애써 데리고 온 빗물을 선물처럼 남기고 간다. 풀은 무뚝뚝한 바람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감읍한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지경이다. 구름이 머물며 풀에게 빗물을 듬뿍 내려준다. 배부른 풀들은 구름아래 느긋하게 눕는다. 바람이 남기고 간 빗물이 다하면 풀잎마저 꺼칠하다. 풀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인다. 바람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싱싱한 물 내음이 멀리서 전해온다. 풀은 엎드려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이 실어올 빗물을 그리며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눈물이 핑 돈다. 풀은 비 바라기다. 고운 님의 얼굴을 보려고 살짝 고개를 들어본다. 빗물이 내려와 입을 맞추면 풀은 그제야 사랑을 확인하고 긴장을 푼다. 풀이 눕는다. 폭포수마냥 쏟아지는 도파민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이젠 풀은 바람의 기척만 느껴져도 절로 몸을 숙인다. 바람은 또 지나가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다. 풀은 행복에 겨워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린다. 다음에 또 고운 님 오는 날, 그땐 결코 울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웃으면서 의연하게 님을 맞으리라 다짐한다. 어느덧 날이 가면 또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떠 온다. 풀들은 아예 풀뿌리까지 눕혀 님을 맞이한다. 바람과 구름과 풀이 미소 짓는 모습은 평화롭고 사랑스럽다. 나라 잃은 식민지의 민초는 기댈 곳이 없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은 그런 환경에 주눅 들기 마련이다. 허나, 시인은 겉으론 겁 많고 눈 큰 사슴 같지만 안으론 불의에 분개하고 억압과 강압에 반항하는 지사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청춘을 보내고 한창 활동할 나이에 참혹한 내전을 겪었다. 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잡혀있기도 했다. 칠흑 같은 질곡을 헤매다가 만신창이가 된 맑은 영혼이다. 감수성이 풍선처럼 부푼 시인이 바라본 풀밭은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광경이다. 봄비에 이슬을 살포시 머금은 채 바람에 일렁이는 연초록 빛 풀밭은 그 자체 아름다운 시다. 바람과 구름, 비와 풀이 보여주는 배품과 나눔은 시인이 찾던 이상향일지 모른다. 풀과 바람을 민초와 외세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오철환(문인)

목련

목련 조명선 꽃 속을 걸어가는 한쪽 젖만 부푼 그녀/ 꼭지가 지기 전에/ 물고자란/ 포근한 곁 지난밤 은밀히 만나/ 오려낸 한쪽/ 반짝인다 살점에 묻은 슬픔 주무르고 핥으며/ 하부보다 더 짓누르는/ 이 낮고/ 긴 절차에도 오늘 밤 노둣돌 놓아/ 궁굴려야 할/ 저 허공.................................................................................................................... 조명선은 경북 영천 출생으로 1993년 《월간문학》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 『하얀 몸살』과 《고요아침》에서 2017년 출간한 현대시조 100인선『3×4』가 있다. ‘목련’은 무장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꽃 속을 걸어가는 한쪽 젖만 부푼 그녀를 본다. 꼭지가 지기 전에 물고자란 포근한 곁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목련을 두고 지난밤 은밀히 만나 오려낸 한쪽이 반짝인다, 라고 진술한다. 또한 살점에 묻은 슬픔을 주무르고 핥으며 하부보다 더 짓누르는 이 낮고 긴 절차에도 오늘 밤 노둣돌 놓아 궁굴려야 할 저 허공을 보라고 독자에게 권유하고 있다. 목련의 만개는 눈부신 봄날의 선물이다. 젖은 모성의 상징으로서 생명의 경이다. 그런데 환한 목련에 비길 수 없는 한쪽 젖만 부푼 그녀가 꽃 속을 걸어가는 장면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생명은 존귀한 것이다. 봄날에는 더욱 그러한 마음이 간절한 때다. ‘목련’은 연행갈이 즉 분행이 잦다. 시조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잦은 연행갈이로 말미암아 자유시로 여길 수도 있지만, 시조를 쓰는 시인은 자신의 작품이 독자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다가가는 길을 늘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기사형식을 선택할 수 있다. ‘목련’은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 한해서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표기방식을 두고 조형미학이라고 부른다. 시는 눈으로 보는 일이 먼저이기 때문에 시각적 이미지를 도외시할 수 없다. 형태가 만들어내는 언어미학이 중요한 까닭이다. 속에 들어 있는 말을 입 밖으로 일정량 이상 쏟아내지 않으면 병이 날 수도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일은 이처럼 어렵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발언이다. 할 말이 많다는 뜻이다. 그의 다른 작품 ‘악수’도 그렇다. 알고 있다, 끄떡없다, 걱정 마라, 수고해라와 같은 말이 ‘악수’에 녹아 있다. 짧은 인사말과 함께 정담 없이 내미는 손바닥의 관계가 참 묘하다는 생각을 화자는 한다. 그래서 관계라니, 라는 어법을 활용했을 것이다. 곧 이어 순간의 기막힌 합방으로 말미암아 잠시 눈이 환해진다. 내밀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요즘은 인사 방법도 많이 바뀌었다. 아직도 숙지지 않고 있는 코로나 때문이다. 그래서 악수를 마음대로 할 때가 그립기까지 하다. 시인은 몇 줄의 시를 매만지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담고자 애쓴다. 설렘으로 다시 시작하는 하루, 신록을 예찬하고 싶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도 하루하루가 축복의 나날임을 깨닫는다. 이제 건강한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이정환(시조 시인)

산장

산장 기 드 모파상~혼자는 외로워서 미친다~…산봉우리들에 둘러싸인 알프스 산장이 그 배경이다. 그 산장은 여섯 달 동안만 문을 연다. 눈으로 길이 막히기 전에 산장 가족들은 마을로 내려간다. 산 안내 노인 가스파르와 산 안내 청년 울리히, 그리고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산장에 남아 집을 지킨다. 산장의 겨우살이는 무료함과의 싸움이다. 산장의 겨울은 단순하고 무료하다. 늙은 가스파르는 독수리와 새들을 사냥하며 시간을 보내고, 젊은 울리히는 골짜기까지 건너가서 멀리서나마 주인집 딸을 생각하며 마을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곤 한다. 밤에는 카드놀이, 주사위놀이, 도미노 등을 한다. 재미를 돋우려고 사소한 물건을 걸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눈은 나흘 동안 계속 내렸다. 그때부터 그들은 죄수처럼 갇혔다. 이따금 노인은 총을 들고 영양을 찾아 나섰다. 그날도 노인은 사냥을 하러 집을 나갔다. 영하 18도였다. 오후 네 시쯤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울리히는 개와 함께 노인을 찾아 나섰다. 며칠 동안 눈 속을 찾아 헤맸지만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죽을 고생을 하고 산장으로 되돌아왔다. 피로가 누적되었던 울리히는 오랫동안 잠을 잤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잠을 깼다. 아무도 없었다. 노인의 영혼이 찾아와 부른 소리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울리히는 밤마다 환청에 시달렸다. 문을 닫아걸고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개도 주인의 목소리가 향하는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미친 듯이 짖어댔다. 울리히는 공포를 잊기 위해 매일 술을 마셨다. 보관하던 술도 바닥났다. 개도 주인을 따라 미쳐갔다. 문을 발톱으로 긁고 이빨로 갉아댔다. 날이 갈수록 공포감은 더욱더 증폭되었다. 마침내 울리히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겁쟁이처럼 문을 열어젖혔다. 자신을 부르는 이가 누군지 알아보고 그를 강제로 몰아낼 작정이었다. 그때, 개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울리히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울리히는 밖에서 누군가 울부짖으며 벽을 긁고 있는 걸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인은 집 안에서 공포에 휩싸여 결사적으로 방어벽을 쳤다. 개는 집 밖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벗어나고자 벽을 긁었다. 밖에 있는 개는 음산한 소리를 질러댔고, 울리히는 그와 유사한 신음소리로 응대했다. 벽을 사이에 둔 결사항전이었다. 마침내, 겨울이 끝나고 산장 가족들이 돌아왔다. 문 밖에는 개가 독수리에게 몸을 뜯긴 채 빼만 남아 있었다. 문을 부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쓰러진 찬장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어깨를 덮고 있었고,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다. 울리히였다. 의사는 그가 미쳤다고 진단했다. 산장 주인의 딸은 그 해 여름에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사람들은 산의 찬 기운이 그 원인이라고 말했다.… 알프스 산장을 지키는 안내인이 겨울을 홀로 나는 이야기다. 둘이 있을 땐 외로움과 무서움을 모른다. 혼자가 되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한다. 어디를 보든 백일색이다. 살아 있는 것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고요와 적막이 골짜기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외로움에 집중하면 고요한 적막에서도 무서움을 찾아낸다. 죽은 영혼이 찾아오지 않을까 해서 경계심을 가질수록 자질구레한 자연의 소리마저 두려움의 대상이다. 보이지 않는 어둠이 공포로 다가온다. 술로 공포를 잊으려 하지만 심신만 피폐해진다. 인간은 사람 사이에 있을 때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혼자 있을 땐, 혼자라는 사실만으로도 공포를 느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오철환(문인)

신발이거나 아니거나

신발이거나 아니거나 박명숙 저것은 구름이라, 한 켤레 먹구름이라/ 허둥지둥 달아나다 벗겨진 시간이라/ 흐르는 만경창파에 사로잡힌 나막신이라 혼비백산 내던져진, 다시는 신지 못할/ 문수도 잴 수 없는 헌신짝 같은 섬이라/ 누구도 닿을 수 없는 한 켤레 먹구름이라.......................................................................................................................박명숙은 대구 출생으로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은빛 소나기』『어머니와 어머니가』『그늘의 문장』과 시조선집으로 『찔레꽃 수제비』등이 있다. 1990년대 전반에 등장한 탁월한 시인들로 박권숙, 이종문, 이달균 등을 들 때 박명숙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그의 시 세계는 개성적이기 때문이다.‘신발이거나 아니거나’는 독자에게 친절한 시는 아니다. 지나치게 자상한 시는 금방 식상할 수 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가 않다. 신발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 대상을 두고 시의 화자는 대뜸 저것은 구름이라 한 켤레 먹구름이라고 진술한다. 신발이 돌연 구름이 되고, 그것도 한 켤레 먹구름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허둥지둥 달아나다 벗겨진 시간이기도 하다. 또 다시 훌쩍 공간 이동을 하여 흐르는 만경창파에 사로잡힌 나막신이 된다. 연이어서 혼비백산 내던져진, 다시는 신지 못할 문수도 잴 수 없는 헌신짝 같은 섬이기도 하다. 그리고 끝으로 결론짓는다. 누구도 닿을 수 없는 한 켤레 먹구름이라고. 제목부터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도입한 이후 시종일관 확장은유를 원용하여 해득이 불가능한 상상력의 육화, 낯선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새로운 시의 한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다. 한 켤레 먹구름, 벗겨진 시간, 헌신짝 같은 섬 등과 같은 개성적인 구절들이 서로 맞물려서 미묘한 정서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심금을 울리는 점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로 ‘신발이거나 아니거나’는 신들려서 쓴 듯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 시의 주제나 메시지가 무얼까 하고 굳이 매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직이 읊조리면서 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리라 생각된다.그의 다른 시편으로 ‘어린이날’이 있다. 뜻밖의 반전이 있는 작품이다. 말이며 눈빛이며 주고받기도 무심한 날 텅 빈 동네 놀이터에서 시소 타는 노부부에게 어린이날은 그다지 외로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날이다. 기운이 철철 넘치거나 생기발랄할 수 없는 연조이기에 노부부 사이에 뜨거운 정담이 오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두 사람이 비교적 건강한 가운데 함께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문짝 나간 버스 같은 허술한 가슴으로 젊은 날 추억들이 무임승차를 하는 날에 그 추억들을 곱씹으면서 바람에 눈을 헹구며 시소를 탄다. 이런 어린이날을 두고 시의 화자는 노인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 쓸쓸하고 서글픈 정경이다.그의 또 다른 작품에 ‘드므’가 있다. 불가해한 일면을 가진 시다. 두려웠다, 거기도 내 얼굴이 남아 있었다, 라는 첫머리가 섬뜩하다. 내 얼굴이 거기에도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시의 화자에게는 적잖은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그 얼굴은 천길 물속을 타고 오른 일그러진 두 눈빛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석양이 피를 길어내며 그 눈빛을 끄고 있었기에 달아날 수가 없었고, 불길에 휩싸인 채로 물길에 감긴 그대로 독 안에 든 시간이었다, 라고 진술한다. 끝으로‘드므’는 한 역할을 한다. 즉 얼굴에 기록된 죄들을 드므가 씻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므’는 많은 내용을 함유하고 있지만,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 자기반성, 내적 성찰의 깊이가 특유의 시어들과 만나 새로운 미학적 세계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때로 고즈넉한 혼자만의 골방에서 며칠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때 불현듯 ‘신발이거나 아니거나’, ‘어린이날’, ‘드므’와 같은 비범한 시편을 얻게 되지 않을까.이정환(시조 시인)

가랑비

가랑비 하종오자주 님께서는 어디론가 갔다 오시고, 그럴 적마다 봄빛은 누리에 더 들어찹니다. 이상합니다. 님께서 아니 계실 때, 개구리들이 나오고 수로에는 새끼 고기들이 몰려 놉니다. 저는 둔덕에 불 질러 마른 풀 태우면서 해충 알이 죽기를 바라고, 또 지난해 떨어져 있다가 더러 새들에게 쪼아 먹히고 남은 곡식 알갱이가 올해에는 돋아나 제게 걷히기를 바랍니다. 무릇 사람을 위하여 사라지지 않는 미물은 없지만 사람은 함부로 미물을 위하여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 자신을 통해 깨칩니다. 새삼스럽게 깨칠 때, 재 덮인 둔덕에서 가느다란 연기 몇 줄기가 피어올랐다가 공중에서 흩어집니다. 아하, 불현듯 가리사니가 생깁니다. 님께서는 며칠씩 어딘가를 가시면 거기에서 저처럼 행하시고 돌아오시는군요. 그러니 님께서 아무 연락이 없으셔도 먼데서부터 봄빛이 어리다가 하늘까지 차올라 파랗지요. 님께서 아니 계실 때, 나무들은 움틔우고 등성으로 철새들은 날아옵니다. 이 무렵에 오는 비도 산에 들에부터 조심조심 잘게 옵니다. 이것도 그 사연 때문입니까? 이제 님께서는 제 곁에서 영영 떠나셔도 좋습니다.『님 시편』 (민음사, 1994).................................................................................................................... 님은 단순한 접미사에서 명사, 대명사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광범위하게 쓰인다. 님의 역사는 길고도 끈질기다. 고대시가 ‘공무도하가’에서 고려가요 ‘가시리’, 조선조 왕방연의 시조 ‘고운님 여의옵고’, 송강 정철의 가사 ‘사미인곡’,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이르기까지 님은 우리 민족의 문학사를 거의 관통하고 있다. 최근 사이버 공간에선 상대방이나 제삼자를 가리지 않는 범용 대명사로 광범위하게 쓰인다. 하종오 시인은 님을 모시고 시편까지 엮은 터라 ‘님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법하다. 산문시 「가랑비」의 님은 종교적인 신이라기 보단 관념상의 절대자 내지 자연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봄빛이 온 누리에 가득차고, 가느다란 가랑비가 내린다. 개울 어귀에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기지개를 켜고 물뱀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겨울동안 얼어붙었던 물길이 풀리고 시냇물이 졸졸 소리를 내면 갓 눈 뜬 어린 물고기도 세상 구경을 나온다. 님은 볼 일 보러 갔나 보다. 님이 없어도 제각기 제 할 일을 알아서 잘 한다. 시인은 밭두렁에 불을 질러 마른 풀을 태운다. 풀 섶에 깐 해충 알을 소각한다. 해충은 태워 없애지만 참깨씨알이나 콩알 등 남은 곡식 알갱이는 살아남아 소출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해충은 곡식의 포식자인 관계로 식량을 축내는 인간의 경쟁자이다. 자신이 해충이라고 불리는 걸 안다면 벌레가 퍽 억울해 할 것 같다. 벌레도 아마 고통을 느낄 것이다. 알 상태로 죄 없이 미리 화장당하는 해충의 신세가 가엾다. 인간을 기준으로 인간이 판단하여 어떤 생명체는 박멸하고 어떤 생명체는 보존한다. 그 정당성이 의심스럽다. 생명은 모두 존귀하다는 진리를 깨친다. 둔덕 위로 피어오른 한줄기 연기가 하늘가에서 스러진다. 시인은 깨달음을 얻는다. 님은 다른 곳에서 같은 일을 한다. 봄빛이 차올라 하늘까지 닿았다. 하늘이 파랗다.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가지마다 처녀의 젖 망울 마냥 연초록 새순이 살포시 터진다. 소년은 연한 가지를 골라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며 봄날을 맞이한다. 산등성이를 넘어온 철새들이 피리소리에 맞춰 공중곡예를 한다. 가랑비가 산과 들을 살짝 적신다. 님은 안 계시지만 봄은 완연하다. 이젠 님은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다부진 홀로서기 선언이다. 오철환(문인)

장미와 가시

장미와 가시김승희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오.//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미래사, 1991).................................................................................................................계절의 여왕이 5월이라면 꽃의 여왕은 장미꽃이다. 꽃의 여왕 장미꽃이 5월에 피기 때문에 5월이 계절의 여왕에 등극한 건지도 모른다. 그게 뭣이든 이름값 하기가 쉽지 않지만 장미꽃은 역시 장미꽃이다. 담장에 만개한 장미꽃을 보노라면 절로 입이 벌어지고 발길이 머문다. 장미엔 가시가 있다. 신이 준 교훈이다. 허나 시인은 루틴한 은유의 틀을 깬다.빈손으로 세상에 나와서 지금까지 부지런히 살아왔다. 삶이 험하고 힘들더라도 열심히 살다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오리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어려움을 참고 극복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남들도 다 그러려니 했다. 인생이 고해라지만 마음의 짐을 다 내려놓으면 가벼워지기 마련이고, 고통의 바다를 헤엄쳐 가다보면 쉴 수 있는 섬이라도 나올 터이다. 앞만 보고 꿋꿋이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다. 비록 어렵고 괴롭더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니. 이 고통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 기쁨도 찾아오겠지.세상살이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비슷할 거라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삶의 본모습을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으니, 인간은 기껏 눈먼 장님이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여기저기 더듬어 본다. 그러다 보면 차차 코끼리의 실체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시인은 삶을 장미라 생각한다. 세상살이는 눈먼 손으로 장미를 만지는 일이다. 삶을 모르는 시인은 눈 먼 장님이다. 손끝으로 느끼는 삶은 온통 가시투성이다. 그토록 가시가 많을 걸 보니 아름다운 장미꽃이 많이 필 것을 기대하였다. 그래서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는 고통과 아픔을 참아내곤 했다. 장미꽃으로 그 보상이 주어진다 해도 가시는 가시다. 그렇지만 장미꽃을 상상하며 가시의 날카로운 아픔을 견뎌냈다. 살만큼 살면서 뾰족한 가시에 질리도록 찔렸다.참고 또 참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즐거운 날이 온다는 푸시킨 시인의 말을 믿고 싶다. 삶에 무릎 꿇고 싶지 않다. 안 참으면 또 어떡할 것인가. 참을 수밖에 없는 외길 인생이다. 절망의 결과가 두렵다. 희망을 믿고 절대자에 의지하는 것이 약한 인간이다. 하지만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이젠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다. 삶을 정리해도 크게 억울하지 않을 때다. 가시에 무수히 찔리면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니 이젠 인생을 알아도 좋을 때가 아닌가. 삶을 관장하는 절대자에게 묻고 싶다.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장미꽃이 피는 가시 있는 장미인가, 장미꽃이 피지 않는 가시만 있는 장미인가. 아니면 장미꽃만 피는 장미와 장미가시만 무성한 장미로 삶을 숙명처럼 갈라놓은 것인가. 이젠 정말 그것이 알고 싶다.오철환(문인)

문향만리…연필

연필김소해붉은 입술 그보다 붉어 조용한 검은 입술/ 함부로는 아니지만 입을 열면 소나긴 듯/ 백지를/ 적시는 고백/ 백년이든 읽겠습니다-단시조집, 『대장장이 딸』(작가, 2020)김소해는 경남 남해 출생으로 1983년 현대시조 추천완료 후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투승점을 찍다』『만 권인 줄 몰랐다』와 시조선집 『하늘빗장』, 단시조집 『대장장이 딸』등이 있다. 그의 시조는 단아한 서정과 더불어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발화를 보인다. 시 자체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삶의 방향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형상화하기도 한다. 웅숭깊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사람살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비유와 주제의식의 발현으로 공감대를 넓히기도 한다.근간에 시조공동체가 더불어 힘쓰고 있는 많은 일들은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 되고 있다. 다만 시조문단에서만 그것을 알 뿐 외부사회는 여전히 무관심하다. 선조가 물려준 정신적 문화유산 가운데 시조만한 것이 얼마나 더 있을까? 또 그 일을 위해서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김소해 시인, 그가 그 일익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문청 시절에 유독 잘 찢어지는 갱지에 향나무 연필로 시를 즐겨 썼던 기억이 있다. 흑연 냄새와 나무 향기가 나는 연필이 시를 더 잘 쓰게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연필로 시 쓰기를 즐겼던 것이다. 이처럼 연필은 글 쓰는 이에게는 설렘의 대상이다. 잘 깎아놓은 향기로운 연필을 보면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백지에 새로운 시 한 편을 펼쳐보고자 하는 창작 욕망이다. 시의 화자는 붉은 입술 그보다 붉어 조용한 검은 입술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검은 입술이라니! 무언가 도전적이지 않는가. 참신한 비유가 시의 품격을 높인다. 함부로는 아니지만 입을 열면 소나긴 듯, 에서 보듯 소나기가 등장한 것은 시인의 작업에 불이 붙었다 것을 의미한다. 연필 끝으로 내리꽂히는 시의 빗줄기를 맞을 준비가 된 것이다. 마침내 백지를 적시는 고백이기에 백년이든 읽겠습니다, 라고 작정하듯이 말한다. 어찌 천년인들 못 읽겠는가.그는 또 다른 단시조‘대장장이 딸’에서 사랑을 훔치려다 불을 훔치고 말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정작 얻으려고 한 것은 사랑인데 불을 훔친 것이다. 무쇠 시우쇠, 조선낫을 얻기까지 숯덩이 사르는 불꽃 명치 아래 풀무질은 종생토록 다함이 없을 것이다. 시인은 대장장이이자 대장장이의 딸이기도 하다. 조선낫을 얻기까지, 한 편의 시를 얻기까지 풀무질을 결코 한시도 쉴 수가 없다. 그러한 강렬한 창작의지의 발현이 곧 ‘대장장이 딸’이다. ‘연필’과 연계해서 읽으면 그 뜻이 더 깊어질 것이다.앞에서 보다시피 그의 시조는 참신하다. 낡지 않다. 예측 불허의 결구를 통해 반전의 묘미를 드러내기도 하고, 따뜻한 인간애를 탐구한다. 그의 단시조는 하나의 전범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언어미학적 성취와 함께 도저한 깊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시조를 신앙처럼 받들며 살고 있기에 이만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시조를 통해 백년만의 고백, 백년의 고백을 거듭한다. 자신과 당대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시조로 부단히 표출한다. 진정으로 미쁘게 여기고 있는 세상을 향한 답신이자 시조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그의 빛나는 시조 인생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이정환(시조 시인)

문향만리…학

학황순원∼전쟁의 비극은 이제 그만∼… 6·25전쟁이 발발한 해 늦가을이다. 국군의 진격으로 수복된 3·8선 접경 북쪽 마을이 그 배경이다. 성삼은 전쟁 이태 전에 3·8선 접경 남쪽마을로 이사하였다. 전쟁 발발 후 남쪽으로 피난 갔다가 치안대원으로 고향마을에 돌아왔다. 고향마을에 들어서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지만 지금의 고향은 옛날의 고향이 아니다. 전쟁이 한차례 휩쓸고 간 마을은 삭막하다. 죽마고우 덕재가 농민동맹 부위원장을 맡은 죄로 잡혀왔다. 성삼은 덕재를 호송하는 일을 자청한다. 두 사람은 담 모퉁이에서 호박잎 담배를 나눠 피고 밤 서리를 같이 하던 단짝동무다. 그 동안 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 서로에게 물어본다. 상대의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는 반응에 성삼의 마음이 열린다. 빈농에 근농이라 농민동맹 부위원장직을 맡았다고 한다. 함께 놀려먹었던 꼬맹이와 결혼했단다. 피난을 안 간 이유가 농토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덕재의 말에 성삼은 같은 경험을 해본 농민의 자식으로서 공감한다. 덕재가 이념과 무관한 농민이라는 사실에 성삼은 단짝동무로서의 신뢰를 회복한다. 고개를 내려온 곳에서 성삼은 주춤 발걸음을 멈춘다. 전쟁 통에도 전처럼 평화롭게 살고 있는 학 떼를 본다. 열 두어 살 때 성삼은 덕재와 같이 학을 잡아 애완동물처럼 갖고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서 누가 학을 쏘러 왔다는 말을 듣고 학을 풀어 주었다. 그 옛날 일을 생각하던 성삼이 학 사냥을 하고 가지며 덕재의 포승줄을 풀어준다. 어리둥절해 하던 덕재는 성삼의 의도를 깨달은 듯 잡풀 새를 기어 도망한다. 높푸른 하늘엔 단정학이 유유히 날고 있었다.…순박한 이웃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보통사람을 살인자로 만든다. 군복을 입거나 완장을 차고 죄의식 없이 저지른 살인이라고 괜찮은 건 아니다. 전쟁은 신뢰를 무너뜨리고 파멸을 낳는 악마적 이벤트다. 신봉하는 이념을 실현시켜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야욕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전쟁을 없애야 무모한 집단 살인을 막는다. 다시는 참혹한 전쟁이 재발되지 않도록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은 작가의 영역이기도 하다. 「학」에서 추구하는 테마다. 한편의 감동적인 문학작품이 총칼이나 사자후보다 더 효과적이다.동족상잔의 비극이 적으로 만난 단짝친구의 얄궂은 운명으로 구체화된다. 어린 시절 추억을 공유한 두 사람이 본인의 의사와 달리 적이 되어 고향마을에서 조우한다. 사는 곳이 남북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던 이유로 적이 되었다. 다른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적의 없는 친구를 포로로 잡았다. 전쟁이 지나간 고향마을은 옛날 고향마을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살벌한 분위기다. 동네어른들도 치안대원인 성삼을 만나면 엉거주춤 뒷짐을 진 채 성삼의 눈치부터 살핀다. 고향의 산천과 들판은 비록 변함이 없지만 이웃 간의 정과 믿음이 무너졌다. 고향의 푸근함과 고향사람의 정감이 사라졌다. 도망가도록 풀어주었지만 총을 쏠까 봐 눈치를 보았다. 죽마고우마저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이 아이러니컬하다. 성삼도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풀려난 덕재가 도리어 성삼을 해코지하는 상황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전쟁터에선 상대방을 죽여야만 내가 산다. 한창 전쟁 중에 적군을 믿기엔 세상이 너무 뒤숭숭하다. 포승줄을 풀어주고 또 숨어서 도망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학을 살리려고 하늘로 날려 보내던 해맑은 휴머니즘을 본다. 사랑과 믿음을 간직하는 한 희망은 있다. 오철환(문인)

문향 만리…쇠뜨기

쇠뜨기 최화수꽃도 아닌 네가 열매도 아닌 네가/ 소수서원 바깥 뜰 돌확을 확, 점령해/ 여봐라! 주인 행세하네/ 이런 일은 처음이야뿌리 채 뽑혀나가 변방만 돌던 네가/ 쇠심줄 같은 근성으로 양반가를 움키다니/ 천지가 뒤집혔구나/ 참, 당차다 네 권속-『시조시학』(2019, 가을호) 최화수는 2011년《시조시학》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풀빛 엽서』『미완의 언약』과 동시조집 『파프리카 사우르스』와 시조선집 『바람을 땋다』(우리 시대 현대시조선 139, 고요아침) 등이 있다. 그는 시조로 등단하여 동시조집까지 출간하여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의욕을 보이면서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 중이다. 다소 늦은 등단은 그에게는 조금의 장애요소도 되지 못한다. 미술을 전공한 시인으로서 작품마다 색채감각이 잘 배어 있어 읽는 맛을 더한다. 남다른 언어감각으로 정서적 파동을 이미지화하는데 솜씨를 보인다. 쇠뜨기는 양치식물들로 이루어진 속새과에 속하는 다년생 풀이다. 소가 잘 뜯어 먹어 쇠뜨기라고 부르며, 포자낭이 달리기 전의 어린 생식줄기를 뱀밥이라 한다. 땅위 줄기의 두 종류 중 하나는 포자를 만드는 생식줄기이며, 다른 하나는 포자를 형성하지 않는 영양줄기다. 영양줄기는 마디마다 많은 가지들이 달려 마치 우산을 펴놓은 것처럼 보인다. 양지바른 풀밭이나 개울가에 흔히 자란다. 양치식물인 쇠뜨기는 종자식물과 달리 씨앗이 없고 대신 포자로 번식한다. 생식줄기 끝에 육각형의 포자 잎들이 모여 뱀의 머리처럼 생긴 포자수를 이룬다. 포자 잎 밑에 포자낭이 달려 있다. 포자에는 네 개의 탄사가 있어 멀리 퍼진다. 이런 특성을 가진 쇠뜨기는 오래 전부터 적잖은 시인들이 시로 썼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큰 감흥을 주기 어렵다. 그의‘쇠뜨기’는 쇠뜨기에 대한 오랜 관찰과 숙고 끝에 나온 시편이고 굉장히 역동적이다. 꽃도 아닌 네가 열매도 아닌 네가 소수서원 바깥 뜰 돌확을 확, 점령한 채로 여봐라, 라고 주인 행세를 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기에 적이 놀라고 있다. 더구나 뿌리 채 뽑혀나가 변방만 돌던 쇠뜨기가 쇠심줄 같은 근성으로 양반가를 움킨 것이 사뭇 도발적이어서 기가 막힌 표정이다. 그래서 천지가 뒤집혔구나 참 당차다 네 권속, 이라고 쇠뜨기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한 것이다. 쇠뜨기를 이렇게 의미부여하여 아름다운 시로 빚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쇠뜨기’는 자존감을 크게 가질만하겠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쇠뜨기가 냉큼 점령한 곳이다. 장소 설정이 시에서 중요한 만큼 그곳이 어딘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 바깥 뜰 돌확이다. 소수서원은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 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이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유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설립한 후 1543년 유생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다.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야말로 쇠뜨기의 돌발 행동은 소수서원의 반란, 이라 일컬어도 되겠다. 그곳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뿌리 채 뽑혀나가 변방만 떠돌던 쇠뜨기가 쇠심줄 같은 근성으로 양반가를 움켜잡은 것이다. 당찬 권속이다. 어쩌면 이러한 끈질긴 권속이 이 나라를 견인해온 힘이 아니었을까? 시인의 시각이 꽤나 예리하여 전율이 일어날 정도다. 이정환(시조 시인)

버려진 병

버려진 병이하석바람 불어 와 신문지와 비닐 조각 날리고/깊은 세계 속에 잠든 먼지 일으켜 놓고/사라진다, 도꼬마리 대궁이 밑 반짝이는/유리 조각에 긁히며. 풀들이 감춘 어둠 속/여름은 뜨거운 쇠 무더기에서 되살아난다./녹물 흘러, 붉고 푸른, 뜨겁고/고요한 죽음의 그늘 쌓은 채.//목마른 코카콜라 빈 병, 땅에 꽂힌 채/풀과 함께 기울어져 있다, 먼지와 쇠 조각들에 스치며/이지러진 알파벳 흙 속에 감추며./바람 빈 병을 스쳐갈 때/병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끊임없이/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휘파람처럼 풀들의 귀를 간질이며./풀들 흘리는 땀으로 후줄그레한 들판에/바람도 코카콜라 병 근처에서는 목이 마르고.//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와/콜라 병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쓰러진다. 풀들 그 위를 덮고/흙들 그 속을 채워, 병들은 침묵한다,/어느덧 묵묵한 흙무더기로 속을 감추면서.『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신문지와 비닐 조각이 바람에 날린다. 중력에 취해 엎드려 자던 먼지를 들쑤셔놓곤 바람은 또 어디론가 가버린다. 상흔으로 얼룩진 창이자 대궁 밑엔 깨진 유리조각이 햇빛에 아가리를 벌리고, 풀 섶 아래 버려진 쇳조각 더미가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받아 달아오른다. 단 쇠 무더기에서 붉고 푸른 녹물이 눅진하고 침묵의 사신이 잔뜩 독을 품는다. 코카콜라 빈병이 풀 옆 땅바닥에 비스듬히 꽂혀 있다. 쇳조각에 긁히고 먼지로 덮여 알파벳마저 분명하지 않은 빈병이 흙 속에 묻혀 가시처럼 눈에 꽂힌다. 바람이 스쳐갈 때마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변명 같기도 하고, 구원을 청하는 말 같기도 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성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풀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휘파람을 분다. 들판은 풀들이 머금은 물방울로 습하지만 빈병 근처엔 바람마저 목이 마르다. 빈병은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에게 뭐라고 계속 웅얼거리지만 바람은 못들은 척 차갑게 외면한다. 왕따 당한 빈병은 바람에 쓰러진다. 풀들이 그 위를 덮치고 빈병 속에 흙이 채워진다. 마침내 빈병은 말을 멈춘다. 또 세월이 흐르겠지만 빈병은 말없이 묵묵히 흙무더기 속에 모습만 감출 뿐이다.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77억 명을 넘어섰다. 그 많은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통에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스웨덴의 극단적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느닷없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본능적 위기감에 기인한다.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역병도 지구가 몸살을 앓는 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시인은 대표적인 환경파괴의 원흉으로 유리병과 비닐 그리고 폐철을 꼽는다. 유리병이나 비닐은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 많은 난관이 있고 오랜 세월이 걸린다. 당장 서둘러도 늦다. 그런데도 남 탓만 하고 눈치만 본다. 환경문제에 대한 해답을 인류문명의 근본적 성찰에서 구하는 시인의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이하석 시인을 ‘광물적 상상력’을 가진 ‘자연친화적’이고 ‘문명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시인으로 평가한다. ‘광물적 상상력’이 인간 중심적 사고를 거부하고 생명의 유무를 떠나 만물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상상력을 의미한다면, ‘자연친화적’이란 말이 휴머니즘의 부인을 통한 자연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면, ‘문명 비판적’이라는 말이 인간이 추상과 관념으로 쌓아올린 모더니즘의 주관적 시각을 거두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관점을 의미한다면, 버려진 폐기물의 저주받은 일생을 노래한 「버려진 병」은 자연친화적 문명 비판적인 광물적 상상력이다. 오철환(문인)

갈대

갈대 조기섭달이 뜨는/ 언덕에서/ 흰머리를 설레고 있었습니다/ 모진 세월에 바래인/ 순백의 머리칼을/ 조용히 빗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운 이름들/ 이제는 소원히/ 영(嶺)을 넘고,/ 아무것도 소망할 수 없는/ 잎 다 진 계절의/ 빈 언덕 길,/ 세월에 바래인 영혼 하나/ 나즉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시인의 마을』 (화니콤, 2009).................................................................................................................... 갈대는 사람 키보다 큰 다년초 식물로 강가나 호숫가 또는 개울가 등 습지에 군락을 지어 자생한다. 갈대라고 하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이는 갈대의 약한 모습을 은유한 표현이다. 인간은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사유함으로써 비로소 위대하다는 진리를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명언이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제3막 아리아에서 만토나 공작이 부른 칸초네 ‘여자의 마음’에 나오는 갈대도 유명세를 탄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이라 노래했다. 이 노랫말도 파스칼의 명언 못지않게 친숙하다. 또 대중가요 가수 박일남이 불러 유행시킨 ‘갈대의 순정’도 뺄 수 없다. 남자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한 메타포가 특이하다. 여자와 남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다는 비유는 갈대가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속성에 착안한 은유다. 여자의 마음도 갈대, 남자의 마음도 갈대,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명제로 귀결되는 억지춘향이 우습다. 무리지어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갈대는 바람에 쉽게 휘어지긴 하지만 잘 꺾이진 않는다. 이러한 갈대의 강인한 모습을 인상 깊게 지켜본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갈대의 메타포가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그 상징성이 만인의 공감을 사기 때문이다. 바람에 잘 흔들리는 특징 외에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듯 보이는 자연스럽고 의연한 갈대의 자태도 주목 대상이다. 갈대를 평화로운 풍경이나 한가로운 정경으로 차용한 경우가 그러하다. 김소월 시인은 갈잎의 평화롭고 한가로운 느낌을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서 잘 살려내었다. 갈대꽃 무리가 한 줄기 바람에 술렁인다. 언덕위에 뜬 달이 시인의 흰머리를 희롱한다. 시인이 갈대가 되고 갈대가 시인이 된다. 바람에 수군대는 갈대가 시를 읊고 시인은 갈대가 쓴 시에 화답한다. 조기섭 시인은 달빛 아래 일렁이는 희뿌연 갈대꽃의 향연을 보면서 우탁 시인의 백발을 본다. 백발가를 읊조린다. ‘한손에 막대 들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오랜 세월 햇살에 바래인 듯 희뿌옇게 일렁이는 갈대꽃은 모진 세월을 겪은 백발의 화신이다. 마음은 청춘인데, 검디검던 머리칼이 언제 하얗게 쇤 것인지. 이제 겨우 인생을 알 듯 하건만 머리엔 서리가 내리고 서녘 하늘엔 해가 저문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더니 어느 듯 가슴속 깊숙이 들어와 앉았다. 돌아올 수 없는 고개를 넘어 멀리 가버린 얼굴들이 그립다. 가기 전에 원 없이 사랑하고, 있을 때 잘 해 줄 걸. 소중한 만남에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에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돌아보면 무상하고, 숨 한 번 몰아쉬면 공으로 돌아가건만, 헛된 상념이 왜 그리도 많았던가. 아직 못 다한 말들이 남았는데 벌써 눈 어둡고 머릿속이 하얗게 쇠니 때늦은 깨달음에 백발이 어지럽다. 시인의 가르침이 귓전에 쟁쟁하다. 문득 고개 들어 먼 산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랜다. 오철환(문인)

문향 만리…시가 피다

시가 피다두마리아귤 한 상자 주문했는데 봄이 실려 왔다살짝 무임승차한 몽우리 진 동백/ 섬 시인 쪽빛 시심을/ 이 아침에 받아적네-『좋은시조』(2019, 여름호)...................................................................................................................두마리아는 서울 출생으로 2017년 『좋은시조』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유심시조 아카데미에서 활동하고 있다.지금 제주는 봄빛이 한창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제주라는 섬이 있어 나라를 나라답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 때가 있다. 더구나 요즘과 같이 외국으로 나가는 길이 끊긴 상황에서 제주는 우리가 기댈 휴양지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광객이 없어서 썰렁하기까지 했지만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여유가 생기면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제주의 자연은 그 자체가 박물관이다. 평화의 섬 제주의 빼어난 절경은 그 어느 미술작품보다 뛰어난 가치를 지닌다. 제주의 미적 현현을 어찌 필설로 다 형용하랴.‘시가 피다’는 소박한 노래다. 생활 속의 작은 이야기가 한 편의 단시조로 빚어진 것이다. 시는 이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귤 한 상자를 주문했는데 봄이 실려 왔다고 한다. 향기로운 귤만 온 것이 아니라 제주의 봄이 복닥거리는 서울로 배달되어 온 것이다. 이따금 제주 사람들은 지인에게 택배를 보낼 때 상자에 귤을 채운 다음 꽃 한 송이를 함께 실어 보낼 때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살짝 무임승차한 몽우리 진 동백이 등장한 것이다.활짝 피지 않았으므로 꽃병에 꽂아두면 얼마 있지 않아 만개할 것이다. 시의 화자는 그것을 두고 섬 시인 쪽빛 시심, 이라고 말하면서 아침에 온전히 받아 적고 있노라고 나직이 읊조린다. 참 정갈하다. 시가 어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우리 가까이에 있다. 무심코 지나쳐서 그렇지 삶의 현장 곳곳에 시가 도사리고 앉아 있어 우리가 찾아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그는 ‘모델’이라는 단시조에서 웃음이 귀한 시절에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이파리 위로 배추밭에 꼬물 구멍 숭숭 배추 서너 단이 있는데 그것을 내다파는 아주머니가 자신 있게 하는 말이 눈길을 끈다. 입말을 생생하게 살려서 약 한나도 안 쳤슈, 봐 벌레도 있잖여, 라고 목청껏 외치면서 사갈 것을 권한다. 거기다가 무공해 전속 모델유, 야가!, 라고 하니 그 유머 감각이 재치만점이다. 좌판 아줌니 넉살은 백단이니 어찌 사가지 않을 텐가. 난전은 이렇듯 사람 사는 맛을 내는 곳이다. 어렵게 좌판을 펴놓고 있지만 궁색하지가 않다. 환한 햇빛과 바람 속에서 생기가 넘쳐나고 때로 웃음꽃을 피우게 한다.시조에서 재치와 해학의 세계를 추구하는 일군의 시인이 있다. 이제 그도 그 일군에 합류하여 웃음을 제공하는 시편들을 많이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재치와 해학은 아무나 해낼 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딱 적격인 시인이 새로 등장한 것이다. 제주를 노래한 시인은 아주 많다. 그 중에서도 이생진 시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설교하는 바다’에서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라면서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라고 노래하기도 하고 ‘만년필’에서는 성산포에서는 관광으로 온 젊은 사원 하나가 만년필에 바닷물을 담고 있다, 라고 노래한다. 제주를 온몸으로 체험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생생한 이미지가 탄생할 수 없을 것이다.‘시가 피다’의 시인도 앞으로 더 많이 제주를 노래하기를 기대한다. 문득 제주의 파도소리와 봄빛, 수선화가 보고 싶은 아침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바위

바위 김동리∼어머니의 사랑은 적수가 없다∼…술이네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술이 그렇게 세 식구다. 술이네 집에 불행이 찾아들었다. 어머니가 나병에 걸린다. 나병을 고치려고 전 재산을 탕진했지만 낫지 않았다. 결국 술이네는 마을에서 쫓겨난다. 장가 밑천마저 날린 술이는 집을 나간다. 아버지는 비상이 든 찰떡을 어머니에게 준다. 그 사실을 알고도 눈물을 흘리며 떡을 먹지만 곧 토해낸다. 마침내 아버지도 집을 나간다. 그녀는 절망감에 휩싸여 아들을 찾아 헤맨다. 기차다리 근처까지 갔다. 그곳엔 병신, 거지, 문둥병자 등이 토막을 짓고 기거하고 있다. 그녀도 토막을 짓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갈 곳이 없는 데다 가까운 곳에 복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소원을 빌면서 복바위에 돌을 갈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속설이 있다. 그녀는 매일 소원을 빌며 복바위에 돌을 갈았다.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복바위의 영험한 신통력 덕분인지 그녀는 장터에서 아들을 만난다. 허나 아들은 돈을 벌어 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다시 떠난다. 그녀는 아들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면서 돌을 갈았다. 그래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밤에만 갈아서 그런가 생각하고 낮에 가서 갈았다. 그러다가 마을사람들에게 들켜 죽도록 맞았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장터에서 아들의 옥살이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졌다. 한편, 땅주인은 그녀를 쫓아내려고 토막에 불을 질렀다. 불타는 토막을 참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날 밤, 그녀는 복바위를 껴안고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침을 뱉으며 말했다. “더러운 게 하필 예서 죽었노.” “문둥이가 복바위를 안고 죽었네.” “아까운 바위를…….” 그녀의 얼굴엔 눈물이 번질번질 말라 있었다.…나병에 걸린 어머니가 주인공이다. 나병은 얼굴과 손발이 뭉개지는 증상으로 인해 그 비주얼이 끔찍하다. 그래서 나병은 모든 병중에 가장 두려워하는 질환이다. 어머니에게 천형을 씌운 것은 어쩌면 시험적 호기심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극단적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숨어있다. 살이 썩어문드러지는데다 이웃사람들의 지독한 편견과 무자비한 학대로 삶이 온통 해체되는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는 오직 일편단심 자식뿐이다. 아들을 만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처절하게 돌을 간다. 어머니의 소원은 나병을 치유하는 것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도 아니다. 아들을 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다. 나병도 어머니를 막을 수 없다.노거수나 바위를 신령시하는 토속신앙은 서민들 삶 속에 녹아있다. 오방색 띠를 두른 고목이 버티고 있고 그 주변에 돌무지와 서낭당이 있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거석신앙도 뿌리 깊은 토속신앙이다. 큰 바위 주변엔 흔히 돌무지가 흩어져 있다. 편평한 바위 턱마다 돌들이 얹혀 있기 일쑤다. 큰 바위 밑 틈새엔 촛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다. ‘복바위 전설’은 도처에 퍼져 있다. 돌을 갈아 바위에 붙이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속설이 새롭진 않다. 아무것도 없는 서민들의 의지 대상은 부담 없이 비빌 수 있는 바위나 노거수밖에 없다. 근거 없는 맹랑한 속설이지만 거기에라도 기대어서 버텨보자는 거다. 복바위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그렇지만 아들이 감옥에 있다는 말에 마지막 기대마저 스러진다. 설상가상 토막마저 불탄다. 더 이상 비빌 언덕이 없다. 희망이 사라지면 삶도 없다. 어머니는 바위 위에 엎드려 죽는다. 어머니의 얼굴은 편안하다. 복바위가 아들을 돌봐줄 걸 믿는 까닭이다. 아들을 위해 소원을 빌면서 바위에 얼굴을 부비는 어머니의 모습이 처연하다.오철환(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