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37)문화콘텐츠 육성 세미나

경주를 중심으로 경북지역에는 신라 천 년의 많은 흔적이 삼국유사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삼국유사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가진 우리와 직접 연결고리를 가진 떼려야 뗄 수 없는 핏줄과 같은 역사이자 현실이다.대구일보는 삼국유사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역사문화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산업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삼국유사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자 지난 15일 경주더케이호텔에서 학계, 문화연구단체, 문화산업단체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세미나가 열렸다.◆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은 삼국유사를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실례로 삼국유사에 실린 225개소의 절터 찾기,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 등 실행 중인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이어 충담재, 월명재 등과 관련된 축제를 소개하면서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을 테마로 축제를 개발해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경주남산연구소는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 코스를 테마별로 개발해 연중 다양한 방법으로 운영한다. 또 문화유산에 대한 학습에 이어 현장 강좌를 개설, 운영하는 한편 문화유산 해설사 양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한다.설화 또는 역사의 현장 유적지를 정비하고 사적비 또는 표지석, 향가의 연고지 건립 등으로 문화탐방객 유치를 위해 노력한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고지마다 문화축제를 열어 뛰어난 인물의 정신을 계승하고 역사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역사문화관광객을 유치한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 또는 역사적 사실을 오페라, 연극, 음악 등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창작극으로 개발 운영한다. 이어 삼국유사 신화와 전설 등의 문화유산을 지역별로 알려주고 해설을 받을 수 있는 어플을 개발한다.◆경주대학교 임선희 교수임선희 경주대학교 교수는 ‘김춘추의 평화와 화해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삼국유사 스토리텔링 기법을 소개하면서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에 대해 설명했다.문화유산을 스토리와 장소로 연계해 하나의 완성된 스토리로 엮어야 한다. 김춘추가 외교전을 벌였던 일본, 중국, 북한의 역사학자와 당시 상황 관련 공동연구 발표회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한반도에서 삼국통일 후 평화와 화해가 지속된 점과 삼국의 기술발전으로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점을 이해해야 한다.삼국통일 그 후부터는 한반도가 하나의 세력으로 외세에 대항했던 상황을 그리며 분야별 공간적 요소를 포함한 스토리를 완성해 이야기에 맞는 문화콘텐츠와 접목을 시도해야 한다.◆동국대학교 박종희 교수박종희 동국대학교 교수는 4차 산업시대에서 삼국유사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도시가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매력과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장소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주에서 해야 할 과제를 제시했다.삼국유사를 연결, 융합,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이어 타지역과 연결하고 세계와의 연결을 통해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위상을 갖추어야 한다.경주 역사문화에 과학의 새로운 옷을 입혀 21세기 융합관광의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 역사적 현장을 재발굴하고 스토리텔링화 하고, 새로운 관광상품을 만들어야 한다.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연결, 융합, 소통이다. 경주는 삼국유사를 활용한 다양한 인성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관광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웹진시인광장 이령 시인웹진시인광장 부주간 이령 시인은 삼국유사 내용을 모티브로 사랑서사시를 지어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지역의 역사문화를 문학으로 승화시켜 관심을 유발한다는 전략을 소개했다.이령 시인의 삼국유사 사랑서사시의 내용은 크게 10장으로 구성된다. 총 10장에 걸쳐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적과 관련된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각장 5편씩 모두 50편을 싣는다.제1장-백률사(신라의 민심을 통합하려 했던 법흥왕 제위 시 이차돈과 관련된 나라사랑)-백률사는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절이다. 불교공인을 위해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했고 그의 목을 치자 흰 피가 솟구쳐 소금강산에 떨어졌다. 자추사라 불렸다. 절의 진입로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다. 대나무는 풀이면서 나무이며 꽃이 피기까지 약 76년이 걸리고 한 나무의 꽃이 피면 숲 전체가 따라 꽃이 피고 한꺼번에 진다. 이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유사해서 공심의 대표적 유적이라 생각된다.‘누구의 피 울음인가 꽃 비경 덧널처럼 쌓이는 대 숲, 땅속 금강이 일제히 솟구치니 내 귀 천 년의 서루에 올랐다 내린다 소름 돋는 저잣거리 원성을 말아 쥔 북악산 솔이끼며 귀신새 소리마저 이곳에선 하얗게 날이 선다.만파식적 듣고 자란 서라벌 백률송순, 황룡이 승천하듯 굽이굽이 내달린 곳, 자추사 흰 피도 찰나에 지고 찰나에 지는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삼국유사 사랑 서사시 1장 일부.◆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박임관 경주학연구원장은 ‘삼국유사의 무궁무진한 콘텐츠’라는 제목으로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를 역사의 뒤안길 기록, 신화와 설화의 보고, 불교유적의 스토리, 인물과 얽힌 이야기, 향가와 신라어의 본원 등으로 해부했다.삼국유사를 근거로 서사 공간으로써 활용이나 인터넷 디지털 공간과 현실 공간의 접합 등을 도모한다면 문화콘텐츠로서의 활용은 무궁무진할 것이다.삼국유사의 설화에 깃든 다양한 삶의 방식과 존재 양식에 대한 이해와 융화와 조화라는 이상적 지향을 스토리텔링으로 승화시킨다면 원형적 상상력과 구술성은 새로운 상품이 될 것이다.삼국유사에 소개된 향가는 한반도의 노래 행위가 구술행위 중심에서 문자로 넘어오는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고대 신라어를 복원하고 활용한다면 여러 가지 요소의 콘텐츠로 재탄생할 것이다.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마음을 생각하면서 삼국 당시의 생활이 묻어 있는 이야기, 민족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는 이야기로 흡수해 재생산할 때 그 값을 다할 것이다.◆경북도의회 박차양 도의원박차양 경북도의회 의원은 ‘스토리텔링이 답이다’는 제목으로 삼국유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에 대한 사례를 소개하며 스토리텔링 방법까지 제안했다.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의 중심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이야기다. 신라는 천 년 동안 경주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경주를 빼고 삼국유사를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경주야말로 삼국유사의 본고장이다.경주에는 많은 역사문화 유적이 산적해 있다. 곳곳에 구슬이 널려 있다. 등록된 문화재만 330개로 경북도내에서 가장 많다.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우리 눈에 보이는 비지정문화재도 수두룩하다.이런 보석들을 사람들이 보고 싶어 달려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스토리텔링해 꾸준히 알리는 방법뿐이다. 영화, 드라마, 소설, 뮤지컬, 연극 등의 대중적인 문화콘텐츠와 접목시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이런 문화콘텐츠로 경주의 역사문화유적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토리텔링으로 옷을 입혀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지역정서에 맞는 작품을 집필하고 있는 경륜 있는 작가들에게 의뢰하거나, 작품공모를 통해 꾸준히 모집해 현실정에 맞는 이야기를 선정해야 한다.◆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은 ‘문화재 활용을 통한 가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서악마을에서 삼한통일의 주역들과 함께 힐링여행을 기획 운영하는 사례를 중심으로 문화콘텐츠를 산업화하는 과정을 소개했다.문화를 통해 국민을 행복하게 하자는 시대정신이 점점 커지면서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문화재의 활용에 대한 필요성을 높였다.창의적 연출을 통한 문화재 활용은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넘어 현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소통을 원활히 하고 국민의 문화수혜를 넓히는 창조적 문화생산이 되고 있다.그뿐 아니라 문화재 활용은 보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문화재 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이렇듯 문화재는 역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큰 부가가치를 지닌 소재여서 21세기 문화국가로서의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한다.특히 삼국유사의 주 무대인 경주에서는 우리 시대 문화창조의 신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다.신라문화원에서 삼한일통의 주역들이 잠들어 있는 서악마을을 가꾸고 문화재활용을 통한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작업을 통해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사자암 절벽과 문수사…반은 동굴에 반은 목조건물 ‘반쪽짜리 법당’ 재미난 이름 차 한 잔 건네며 방문객 반겨

우리가 늘 보거나 상상하는 절의 모습은 이렇다.아름드리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넓은 산중에 물로 씻어낸 듯 깔끔한 돌로 축대를 쌓아올리고 화강석으로 만든 탑과 석등을 자리에 맞게 배치한 모습이다.또 그 소리는 어떤가. 가끔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와 그 바람에 몸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는 풍경소리, 그리고 간간이 절 옆을 흐르는 개울의 물소리 정도일 것이다.아마도 이런 모습이 일반적인 절,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한 사찰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청량산 중턱에 이 같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절이 있다.◆납석사의 오랜 흔적 남아이곳에 있는 문수사는 꽃과 음악이 있는 서정적인 절이다. 임진왜란 당시 당진현감인 정방준의 처 초계 변씨의 슬픈 전설이 서린 도개면 신곡리 문암산을 정면으로 보고 구불구불 농로를 따라간 곳에 작은 주차장이 있다.주차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청량산이다. 청량산 중턱에 문수사가 있다. 문수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절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인데 현재의 절은 1948년 창건했다고 한다. 절터 곳곳에 널린 석탑 부재 등으로 미뤄 이곳에 오래전부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기록에도 이곳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선산부사를 지낸 인재 최현은 일선지 불우편 ‘납석사조’에 ‘납석사는 신곡 문암 북쪽에 있다. 절 뒤에 석굴이 있는데 방 몇 칸이 들어갈 정도이다’라고 적었다.일선지가 지목한 위치와 일치하고 탑신부와 석탑 파편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납석사는 현재의 문수사와 부속 건물인 사자암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하지만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절에 남아 있는 각종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창건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의 불교 탄압에 따라 언제 폐사되고 또 몇 차례 중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이후 1865년(고종 2년) 도적(일부에서는 일제가 도굴했다고 한다)의 침입으로 폐사된 것을 1948년 혜봉선사가 재창건했다.절의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혜봉선사가 재창건할 당시 꿈에 노승이 말을 타고 내려와 사기를 편람 했다고 한다.이를 해몽하니 노승은 문수보살의 화신이며 승마는 사자라고 해서 절이 있는 산의 이름을 청량산, 절의 이름을 문수사라 지었다고 한다.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불과 50여 년도 안 됐다.혜향화상이 1972년 다시 절을 중건하고 1993년부터 절에서 서북쪽으로 150m 올라간 곳에 사자암을 짓기 시작해 2000년 완공했다.사자암 건립 이후 ‘반쪽짜리 법당’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유적과 유물산 내 암자 중 사자암은 천연동굴 입구에 목조 건물을 덧댄 구조로 문경 대승사에서 옮겨온 불상과 4점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이 탱화 중에는 1873년(고종 10년) 제작된 산신탱화가 있는데 국내 남겨진 산신 그림 중 비교적 오래된 유물에 속한다.문수사에는 2006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78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이 있다. 이 경전은 한국의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문수사에 있는 묘법연화경은 서체와 판식, 도각 등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고산 화엄사에서 간행된 경전으로 간행연도가 1477년(성종 8년)으로 확실하고 완질본이어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또 문수사 극락보전 옆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선산 궁기동 석불 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 상은 통일신라 때의 석조 불상으로 높이가 82㎝로 작지만 전체적으로 신체 균형이 잘 잡혀 있다.하지만 머리부분이 부서지고 얼굴 마모가 심해 눈, 코, 입의 윤곽을 알 수 없다.불신과 대좌와 광배가 모두 같은 돌에 조각된 보살상으로 양감 있는 어깨와 허리는 가늘게 표현하고 가슴은 풍만하고 결가부좌한 하반신은 다소 좁게 표현했다.전문가들은 단아한 형태미와 특징적인 광배 등에서 당대 일급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데 균형잡힌 신체의 비례나 섬세한 조각수법 등 여러 가지 특징으로 살펴볼 때 통일신라 말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국화 향기와 선율로 가득한 문수사문수사 입구부터 가을의 고즈넉함을 알리는 아름다운 선율이 조용한 산중을 울린다. 일주문은 없다. 청량산 정상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가을 하늘과 맞닿아 있다.문수사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절이다. 절 식구들의 바지런함이 절 곳곳에서 묻어난다. 가을 낙엽이 산중 곳곳에 쌓여가는데도 절 마당에는 낙엽 하나 찾아볼 수 없다.본전인 극락보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은 비탈면인데 각종 조경수와 꽃으로 장엄했다. 계단을 올라 극락보전 앞에 다다르니 가을 국화가 한 가득이다. 주차장에서 걸어오는 동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도록 한 찬불가와 극락보전 앞 국화가 이 절의 성격을 말해준다.꽃향기와 음악의 선율이 어울리는 서정적인 절이다. 극락보전 옆에는 선산 궁기동 석불 상이 자리를 차지했다.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형상은 그을리고 망가졌지만 자애로움과 당당함은 그대로이다.극락보전 뒤 비탈면에는 위태롭게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소나무숲은 솔바람 길을 따라 사자암까지 이어진다. 극락보전 옆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석탑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설 때 어느 나무인지 모를 소나무에서 솔방울 하나가 떨어져 산사의 적막을 깨는 댕그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온다.잔잔한 찬불가가 내리깔린 솔바람 길에 들어서니 날은 서지 않았지만 제법 찬 바람이 솔숲을 스친다. 찬불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조금씩 계단을 오르니 마음이 가라앉으며 상념이 사라진다.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어떤 일을 다음에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산비탈을 따라 울울창창한 소나무들이 자극적이지 않은 솔 향기를 뿜어낸다.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올랐을까. 여유롭게 걸은 탓에 그리 힘들지 않다. 아니 찬불가가 주는 편안함에 힘들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계단 옆 수줍게 핀 들국화의 모습에 취해 한발 한발 오르다 보니 어느덧 큰 절벽에 몸을 기댄 규모가 꽤 큰 암자가 나온다.문수사의 보물, 사자암이다. 2층으로 된 사자암 옆으로 산신각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다.사자암이란 암자가 기대선 절벽이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라는 데 어느 모습이 사자의 모습인지 사실 분간하긴 어렵다. 하지만 청량산 중턱 널찍하게 펼쳐진 절벽은 그 자체로 위엄이다.옛 납석사 방 몇 칸이 들어설 정도의 석굴이 있었다는 사자암은 2층 목조건물이다. 사자암은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절벽에 몸을 붙이고 있다.1층은 참선방, 2층은 삼존불을 모신 법당이다. 산존불은 바깥으로 드러난 목조 건물의 안쪽인 동굴에 있다. 법당의 절반이 동굴, 나머지 절반은 목조건물이어서 ‘반쪽짜리 법당’이라고 불린다.참선방에는 항상 차가 준비돼 있다. 사자암을 찾는 이면 누구나 들러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절벽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사자암에서 바라보는 전경을 빼놓을 수 없다. 늙어 구부러진 소나무 사이로 멀리 도개 신곡리의 누런 황금 들판이 보인다.사자암 바로 아래에는 데크로 만든 무대와 객석이 있다. 매달 보름을 전후해 이곳에서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가끔 와인도 무료로 제공된다고 한다.그래서 문수사는 꽃과 차 향기, 선율이 있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절이다. 땡그랭, 땡그랭 풍경소리가 산중에 울리는 음악 소리에 박자를 맞춘다. 사자암을 둘러보고 차향에 취해 문수사를 내려오는 길, 미련이 나를 붙잡고 자꾸 뒤돌아서게 한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흥덕왕…빼곡했던 천 년의 이야기 피로 물든 뒷 장은 감추고 싶은 듯 군데군데 이름조차 없구나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왕조사를 간단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천 년의 이야기를 몇 권의 책으로 소개하기에는 벅차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4대 유례왕, 15대 기림왕, 37대 선덕왕, 41대 헌덕왕, 희강왕, 민애왕 등은 왕들의 이야기가 집중되는 기이편에서 이름조차 소개하지 않았다.흥덕왕의 이야기도 아주 간단히 기록하면서 앞의 헌덕왕과 소성왕, 애장왕의 사연도 움푹 빠뜨렸다. 피로 얼룩진 역사를 들추고 싶지 않았던 일연 스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일인지도 모른다.원성왕 이후 잇따른 태자의 죽음과 소성왕, 애장왕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볼 때 특기할만한 일이지만 삼국유사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조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고, 17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선조들의 얼룩진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본격적인 신라하대를 열었던 형제들의 쿠데타를 픽션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삼국유사: 흥덕왕과 앵무제42대 흥덕대왕 때 보력 2년은 병오년(826)인데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으나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암컷이 죽었다. 그러자 혼자 남은 수컷이 슬피 울어 마지않았다.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새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짝을 찾은 것으로 알고 이내 그 거울을 쪼아대었으나 그것이 그림자인 줄 알자 슬피 울다 죽었다.왕이 노래를 지었으나 자세히는 모른다.[{IMG03}]◆새로 쓰는 삼국유사: 권력과 사랑-형제들의 쿠데타: 원성왕의 장남으로 태자에 임명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인겸의 아들은 6형제였다. 준옹, 언승, 숭빈, 수종, 충공, 제옹 등이 6형제가 태어난 순서이다.원성왕은 이들을 순서대로 궁중으로 불러들여 나랏일을 익히게 했다. 준옹은 맏손자여서 아들들이 죽자 곧 태자로 임명하고 중책을 맡겨 말년에 병부령에까지 올랐다.이들 6형제는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났지만 성향은 각각 달랐다. 태자로 임명된 준옹은 천성이 심약하고 병치레를 많이 했다. 준옹은 병부령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도 몸이 약해 잠깐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IMG03}]이에 반해 둘째 언승과 넷째부터 막내까지 수종, 충공, 제옹은 활달한 성격으로 나랏일에도 적극 참여해 권력에 대한 야망을 키우면서 자신들만의 세력을 서서히 키우기 시작했다. 셋째 숭빈은 소극적이고 차분한 편이었다.준옹이 원성왕의 죽음에 이어 39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소성왕은 왕좌에 오르면서 후계구도를 걱정해야 했다. 자신의 병이 심각해 수명이 길지 않음을 알았다. 아들은 아직 12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여서 스스로 나랏일을 이끌어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신의 안위마저 책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가 앞섰다.소성왕은 즉위 1년 만에 죽으면서 13살 어린 아들 청명에게 왕위를 넘겼다. 소성왕은 아들의 안위를 위해 동생들에게 섭정을 당부하면서도 몰래 비밀호위 무사들을 배치하고, 뛰어난 장수 명호와 정용을 시중으로 발탁해 아들을 엄호하도록 안배했다.소성왕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800년에 즉위했다. 이때부터 왕의 숙부 언승과 수종의 시대가 도래했다. 언승이 섭정하면서 병부령에서 상대등으로 스스로 옮겨 앉아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언승은 자신의 뜻을 잘 따르는 넷째 수종과 다섯째 충공을 병권과 재무를 담당하는 대신으로 중용하고 실권을 휘둘렀다.그러나 애장왕이 18세가 넘어 성인으로 성장해 조금씩 자신의 의지를 펼치려 하자 삼촌 언승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애장왕이 23세, 재위 10년차에 접어들던 809년 일이 터졌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문제에서 왕과 삼촌 언승의 대립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사신을 누구로 파견할 건지 예물을 무엇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로 마련할 것인지 등의 작은 문제로 시작해 갈등이 크게 불거졌다.상대등이었던 언승은 병부령과 상부령에 있던 동생 수종과 충공을 불러 병사들을 궁궐 깊숙이 배치하게 하고, 삼 형제가 칼을 빼들고 직접 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애장왕의 비밀호위 무사들도 이미 언승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언승 형제들은 애장왕을 단숨에 베었다. 저항하던 애장왕의 동생 체명까지 처리하고, 신라 41대 헌덕왕으로 즉위했다. 애장왕은 23살의 젊은 나이에 이렇다 할 권력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헌덕왕은 특유의 괄괄한 성격으로 왕권을 박탈하는 일에 동생들을 모두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없었던 헌덕왕은 자신의 일에 적극 찬동하고 앞장서는 수종을 태자로 삼았다. 이어 충공을 상대등으로 삼고, 막내 제옹을 병부령에 앉혔다.헌덕왕은 즉위 이후에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거문고를 타는 등으로 흥청망청하여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 왜구들의 노략질도 심해 백성은 어려움에 처하며 신라하대 패망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흥덕왕의 사랑: 흥덕왕 수종은 애장왕의 여동생, 조카인 장화를 부인으로 맞았다. 당시 형 언승을 도와 병부령에 있으면서 권력을 자랑할 때였다. 수종과 장화부인의 애정은 궁궐을 벗어나 시중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유별났다.장화부인은 언승과 수종 형제가 자신의 오빠 애장왕을 죽인 원수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장화부인이 10살, 어릴 때의 일이었고, 언승이 당나라에 소성왕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한 것처럼 백성에게도 그렇게 숨기고 즉위했기 때문이다.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헌덕왕이 죽고 수종이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장화부인은 28살에 왕비의 관을 썼다. 화려한 날들이 시작되던 무렵 장화부인의 귀에 오빠들에 대한 죽음의 진실이 들려왔다.믿어지지 않는 오빠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곰곰이 뒤집어 생각하니 왕이었던 큰 오빠와 작은 오빠, 둘이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일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장화부인은 결혼 10주년이 되던 날, 흥덕왕 즉위 1년을 맞은 날에 사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술에 취한 흥덕왕의 입을 통해 비극의 전말을 들었다. 절망하던 장화부인은 끝내 이승의 문턱을 스스로 뛰어넘었다.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어쩌면 예고되었던 불운의 사랑인지 모른다. 현실로 닥친 사랑의 상실에 직면한 흥덕왕은 넋을 놓았다.그러나 흥덕왕은 당나라와 일본의 위협, 김주원 후손들의 반란, 흉년에 이어지는 도적떼들의 극성 등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는 대신들의 추궁으로 사랑의 병을 앓을 틈을 잃었다.흥덕왕은 헌덕왕 때와는 다르게 청해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아 나라를 지키는 일에 많은 정성을 들였다. 그는 아들 없이 물러나 본격적인 피의 왕권쟁탈전 시대를 불러왔지만 죽음에 이르러 장화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으로 사랑을 찾아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미래 시간여행 가능할까…시간을 거슬러 갈 순 없나요

우리는 그간 많은 종류의 여행을 듣고, 접하기도 하며,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체험해 왔다. 앞선 연재에서 다룬 ‘우주여행’으로 말미암아 피니쉬를 끊은 줄 알았건만 이젠 하다하다 ‘시간 여행’으로까지 다다랐다.문제는 앞서 떠나온 여행들이야 간략한 개념파악이나 정보 등의 취합 정도로 훌쩍(?) 떠날 수 있다지만, 이 시간 여행이라는 건 고약하게도 3차원과 4차원, ‘상대성이론’을 일정 부분 득한 후에나 시도해 볼 수 있을 터다.그도 그럴 것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말미암아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시간)를 인력으로 되돌리거나 빠르게 감아내기 위해선 거기에 깃든 과학적 요소와 제반 원리를 응당 거슬러 올라가야 할 나름의 책무가 동반된다. ◆3·4차원이 무엇인가3차원은 쉽게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상이다. 여기서 ‘차원’을 이해해보고자 한다면 ‘원점과 ’축‘의 개념부터 되짚어야 한다. 원점 이라함은 모든 축이 맞물리는 이른바 ’만남의 광장‘ 쯤으로 설명될 수 있다.그렇다면 축이란 뭣을 의미할까. 축은 곧 ‘직선’과 동일선상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축 위의 두 개의 점은 원점과 같은 직선 위에 공존한다. 그러니깐 세 개의 점이 동일선상의 직선 위에 있는 전제하에서 그중 하나는 반드시 원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선결조건이 이뤄질 시 마침내 차원으로 넘어오게 된다.여기까지 이해가 된다면 차원의 크기가 곧 축의 개수임을 파악할 수 있다. 축이 하나면 1차원, 두 개면 2차원이 되는 셈이다. 1차원은 뒤가 없다. 다시 말해 곡선이 없다는 의미로 풀이되는데, 예를 들어 직선 중 여분 공간이 하나라도 존재함을 가정한다면 이것이 바로 1차원의 세계다.곡선의 시작은 2차원부터다. 1차원의 축에서 직각을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이 바로 2차원이다. 이때부터 트라이앵글이 생성되고 원이 그려지게 된다. 3차원의 이해는 입체성을 지닌 ‘3D’ 기술을 응용하면 되는데, 2차원의 축이 시간에 흐름에 의해 어떤 방향으로든 ‘동적 성질’을 보인다면 이때부터 입체가 생기고,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다.시간여행을 반드시 가고자 한다면 4차원의 세계에 꾸역꾸역 진입해야 한다. 4차원은 또 다른 말로 3차원을 근간으로 한 ‘상상의 산물’ 정도로 이해해보면 된다. 우선 쉽게 가보자. 4차원은 말 그대로 4가지 차원으로 이뤄진 것을 뜻한다.축의 개수에 따라 차원이 늘어나듯 우리가 살아가는 3차원 공간에 축을 하나 추가한다면 4차원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상상이지만은 말이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입체 공(3차원)의 궤적을 상상하는 것이 바로 4차원이라는 의미다.4차원을 학설적으로 종합하면 공간 축 상에서 이동한 거리와 시간 축 상에서 이동한 거리를 동일시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스페이스와 타임을 개별로 보지 않고 하나의 개념으로 본다는 것인데, 시공간이 맞물릴 그 시점이 도래할 적에야 과거 또는 미래로의 여행을 공상이라도 해볼 명분이 우리 앞에 줘진다. ◆절대적 기준의 배제차원의 이해가 일정 부분 이뤄졌다면 상대성이론에 관한 파악도 덧붙여봐야 한다. 상대성이론의 캐치 프레이즈는 ‘절대적 기준의 배제’라고 우선 보면 된다.상대성이론에서의 힘이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개별로 줘진다는 것을 명시한다. 쉽게 말해 비록 동일한 공간에 처해진 사람들일지언정 각자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결코 동일신 해선 안 된다는 논리다.예를 들어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의 시간은 정지해있는 사람의 시간보다 반대로 느리게 가는 것이고, 개별의 속도로 빠르게 이동 중인 물체는 질량은 증가하는 대신, 길이가 짧아진다는 것.이 같은 상대성이론에 기댄다면 시간여행 시도 정도는 기대해 볼 법하다. 이는 시간여행 자체가 상대성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인데 빛보다 빠른 속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로렌츠의 변환식’과 시공간은 중력에 의해 그 형태를 좌지우지한다는 상대성이론과 그 맥을 같이한다.결론적으로 3차원의 시점에서 최단시간 내 동선은 2차원 기준, 찰나의 순간을 두고 삽시간에 공간을 이동하는 정도로 가정해볼 수 있는데 이는 곧 중력으로 인해 얽혀버린 시·공간으로 말미암아 시간과 거리를 단박에, 다시 말해 ‘순간 이동’이 가능해진 통로를 생성시킨다.이것이 바로 ‘웜홀’이다. ◆시간여행의 필수는 ‘빛의 속도’시간여행의 선결조건은 ‘빛의 속도’다. 빛의 속도는 초속으로 따져 29만9천792.458km인데 여기서 초속이란 사전적 의미로 ‘운동의 시작점에서의 물체 속도’다. 시간 여행 자체가 가상이긴 하지만 이 가상을 한층 더 현실화시키기 위해선 ‘웜홀’이 전제돼야 한다.웜홀이란 블랙홀과 마찬가지로 중력이 무한정 증가한 시공간으로 정의된다. 사실 가시적 요소로 발굴된 것은 아니다. 그저 이론, 거기에 공상을 덧붙인 현재로선 ‘미지의 공간’ 쯤으로 미뤄 짐작해보면 되겠다.웜홀에서의 시간 흐름은 매우 느리다. 그 이유는 중력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시간을 지체시키는 원인이 중력이며, 그 중력 자체가 웜홀에서는 무한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턴 웜홀을 통과하는 시간여행을 한번 가상해보자. 물론 어느 정도의 과학적 원리는 깃들어 있다.우선 타임머신이 필요하겠다. 타임머신을 ‘빛보다 빠른 우주선’이라 설정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웜홀의 입구를 지구에 착륙시킨다. 그리고 타임머신은 웜홀의 출구를 단 채 우주로의 시간여행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이 웜홀은 지구 시간 대비, 약 50배 가까운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다. 한 마디로 웜홀이 ‘중력장’이 돼준다는 얘기다. 출구를 달고 비행을 떠난 타임머신이 다시 지구로 귀환해 지구에서 대기 중이었던 웜홀의 입구와 맞물리게 한다.이제는 웜홀의 입구와 출구가 모두 지구상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시간과 공간은 이미 얽혀있는 상태다. 공상과 과학적 논리가 일정 부분 맞닿아 있는,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이다.이 지점에서 시간 여행의 비밀이 조금은 해소된다. 2020년에 웜홀을 통과한 타임머신은 우주를 유영하며 나름의 시간여행을 만끽한 후 약 1년이 흐른 뒤 현실로 복귀한다. 그런데 웜홀은 지구 시간과 비교, 50배의 시간 지연을 일으킨다는 것이라 앞서 설명했고, 물리적 시간은 비록 1년의 여행이었지만 지구로의 현실 시점은 출발 후 50년 이 지난 2070년이 된 셈이다.종합해보자. 타임머신의 출발 시점, 다시 말해 웜홀의 입구는 2020년이며 돌아올 출구는 1년의 50배에 해당하는 2070년, 그러니깐 이 여행객은 50년 전인 2020년의 과거로 회귀하는 상상과도 같은 시간 여행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여기가 바로 이론과 공상의 접점이다.우리에게 중력은 단순 지구가 우리에게 행하는 ‘끌어당기는 힘’을 의미하겠으나 시간여행자에게 만큼은 중력이란 시간과 공간의 왜곡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일 것으로 보인다. 다름 아닌 ‘질량’에 의해 말이다.여기서 하나 더, 시간여행의 필수항목인 ‘뮤온’을 간과해선 안 된다. 우주선 내부에 포함된 고에너지 입자인 뮤온은 수명이 약 100만 분의 2초에 그친다. 이 정도 수명으론 광속으로 떨어진 다 손치더라도 1㎞도 나아가지 못한 채 낙하해버리고 만다. 흔히들 뮤온을 두고 ‘우주 물질’이라고도 부른다.다만 뮤온이라는 것이 빛의 속도로 이동하기 때문에 ‘역으로의 시간’은 매우 천천히 흐르게 된다. 이는 곧 뮤온에 적용된 시간의 흐름을 더욱 늦춰 미래로의 여행이 가능해진다는 가설로 풀이된다.흔히들 우리는 이룰 수 있음을 ‘목표’라 하고 이룰 수 없는, 그렇지만 간절해마지 않은 것에 ‘꿈’이라고 지칭한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란 어찌 보면 과거로 회귀하고픈, 또는 현재를 탈피해 더 나은 미래를 앞서 경험하고 싶은, 그러니깐 인간의 본능적 욕구로 말미암아 탄생한 ‘허상의 산물’ 일 수도 있다.다만 4차 산업의 모멘텀이 당시만하더라도 소위 말 같지도 않던 상상력의 산물에 빗대 오늘의 현실과 마주한 만큼, 시간 여행, 타임머신, 웜홀로의 흡수를 ‘가능성 있는 유쾌한 상상’ 정도로 기대해봄이 어떨까.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 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골다공증, 특별한 자각 증상 없어 예방 중요”

골다공증은 골량의 감소와 함께 골질의 약화로 인해 뼈의 강도가 약해짐에 따라 골절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질환을 말한다.골다공증은 특히 여성에게서 유병률이 높은데 이는 여성들이 폐경 후 에스트로겐 분비 변화로 인해 골흡수가 진행되기 때문이다.질병관리본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50세 이상 여성 35%와 남성 8%가 골다공증을 앓고 있으며, 평균수명의 연장과 더불어 유병률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골다공증은 특별한 자각증상이 없어서 많은 환자가 골다공증성 골절이 발생한 이후에 질환을 발견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검진을 통해 조기 진단이 가능하고 예방적으로 골다공증을 치료 하고 골절을 예방할 수 있다. ◆골다공증성 골절골다공증성 골절은 뼈의 약화로 인해 작은 충격에도 뼈가 부러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여러 관절에서 발생할 수 있고 대표적으로 고관절 골절과 척추 골절이 있다. 골다공증성 골절은 대부분 고에너지 손상에 의한 골절이 아니고 단순 낙상 후 발생한다. 다른 골절과 달리 70대 이후의 환자나 기저질환이 많은 환자에게서 발생하기 때문에 치료에 어려움이 있다. 고관절 골절은 일단 발생하게 되면 대부분 수술적 치료를 요하고 치료 후에도 환자의 신체 능력 및 보행 능력에 많은 저하가 있다.또 1년 이내 사망률이 10~30%에 달하므로 골절 발생 전 골다공증의 치료가 매우 중요하다.◆골다공증 진단골다공증을 진단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중에너지 X선 흡수계측장비를 통해 골밀도를 측정하는 것이다.20~30대 동일 성별의 평균 골밀도와 비교해 본인의 수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T 점수가 -2.5 이하인 경우 골다공증으로 진단한다.기저질환이 없는 경우 65세 이상의 여성 및 70세 이상의 남성의 경우 1년에 한 번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 추천된다.골다공증의 가족력이 있거나 이전에 골다공증성 골절이 발생한 과거력이 있던 등의 위험성이 높은 환자의 경우 65세 이하의 경우에서도 검사를 시행하는 좋다. ◆골다공증성 골절 예방충분한 영양 섭취 및 운동은 뼈 건강에 기본적인 요소이다. 최근에는 근감소증이 골다공증성 골절과도 많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유산소 운동뿐만 아니라 근력운동과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다.그러나 이것만으로 골다공증을 치료하고 골절을 예방하기엔 무리가 있다.가장 중요한 것은 조기에 골다공증을 진단해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것이다. 골다공증은 증상이 없어서 많은 환자가 대수롭지 생각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문제는 골절이 발생한 후 치료를 하면 시간과 경제적인 소모가 많고 치료 후에도 기능 회복이 더디다는 것.골다공증을 진단받았으면 전문의와 상의해 골절 예방을 위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다양한 골다공증 약제가 시중에 있으며 대부분의 약제가 골흡수 억제제로 활발해진 골흡수를 막아 골량을 증가시키는 약들이다.투약의 용이성을 위해 경구약 뿐만 아니라 1~3개월 및 1년 단위로 맞는 주사제 등이 있다. 그러나 많은 미디어에서 오랜 기간 이런 종류의 약을 투약하는 경우 비전형 골절이나 치과치료 시에 하악 골괴사 등의 합병증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도해 환자들이 많은 걱정을 하고 외래로 찾아온다.하지만 이런 합병증의 발생률은 매우 낮으며 3~5년간 약제 투여 후 골절의 위험성을 평가하여 약제의 중단 및 지속적인 투여를 전문의와 상의해야 한다.최근에는 골다공증약의 꾸준한 발전으로 골흡수를 막는 약 외에도 골생성을 증가시키는 약제가 개발돼 환자의 상황 및 중증도에 따라 치료제의 선택이 필요하다. 비교적 고가의 주사제이고 매일 또는 1주일에 한번 복부에 주사를 맞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효과가 좋아 사용이 증가하는 추세이다.이외에도 칼슘 및 비타민D 보충도 매우 중요하다. 뼈를 생성하려 해도 뼈를 만드는 재료인 칼슘과 비타민D가 없으면 골생성이 더딜 수밖에 없다.식품으로 보충할 수 있지만 고령의 환자에게선 체내 수치가 아주 낮은 경우가 많아 경구약으로 보충하는 것이 좋다.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비타민D 결핍이 50% 이상의 환자에서 있다고 보고되는 만큼 적절한 보충이 필요하다. 도움말=영남대병원 정형외과 박찬호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건선,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기

-계명대 동산병원 피부과 김성애 교수무더운 날씨에도 긴 팔, 긴 바지로 무장한 채 진료실을 찾는 건선 환자들을 자주 마주할 수 있다.중증 건선 환자들은 피부에 나타나는 붉은 발진과 두꺼운 각질 증상 때문에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나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위를 피하는 것보다 피부를 가리는 것을 선택하곤 한다.건선은 몸 속 면역 시스템의 이상으로 인해 홍반, 염증성 판상, 은백색의 인설 등이 나타나는 만성 면역 매개성 질환이다. 특히 무릎, 팔꿈치와 같은 돌출 부위에서 잘 발생하며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는 것이 특징이다.눈에 띄는 병변에 고통이 심하지만 전염되지 않는 질환이다. 그러나 질환에 대한 사회의 이해도가 낮고 편견이 많아 환자들은 증상을 감추거나 아토피 등 다른 피부 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다행히 최근 건선 질환과 치료법에 대해 연구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치료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중증 건선 환자들에게 몸 속 면역체계에서 인터루킨-17A와 같은 건선 유발인자를 직접 차단해주는 생물학적 제제를 처방하면 효과를 빨리 나타낼 뿐만 아니라 완치에 가까운 호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부위는 작지만 환자 삶에 끼치는 영향이 높고 치료가 까다로웠던 두피나 손발톱, 손발바닥 건선 증상에도 좋은 효과를 보인다. 치료환경이 발전하면서 건선 관절염과 같은 동반 질환을 미리 살피는 치료도 가능해졌다. 건선 환자 3명 중 1명에서 나타나는 건선 관절염은 손가락, 발가락 관절과 같이 작은 관절에서 시작되며, 초기에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관절 변형을 불러온다. 건선을 치료하는 피부과 전문의들은 건선 관절염을 늘 염두에 두며 환자를 살피고 있다.제도적인 변화도 있었다. 만 2년 전부터는 중증의 판상 건선이 산정특례 질환에 포함됐다. 오랜 기간 치료와 관리를 이어가야 하는 건선 환자들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치료비 부담을 낮춘 것이다.전신치료, 광선치료 모두 각각 3개월 동안 받았음에도 체표면적의 10% 이상에 증상이 나타나는 등 세부 산정특례 기준에 부합하는 환자는 치료비에 대한 본인 부담금이 10%로 줄어든다.이처럼 건선의 치료 환경은 최근 몇 년 사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그럼에도 과거의 치료 실패 경험으로 인해 치료를 포기하고 숨어 있는 건선 환자들이 아직 많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해 전 세계 31개국에서 중등도에서 중증의 건선 환자 약 8천300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설문 조사 결과, 건선 환자들이 깨끗한 피부를 갖게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로 ‘해변에서의 일광욕’이 꼽혔다.또 수영하기, 포옹하기, 악수하기 등이 높은 빈도로 꼽혀 뒤를 이었다. 보통의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누릴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이다. 이제 건선 환자들도 제대로 치료 받으면 얼마든지 깨끗한 피부를 되찾고 당당한 일상을 마주할 수 있다. 건선을 감추거나 숨기지 말고 병원을 찾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태어날 때부터 있는 붉은 반점, 치료는 어떻게?…‘유아혈관종’ 흉터 남기지 않으려면, 약물•레이저 치료를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정말 경사스러운 일이다.허지만 아이가 아무 문제없이 태어난 줄 알았는데 태어나자마자 혹은 태어나서 며칠 후부터 몸에 붉은 반점이 보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별일 아니라고 방치를 해도 될까? 아니면 바로 병원에 가봐야 할까?태어난 직후 붉은 반점이 보이는 경우는 크게 유아혈관종과 모세혈관기형인 경우가 많다.대부분 유아혈관종은 출생 직후 혹은 출생 후 몇주 내에 아주 작은 붉은 점으로 나타나서 9개월에서 돌까지 급격하게 크기가 커지면서 부풀어 오른다.이후에는 퇴화하기 시작해 대략 5세까지 약 50%, 7세까지 70%, 9세까지 약 90% 정도가 완전 소실된다.다만 정상피부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흉터를 남기는 경과를 보인다.예전에는 유아혈관종이 나이가 들면서 자연적으로 소실되기 때문에 굳이 치료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최근에는 유아혈관종이 자연소실 된 이후에 흉터가 남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다.치료는 크게 약물요법과 혈관레이저 치료로 나눈다.유아혈관종의 크기가 작을 때 먹는 약과 혈관레이저치료로 유아혈관종이 커지지 않게 막아준다면 나중에 남는 흉터를 최소화해 거의 보이지 않게 만들 수가 있다.이런 양성의 경과를 보이는 유아혈관종과 달리 선천혈관종의 경우는 피부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신적으로 침범해 아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때문에 혈관종이 광범위할 경우에는 꼭 대학병원에 방문해 진료를 받아 보는 것이 좋다.다음으로는 모세혈관기형이 있다.모세혈관 기형의 증상은 피부 진피속 모세혈관이 증식해 그 부분이 붉게 보인다. 예전에는 불꽃모양처럼 보인다고 해서 ‘화염상모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모세혈관기형이 경미한 경우에는 ‘연어반’이라고 부른다.신생아의 미간, 눈꺼풀, 목 부분에 연분홍 내지 붉은 반점으로 발생하며 목덜미의 반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년 이내에 점점 옅어지며, 운동하거나 더워지거나 술을 마실 때에만 해당 부위가 붉어 보이는 형태로 남는다.모세혈관기형이 심한 경우에는 ‘포도주색반점’이라고 한다.얼굴과 목의 한쪽에 붉은 큰 반점이 생기고, 10세 이후부터 점점 더 붉어지고 튀어나오며 다른 혈관이상이 동반되기도 한다.아주 드물지만 ‘스터지-웨버증후군’으로 이어져 피부모세혈관기형 뿐만 아니라, 뇌의 혈관기형이 동반되어서 간질, 지능발달저하 등의 부작용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초기에 대학병원 피부과에서 감별을 하는 것이 좋다.모세혈관기형은 혈관레이저치료를 이용해서 늘어난 모세혈관을 줄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방법이다.그리고 피부가 얇은 어릴 때부터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효과가 더 좋다고 알려졌다.노출부위에 있는 혈관종과 화염상모반의 경우에는 평생 5차례 혈관레이저치료에서 보험혜택을 적용받는다.물론 완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20회 이상의 꾸준한 치료가 필요하지만 5회까지는 의료보험혜택을 받아서 저렴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노출부위에 붉은 반점이 있는 경우에는 피부과를 찾아 진료받기를 권한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금오산 마애여래입상…하늘로 뻗은 험지 가까스로 오르니 고난 다 이겼다 내미는 자비로운 손

정상에 이르는 길은 된비알의 연속이다. 몹시 험한 비탈길이라는 의미의 된비알 곳곳에는 거대한 암석이 솟아 있다. 금오산 기암괴석 곳곳에도 단풍이 물들었다.박물관 안에 있는 유물이 아니라 원래의 자연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문화재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채미정∼케이블카∼해운사∼대혜폭포∼오형돌탑∼마애보살입상∼약사암으로 길을 잡았다.대혜폭포 입구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된다. 정상을 밟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할딱고개의 시작이다.숨이 가빠 헐떡거릴 정도로 가파르다 하여 할딱고개 또는 깔딱 고개란다. 하늘로 향한 계단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고 그 길 끝나면 험준한 산길이다.그곳에서도 2㎞가 넘는 길을 오르내려야만 목적지에 닿는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심장이 쿵쾅거린다.보물 제490호 구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암벽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석공은 산꼭대기에 붙어 있는 거대한 암벽 속에 원래 있던 부처를 밖으로 현신해 내었다.그 앞에 잠시 합장하고 섰다.마애불은 절벽 중간에 나투었으니 저절로 우러러보게 돼 가슴이 뛰고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시간을 돌에 새긴 그림, ‘마애불’ 속에 그 천 년의 시간이 묻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앞에 서면 옷깃이 여며진다.◆10세기경 고려 불상금오산 마애여래불은 상호와 신체 등 각 부분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말의 형식을 계승한 10세기경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암벽의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아직 비슷한 예가 없으므로 고려 초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보고 있다.전체 높이는 5.5m, 불상 높이는 4.2m이다. 1968년 12월19일 보물로 지정됐다.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은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옷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이나 지나치게 큰 왼손, 둔중하게 묘사된 두 발, 경직된 옷 주름 문양 등에서 신라시대보다 둔화되고 위축된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이러한 특징은 불상이 딛고 서 있는 반원형의 연꽃 대좌와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서도 나타난다. 즉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의 광배인데 이 말은 부처나 보살의 온몸에서 나오는 빛이 배의 모양이라는 뜻이다.머리 부분 광배의 윤곽은 3중의 선으로 표현됐다. 머리 부분에서 이어져 내린 2중의 선으로 다시 신체부분의 빛을 표현했다.전체 광배의 내부에는 불꽃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3면 보관이 있으나 조각장식은 마멸로 분명하지 않다.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약간의 부피감도 있지만 긴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초승달 모양의 눈썹은 작고 오뚝한 콧잔등으로 이어져 있다.예리한 눈과 작은 입에서 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과는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코밑에는 길게 표현된 인중과 함께 입술을 가늘게 조각해 다소 경직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귀는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의 삼도(三道)는 명확하지만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태이다.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 아래로 내려져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여래상에서 나타나는 우견편단(右肩偏袒)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선각으로 표현된 옷 주름은 어깨에서 한 번 접혀진 다음 왼팔과 허리를 감싸며 흘러내리고 있다. 하반신에서는 반원형의 옷 주름도 부드럽게 표현돼 있다.가슴과 배, 팔 등 신체 각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며 발은 다소 묵직하고 큼직하게 조각됐다.이 마애여래불은 장대한 신체에 전체적으로 윤곽은 뚜렷하지만 세부적인 신체의 굴곡은 생략돼 있다. 오른발에 무게중심이 옮겨지도록 허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튼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어깨의 선은 매우 원만하고 자세도 좋지만 가슴·팔·하체 등은 둔탁하게 처리했다.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천의 자락을 잡고 있다. 왼손은 팔꿈치를 약간 구부려 상체에 붙여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대좌는 불상을 중심으로 반원형이 되게 부각돼 있다. 중생들의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해 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이는 불교에서 여래나 보살이 취하는 수인(手印)의 하나이다. 부처가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해준다는 덕을 표시하는 자세이다.삼국시대의 불상에서는 시무외인과 함께 불상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취하고 있는 형태이며, 그래서 이 두 수인을 통인(通印)이라고도 한다.저 산 아래, 우리 인간을 향해 손바닥을 펴보인 것이다. 천수천안은 아니라도 부처의 큰 능력을 상징하듯 왼손을 더욱 길게 표현한 것으로 느껴진다.‘두려워 말라. 우환과 고난은 이미 지나갔다.’ 펼친 부처의 긴 손으로 더 많은 중생의 시름을 다 받아 주겠다는 자세로 보인다.그 뜻을 헤아리듯 자연암벽에 매달려 마애불을 새긴 석공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암벽 밖으로 나툰 마애불은 자연 속의 기운과 우리 민초들의 삶, 그 모든 것들이 함축돼서 하나로 연결된 형상이다.천 년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이 부처를 친견했을 것이다.의상이나 도선, 사명대사도 마애여래 앞에 섰을까 지극한 정성이, 스쳐 지나는 객의 발길도 오랫동안 붙든다.마애불은 태양을 향해 동남쪽으로 서 있어 해돋이 빛을 온몸으로 받아 낸다. 북동쪽으로는 구미 공단, 금오지와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가을 들판을 남쪽으로 휘돌아나가는 낙동강 구비도 보인다.마애불의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없는 산 정상부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다.전면의 평평한 공터에는 현재 주춧돌이 남아있고 흩어진 기와 조각들, 암벽에는 연결구조의 흔적도 보인다.1618년(광해군10) 간행된 경상도 선산도호부 읍지 일선지(一善誌)에 ‘금오산 제일 높은 곳 아래 보봉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으니 남동쪽으로 수 백리를 바라볼 수 있다’(金烏山 最上峰下有有小刹是也...通望南東數百里)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약사암 불상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거친 비탈길을 올라가면 약사암이 있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김천 직지사의 말사이다. 신라 눌지왕(417∼457)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조선 중기 사명대사 유정이 금오산성을 쌓으면서 중창한 바 있다. 1990년대에 중창하며 법당 왼쪽에 요사채를 지었고, 그 앞 봉우리 바위 위에 종각을 새로 지어 주변 산세와도 어우러진 풍광을 보여 준다.거대한 암벽 끝에 불은 제비집처럼 이 작은 절집은 온몸으로 시간의 질곡을 버텨 온 결과물이다.중국 유학서 돌아온 의상대사도 이 산에 들어와 수행했다.각고의 정진 끝에 깨달은 바 있어 앉은 자리에 작은 절집하나 짓고 하산했는데 그곳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암자이다.이곳 법당 안에는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불상이 있다.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인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석불인데 그 위에 금박을 두텁게 입혔다.수도산 수도암의 석불좌상(보물 제296호),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보물 제319호)과 함께 삼 형제 부처라고 불린다. 세 불상이 동시에 빛을 뿜는 방광(放光)을 하였다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약사암 설명문에는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적혀 있다.산새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가을 해는 짧아서 벌써 석양이다. 암벽 틈에도 단풍이 저녁노을처럼 붉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어둠이 산자락을 덮기 시작한다. 하산은 야간산행이다.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산을 보고 ‘왕의 기가 서려 있다’고 했다니 기운 한 번 느껴볼 요량으로 미적거렸다.마애불이 자리 잡은 산을 떠나 내려가지만 벼랑 끝에 새겨진 부처는 절망 끝에 선 중생을 언제나 다독인다.마애불의 경우 암벽에 조각돼 있기 때문에 조성 당시의 바로 그 장소에서 이동했을 가능성은 없다.천년세월 풍파 속에 절은 사라져도 묵묵히 원래의 자리를 지키며 오늘도 내일도 서 있을 것이다.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천생산 천룡사…엎은 함지박처럼 납작한 얼굴의 산, 두 눈 부릅뜬 용 품고 있어 든든하네

구미시 인동동과 산동면, 장천면에 걸쳐 솟아있는 천생산.천생산은 하늘이 내린 산이라고 불린다.비록 정상이 406m로 야트막하지만 낙동강 너머 마주하는 금오산과 함께 구미를 대표하는 산이다.낙동강 건너 서쪽에서 바라보면 정상이 한 일(―)자로 마치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방티산이라고도 부른다.또는 병풍이 둘러쳐진 것 같다고 병풍산, 미덕암(미득암이라고도 부른다)의 모습이 사자가 하늘을 보고 포효하는 모습과 같아 앙천산이라고도 불린다.다양한 이름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이 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그리 오래지 않은 작은 사찰이 있다.◆하늘이 내린 산 천생산하늘이 내렸다는 천생산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의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천연요새다.조선시대 인동부수와 학자들이 편찬했다는 옥산지(옥산은 인동의 옛 이름이다)에는 ‘천생산은 고을 동쪽 8리 거리에 있는데 삼면이 석벽을 깎아 세워 천연의 성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마치 하늘이 만든 것 같은 까닭으로 천생산이라 이름 불렀다’라는 글귀가 있다.이 산 정상에는 아직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 박혁거세가 처음 쌓았다고 전해진다.특히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물리친 곳으로 금오산에 있는 금오산성과 함께 경상도 산성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인동부읍지에는 임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크게 격파하고 이들의 병기인 조총과 창, 화살, 진천뢰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건을 얻었다고 전한다.홍의장군 곽재우가 산성에 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왜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흰말 등에 쌀을 쏟아 부었다는 미덕암(미득암)과 스님들과 박영 장군의 이야기가 전하는 땡그랑 바위는 천생산이 간직한 오랜 역사다. ◆천생산 중턱 오래지 않은 사찰 천룡사그런데 미덕암 아래 산 중턱에 오래되진 않았지만 범상치 않은 작은 사찰 하나가 있다.천룡사(경북도 구미시 천생산길 200)다. 1951년 이춘백 화상이 법당을 세우고 창건했다.구미지역 조계종단의 대부분 사찰이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인 데 비해 천룡사는 제9교구 본사인 팔공산 동화사의 말사이다.사찰을 지을 당시 경내에서 고려시대의 와당과 탑신, 축대 등의 유물이 발견됐다. 구전에 의하면 이곳에 약사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그래서 고려 중기까지 이곳에 대규모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커다란 두 눈 부릅뜬 용 한 마리, 천룡사 지킴이가을 어느 날, 선선한 바람에 몸도 마음도 가볍다. 오후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산을 오른다.천생산 삼림욕장 옆 주차장에 주차한 후 조금은 거칠지만 포장된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길을 오른다.길옆 나무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노랗고 빨갛게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멀리 천생산 정상, 미덕암이 낙동강 쪽으로 고개를 쭉 빼고 내려다본다.미덕암을 길잡이 삼아 조금 더 길을 오르니 오른편으로 제법 널찍한 공간이 나온다. 아마도 주차장 용도로 사용하는 곳인가 보다. 그곳을 지나니 큰 눈을 부릅뜨고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이 양각된 용이 객을 맞는다. 음지쪽에 있어서인지 온몸이 이끼로 물든 용은 입 안 가득 여의주를 물고 있다.보는 방향에 따라 용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건 착각일까. 너무나 생생한 표정에 살아있는 이끼로 치장한 탓에 금방이라도 자신을 붙들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기상이다.용은 절대 권력자를 표현하는 상징이다. 왕과 관련된 용포와 용안, 용상 등이 그것. 그런데 불교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용이다. 용은 고대 인도의 사신(蛇神) 숭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우리나라에는 대개 통일신라를 전후해 불교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사찰의 창건과 관련된 것이 많은데 황룡사, 구룡사 등과 같이 용을 사찰의 이름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물론 천룡사도 마찬가지다.용은 불교에서 불법의 수호자로 여겼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왕, 용신은 팔부중의 하나로 불법을 수호하는 반신반사이다. 팔부중이란 천, 용, 야차, 건달파,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를 말하는데 신앙적인 면에서 호불신이나 호법신들이다.또 불교에서의 용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청중과 불법, 도량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찰 곳곳뿐만 아니라 탱화 등에서 용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찰 입구는 물론 법당 전면 기둥과 처마 밑, 법당 안의 닫집, 천장, 기둥, 벽, 그리고 계단 소맷돌 등에서도 볼 수 있다.법당 기와 암막새에 용 문양을 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는 법당을 상서롭게 유지하고 건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다. 용은 이외에도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목조건물인 사찰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주술적 의미로 사찰 곳곳에 용을 배치했다는 해석도 있다.아무튼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을 불법의 수호자로 만든 것은 불자들의 종교적 열망이었을 것이다. 이런 열망이 사찰을 더욱 청정하고 신비롭게 만들고 있다.천룡사에는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입구의 용 외에 삼성각 오르는 계단 앞에도 장난스럽게 생긴 용이 있다. 여의주를 물진 않았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새운 채 크게 벌리고 있다. 그리고 불자들이나 방문객들이 던진 동전 몇 닢을 넙쭉넙쭉 받아먹는다. ◆마애미륵불상과 큰 규모의 천생미륵대불천룡사를 지키고 있는 용 바위를 지나 계단을 오르다 보면 햇살을 등지고 앉은 마애미륵불상을 만난다. 마애미륵불은 자연 암벽을 갈거나 깎아서 만든 불상으로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고 56억7천만 년이 지난 후 사바세계에 출현해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이다.1989년에 천룡사 대웅전 아래 큰 암벽에 조각한 높이 2.7m의 마애미륵불상은 기도하는 이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 사찰을 지키는 쌍사자상을 지나면 넓은 마당과 종무소가 나온다.넓은 마당에서 천생산 정상을 올려다보면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큰 규모의 건물이 있다. 2층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인데 이 건물이 이춘백 화상이 이곳에 있던 기와집을 걷어내고 지은 대웅전이다. 절집 같지 않은 전각이다.종무소를 지나 국화향기를 맡으며 대웅전으로 향하다 보면 엄청난 규모의 대불을 만난다. 1992년 신도들의 도움으로 화강석으로 만든 15m 높이의 천생미륵대불이다. 그 높이만큼이나 장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이곳을 지나 오른쪽으로 향하면 극락전과 삼성각이 나온다. 전각의 모습을 갖춘 극락전과 삼성각의 처마는 한복의 아름다운 선 만큼이나 유려하고 아름답다.또 새로 칠한 듯 단청이 곱다. 극락전에서 조금 떨어져 삼성각을 올려다보니 파란색 하늘이 감싸 안은 천생산 정상 미덕암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원성대왕-③비극의 서막…저무는 영광의 시대…두 아들에 손자까지, 펼치지 못한 삶 끝나버려

원성왕은 통일신라 하대 비극의 서막을 열었던 왕으로 분류된다. 그는 혜공왕을 시해한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면서 왕위에 오른 선덕왕과 함께 최고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상대등의 자리에서 병권과 내정을 주무르면서 본격적인 왕좌에 오르기 위한 발판을 굳혔다.적절한 기회를 맞아 선덕왕의 죽음에 이어 38대 원성왕으로 등극한 김경신은 왕권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이어 장남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구도를 구축하기 위해 맏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일찍 죽어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그러나 둘째 아들마저 죽자 첫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준옹을 태자로 책봉해 그가 39대 소성왕으로 왕위를 이었다. 소성왕은 사형제의 맏이였다. 왕위에 오른 소성왕은 1년 만에 죽었다. 이어 소성왕의 아들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등극했지만 그의 삼촌들에게 살해됐다.김언승은 동생들과 함께 조카를 죽이고 41대 헌덕왕으로 왕좌에 앉았다. 17년의 왕위에 이어 헌덕왕의 동생 수종이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이어지며 신라 하대는 비극적인 내전에 휩싸였다. 이러한 신라 하대 비극은 원성왕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사가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삼국유사: 원성왕의 죽음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에 있다. 최치원이 쓴 비문이 새겨진 비가 서 있으며 또 보은사와 망덕루를 새로 지었다. 할아버지 훈입 잡간에게 흥평대왕, 증조할아버지 의관 잡간에게 신영대왕, 고조 할아버지 법선 대아간에게 현성대왕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 잡간이다.-이른 눈제40대 애장왕 마지막 해는 무자년(808)인 데 8월15일에 눈이 내렸다. 41대 헌덕왕 원화 13년은 무술년(818)인데 3월14일에 눈이 많이 내렸다.제46대 문성왕 기미년(839) 5월19일에 눈이 많이 왔으며 천지가 어둡고 깜깜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신라 하대 비극의 서막원성왕은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통해 관리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써가며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많은 심력을 기울였다.외교문제는 공격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유한 사신들을 당나라와 일본에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내적으로는 강한 나라의 이미지를 풍기기 위해 잦은 사냥을 통해 건재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어 나라의 보물 만파식적의 신묘한 힘을 보여 외부의 침략에 대한 사기를 일찍이 차단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맏아들 인겸을 태자로 일찌감치 지정 공표했다. 원성왕은 사냥에 태자를 비롯한 왕자들을 대동해 왕손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원성왕은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매월 삭망일 두 차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사냥을 했다.원성왕은 매월 초하루에는 어전 회의를 마치고 대신들과 함께 일찍 사냥에 나서 그달의 국운을 점치기도 했다. 사냥이 기분 좋게 잘 되는 날은 늦게까지 축하연을 열어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그의 보름날 달밤사냥이 문제를 가져왔다. 초하루의 사냥과 다르게 보름날의 사냥은 달이 높이 걸리는 시간에 맞춰 야간사냥으로 진행됐다. 큰 짐승을 잡기라도 하는 날에는 밤이 늦도록 주연이 이어졌다. 원성왕의 이 같은 사냥에 대한 취향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의 아들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통일신라 하대를 비운의 시대로 흐르게 했다.선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으로 내정되어 있던 김주원의 도움으로 가족들의 생명을 건지고 벼슬길에 오르게 된 김제공은 김주원의 은혜를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김주원이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피신해버리자 김제공은 스스로 김주원과의 관계를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이어 제공은 원성왕에게 거짓 충성을 하면서 눈에 들어 각간의 위치까지 올랐다.김제공은 거처를 왕경숲 근처로 옮기고 스스로 궁술을 익혔다. 그리고 무인들과 벼슬아치들을 암암리에 포섭해 세력을 키웠다. 그의 목적은 원성왕의 세력을 꺾고 김주원을 모셔오는 것이었다.그러나 원성왕의 세력을 휘어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성왕 김경신은 타고난 무인체질로 활을 잘 다룰 뿐만 아니라 태자 인겸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왕가로 뿌리를 내리며 튼튼한 울을 두르고 있었다.김경신이 오랜 장계를 통해 왕좌에 올랐듯이 김제공 또한 그의 튼튼한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장계를 세우고 곳곳에 복수의 함정을 마련했다.첫 번째 김제공의 복수는 쉽게 진행되는 듯했다. 792년 원성왕이 즉위 8주년을 기념해 전개하는 야간사냥 날이었다. 왕이 태자와 왕자를 대동하고, 대신들과 함께 대대적인 규모의 야간사냥을 축제로 진행하는 때를 기회로 잡았다. 많은 군사가 동원되고 무인들이 대거 참여해 위험했지만 오히려 반란세력들도 자연스럽게 사냥에 참여할 수 있었다.제공의 세력은 이날 왕과 태자를 한꺼번에 사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준비한 사냥감을 풀어 왕과 왕자팀이 두 곳으로 갈라지게 하고는 미리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이날 사냥에서 왕은 충신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태자 인겸은 사냥감과 함께 함정으로 만들어놓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사고였다. 김제공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덫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원성왕 또한 워낙 자신만만한 시기였고, 반대세력 또한 드러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반란에 대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태자를 잃어버린 원성왕은 큰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 첫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준옹에게 벼슬을 주어 궁궐 가까이 두었다. 왕권 강화를 위한 구도를 한층 더 두텁게 했다.원성왕은 태자를 잃은 이후 사냥의 횟수를 크게 줄였다. 즐기던 야간사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천상 무인이었던 거친 기질의 원성왕도 나이가 들면서 차츰 기운이 쇠락해 갔다. 둘째 아들에 대한 왕위 수업과 손자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원성왕의 아들을 잃은 슬픔이 잊혀 갈 무렵 김제공의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원성왕이 즉위 10주년을 맞은 해였다. 원성왕이 즉위 10주년 축하연을 조촐하게 궁 안에서 열었다. 축하연에 이은 야간사냥에서 아들을 잃었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조촐한 행사로 진행했다.축하연에 참석했다가 늦게 동궁으로 돌아가는 태자의 말이 목에 피를 토하며 넘어졌다. 술에 취한 태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순간 김제공 무리들의 비수가 원성왕 두 번째 아들의 목줄을 끊었다.궁궐에서는 잠든 왕실로 잠입하려던 김제공의 무리들이 기다리던 왕의 비밀 호위군사들에게 포박을 당했다. 10년 복수의 칼을 갈며 준비했던 김제공의 난은 왕자 두 명을 저승으로 보내면서 원성왕의 마음에 비수를 던지는 일로 막을 내렸다.원성왕 또한 8주년 축하연의 사냥에서 입은 상처와 연거푸 아들을 잃은 심적인 충격으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원성왕은 즉위 14년인 798년 손자 준옹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그의 장계에 종지부를 찍고 저승으로 떠났다.제39대 소성왕부터 제52대 효공왕까지 신라의 왕위는 모두 원성왕의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건선…청결하지 않아 생기는 병 아냐…완치보단 ‘조절’에 중점

건선은 전염성이 없는 만성·재발성 피부병으로 빨갛게 튀어나온 부위에 하얀 각질이 생겨 거칠거칠한 상태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두피(머리)와 팔꿈치, 무릎 등에 대칭적으로 잘 생기지만 다른 어떤 부위에도 발생할 수 있다. 전신적으로 발생하는 경우에는 장미색 비강진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고, 간혹은 피부진균증 등 다른 질환과 혼동될 수도 있다. 특이한 형태로 고름 주머니가 잡히는 경우도 있고, 손톱에 구멍이 생기거나 두꺼워지거나 들뜨는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드물게는 손이나 발에 관절염이 나타나기도 한다.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인구의 1%가량이 앓는 비교적 흔한 피부병 중의 하나다. 성별에 따른 차이는 없고 대개 20대에 많이 발생한다. ◆원인건선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피부의 각질층이 정상인보다 몹시 빠르게 증식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는 유전적인 소인과 환경적인 인자가 유발 인자로 작용하며, 면역학적 요인에 의해 각질세포의 증식과 염증 반응이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세균의 감염(특히 편도선염)이나 피부의 상처, 정신적인 스트레스, 계절에 따른 영향, 일부 약물 등에 의해 병이 유발되거나 악화되기도 한다. 건선은 절대로 전염되지 않으며 청결하지 않아서 생기는 병이 결코 아니다. ◆증상건선은 좋아질 때도 있고 나빠질 때도 있기 때문에 그 심한 정도가 일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증세가 심하지 않아 내버려두거나 가볍게 치료해도 좋아진다. 건선은 대개 환자의 전신 건강에는 큰 영향이 적지만, 피부 병변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간혹 관절염이 심한 경우에는 건선관절염을 의심해야 하므로 전문병원을 방문해 검사해 보는 것이 좋다. 건선이 매우 심하게 진행되면 박탈피부염이 생길 수 있다. 발열과 오한 증세와 함께 전신적으로 피부가 붉어지며 인설이 두껍게 벗겨진다. 심해진 건선은 필요시 입원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어 전문의 진료를 받는 것이 좋다. ◆치료건선이 완전히 생기지 않도록 하는 치료법은 아직 없다. 하지만 건선의 병변을 좋아지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없어지면 환자에 따라 몇 주 내지 수 년간을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도 있다. 치료의 근본 목적은 피부 각질세포의 분열을 억제하는 데 있다. 병변이 일단 없어지면 치료를 중지할 수 있고 재발하면 다시 치료하면 된다. 건선의 종류, 심한 정도, 발병 부위, 환자의 나이와 성별에 따라 적절한 치료 방법을 선택한다. 심하지 않으면 바르는 약으로만 치료한다. 스테로이드 연고는 장기간 사용하면 부작용이 생기므로 초기에 짧게 사용하고, 비타민D 유도체와 복합된 연고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 심한 경우에는 바르는 약에 광선치료를 한다. 광선치료에도 효과가 적은 경우에는 전신적인 약물 치료를 시행하고, 그래도 효과가 없다면 생물학제제를 사용한다. 건선은 완치보다는 조절한다는 생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무리한 치료로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운전 중 눈은 ‘뻑뻑’, 시야는 ‘흐릿’, 안구건조증 주의

대구의 개인택시 운전기사인 김모(74)씨는 최근 영업을 쉬는 날이 잦아졌다.장시간 운전 시 눈이 쉽게 충혈 되고 피로해졌으며 설상가상 눈물까지 계속 차올라 시야확보가 어려워져 운전 중 종종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김씨가 느낀 증상은 눈물흘림증인데 그 원인으로 안구건조증을 들 수 있다.안구건조증이 있는 눈은 눈물막이 상대적으로 얇고 빨리 마르기 때문에 눈을 보호하는 기능이 떨어져 있다.안구건조증으로 눈 표면 보호기능이 떨어지면 눈은 사소한 자극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된다.지난 9월 대구지역 50대 이상 택시운전기사 5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 한 결과 평소에 느끼는 눈 증상은 어떤 것이 있냐는 질문에 대부분 김씨처럼 눈이 쉽게 피로해지고 찬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흐른다고 답했다.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 빅데이터 연령대별 진료현황에서 2017년 안구건조증 전체 진료인원(231만2천309명)의 19.8%가 50대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60대 (16.9%)와 40대 (16.3%) 순으로 집계됐다.이처럼 고 연령대로 갈수록 안구건조증 진료인원이 많아지는 추세는 ‘노화’와 관련이 있다. 노화는 안구건조증의 가장 흔한 원인으로 정상적인 노화 현상에 의해 눈물의 분비량이 감소하고 눈물의 상태가 변하게 된다. 또 노화와 관련하여 눈꺼풀이 안쪽이나 바깥쪽으로 말리면서 눈물 배출이 지연되면 염증 물질이 눈물관을 통해서 잘 빠져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이로 인해 장기간의 염증 노출로 안구표면에 손상이 생기고 기존 안구건조증이 더 안구건조증이 발생하거나 악화될 수 있다.평소 안구건조증을 잘 관리하는 것이 운전 시 사고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결과도 나와 있다. 미국의 ‘Ophthalmology Trusted Source’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안구건조증이 있는 운전자는 운전 시 반응속도가 느려져 횡단보도나 도로 위의 장애물을 빨리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안구건조증이 운전에 미치는 영향안구건조증환자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 빅데이터의 연도별 안구건조증 환자 추이에 따르면 2013년 212만4천150명에서 2017년 231만2천309명으로 4년 새 8.9% 증가했다.안구건조증은 다양한 증상이 있지만 주로 눈을 깜빡일 때마다 모래알이 들어간 듯 한 이물감으로 불편한 느낌이 든다.눈이 항상 건조한 상태에서 눈의 피로는 더해져서 눈을 잘 뜰 수 없으며 심한 경우 충혈, 두통 등의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특히 안구건조증이 지속되면 눈 표면이 손상되기 때문에 시력저하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는 운전 중 시야 확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누네안과병원 최재호 원장은 “부드럽게 눈을 깜빡이고 또렷하게 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눈물 때문이다. 눈물이 각막 위를 고르고 부드럽게 덮고 있어 매끈한 굴절층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우리가 뚜렷한 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고 설명했다.안구건조증 증상은 눈물 막의 기능이 떨어져 시력이 떨어질 수 있다. 눈이 건조해지면 각막의 표면이 매끄럽지 못해 빛 번짐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야간운전 시 불편함을 초래한다. 또 안구건조증이 생기면 눈부심을 많이 느끼게 되는데 해가 강하고 밝은 날, 또는 도로 주변에 눈이 쌓여있을 때 눈부심을 더 심하게 느낄 수 있다. ◆증상에 따른 맞춤형 치료 중요안구건조증을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 보니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눈이 건조해지는 증상이 아니라 염증성 질환이기에 증상에 따라 맞춤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보통 증상이 경미하면 인공 눈물만으로 치료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라면 보다 근본적이고 적합한 치료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안구건조증 치료로 ‘IPL레이저’와 ‘리피플로우’ 등이 시행되기도 한다.최재호 원장은 “리피플로우는 눈꺼풀에 열과 압력을 함께 가해 눈꺼풀의 막힌 기름을 배출해 정상적인 기름이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통증이 거의 없이 한 번의 시술로 오랫동안 촉촉한 눈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그 외에도 평소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온열마사지요법은 눈물층 안정화를 도와 안구건조증을 호전시킨다.집에서 눈꺼풀 위에 따뜻한 물수건을 5~10분간 올려놓은 후 막힌 기름샘을 녹여주고 눈꺼풀을 마사지해 변성된 기름을 배출시킨 후 면봉이나 거즈 등으로 속눈썹 주변의 노폐물을 닦아내면 더욱 좋다. ◆안구건조증 있다면 운전은 이렇게평소 안구건조증이 있다면 건조한 환경을 피하는 게 중요하다.겨울철이 되면 히터와 같은 난방기 사용을 많이 하고 주변 환경의 수분 증발을 촉진시켜 건조하게 만든다.실내 난방기 영향으로 안구건조증이 심해진다면 인공눈물을 주기적으로 넣어주는 것이 좋고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도 안구건조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또 운전할 때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이는 횟수를 늘리는 것이 좋다. 라디오 광고가 나올 때마다 혹은 5~10분마다 한 번씩 눈을 깜빡이도록 노력해야 한다.운전을 잠시 쉴 때는 먼 산을 보거나 인공눈물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 곳을 바라보면 안구가 경직되는 것을 막아주고 눈을 깜빡이면 눈물 생성을 도와 눈의 노화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장시간 운전을 해야 할 경우에는 콘택트렌즈 대신 안경을 착용하는 것이 운전 중 눈의 건조함을 줄일 수 있다. 햇빛이 강할 때는 자외선 차단지수 기능이 있는 선글라스를 착용할 것을 권한다.도움말=대구누네안과병원 최재호 원장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주륵사 폐탑과 구미의 석탑…1천 년 넘은 폐탑지 큰 옥개석만 널부러져 어떤 비밀 안고 잠들었나

탑은 부처의 유골이나 유품 등을 모셔 두고 공양하기 위해 높게 만든 건조물이다.초기에는 부처의 사리를 묻고 돌이나 흙을 쌓아 만든 봉분 형태였다. 탑의 형태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인도의 탑(탑파, 인도어로 스투파)이 중국으로 전파된 후이다.중국은 황제가 정사를 보던 정전과 같은 궁중 건물을 명당 건축이라고 부르며 신성시했다.앞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라고 했는데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인들 역시 황궁과 같이 탑을 신성시했다.이런 탑의 형태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탑 형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대웅전 앞이나 사찰의 중심에 탑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탑은 대부분 석탑이다.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목탑은 조선시대 건립된 법주사 팔상전 하나다. 흙으로 만든 전탑은 안동 신세동의 7층 전탑 등 5기가 남아 있다.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석탑은 백제 후기에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탑이다.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고려중기 신륵사 다층 전탑, 경천사지 10층 석탑 등이 대표적인 탑으로 꼽힌다. ◆탑, 형태로 조성연대 구분오래된 탑 대부분은 홀수 층이다. 이유는 뭘까. 이는 주역과 관련이 깊다.중국 문화에서 세로는 하늘과 홀수·남자, 가로는 땅과 짝수·여자를 일컫는데 탑을 조성할 때도 이를 적용했다는 것이다.탑은 세로로 3·5·7·9·13 등과 같이 홀수로, 가로는 4각·8각·12각형 등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 원칙이 적용됐다.이 같은 원칙은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까지 탑을 제작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단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처럼 짝수인 경우도 있다. 이는 10이 주역에서 온전한 수를 나타내는 수이며, 고려말 원의 간섭기에 만들어져서라고 학계는 해석한다.또 탑은 그 모양을 보면 건립시기를 알 수 있다.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탑을 가장 아름다운 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탑은 기단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기단의 면석이 3개, 탱주가 2개였다는 점이다.또 옥개석은 한옥구조의 화려함을 모방해 옥개석 받침이 5개이다. 옥개석 받침은 건립 시기를 알아볼 수 있는 결정적 요소로 고려와 조선시대 옮겨오면서 그 숫자가 4개, 3개, 2개로 줄어든다.아름다운 탑은 어떤 모양일까.물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눈으로 봐서 시원하고 비율과 비례가 잘 맞는 탑이다. 흔히들 석가탑을 최고로 꼽는 이유는 눈으로 봐서 시원하면서도 진중한 면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들어서 탑의 형태는 자율적인 양식이 강조된다. 옥개석 받침도 5개에서 4개로 줄고, 층수도 3층에서 벗어나 다층 구조로 변한다. 모양은 통일신라의 석탑처럼 날씬한 것이 특징이다.조선시대 들어서는 이 같은 원칙이 사라진다.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조정은 물론 백성의 관심이 줄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것저것 섞인 듯한 그러면서도 무겁고 뚱뚱한 형태로 변한다.조선시대 석탑에 대해 자현스님은 ‘사찰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잘 차려진 한정식이 아닌 국밥처럼 여러 가지가 아무렇게나 섞여 있는 것”이라고 혹평했다.◆구미(선산)의 석탑그럼 구미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탑은 어느 것일까. 지역 향토사학자로 석탑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전정중 현일고 교사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만들어진 석탑 7곳을 구미지역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소개한다.죽장사지 오층석탑(국보 제130호), 낙산동 삼층석탑(보물 제469호), 도리사 석탑(보물 제470호), 강락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주륵사지 석탑(문화재자료 제295호), 죽림사지 사층석탑, 도중동 사지 석탑 등이 그것이다.그는 도리사 석탑과 도중동 사지석탑을 제외한 나머지 5개 석탑의 건립 연대가 통일신라시대라고 추정했다.그러면서 구미(선산)지역도 신라문화의 중심인 경주지역처럼 불교관련 유적과 유물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거대하고 웅장한 7개 석탑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치적 종교적 지배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했다.◆폐탑만으로 그 규모 짐작할 수 있는 주륵사 폐탑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산 123번지 상주∼영천 간 고속도로 너머로 아주 오래된 폐사지가 있다.선선한 가을 바람을 따라 도개면 다항마을을 향하다 주륵사 폐탑지라는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면 비포장길이 이어진다.이곳에서 450m 떨어진 곳에 1천여 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륵사 폐탑이 있다. 고속도로 박스를 지나 조금 평평한 곳에 주차하고 작은 하천을 건너 오르막을 오른다.가파른 오르막길 끝에 조금은 넓고 평평한 폐탑지가 있다. 1천 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켜 온 주륵사지 폐탑의 옥개석과 기단석 등이 널려 있다.폐탑지 주변엔 멧돼지들이 뛰어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 주변에 많은 묘소가 있는데 묘소에 사용된 석상 등이 주륵사지의 탑재와 기단석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주륵사 폐탑은 현재 남아 있는 옥개석의 규모로 짐작할 수 있다. 폐탑 옥개석의 추녀 너비는 제1지붕 돌은 236㎝, 제1지붕 돌의 5단 받침의 최하 너비는 144㎝로 매우 큰 탑 축에 든다.이를 근거로 학자들은 주륵사 석탑이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못지않은 대규모의 석탑이었으며 3층이나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옥개석 받침이 5개로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도 당대의 수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탑의 규모로 주륵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주륵사는 냉산을 마주한 청화산 중턱에 있다. 냉산에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아도화상이 건립한 도리사가 있다. 주륵사는 기록을 통해 흥망성쇠를 짐작할 수 있다.동국여지승람은 ‘주륵사는 냉산 서쪽에 있으니 고려 안진이 찬한 승 혜각비명이 있다’고 전하고 선산부사를 지낸 최현은 일선지에 ‘주륵사는 백마산(지금의 청화산) 아래 있으며, 고려 안진이 찬한 승 혜각비명이 있다.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지을 때 기와를 철훼하여 폐허가 되어 지금은 유지만 있다’고 기록했다.또 태종실록에는 ‘주륵사의 주산에 물에 솟아올라 모래가 무너지면서 절을 덮쳐 2명의 승려가 돌에 눌려 죽었다’고 한다.이처럼 주륵사는 여러 기록을 통해 실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통일신라시대 신라 불교 초전지며 성지인 구미에 건립된 후 고려 왕실의 불교 장려에 힘입어 큰 사찰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하지만 조선시대 억불숭유와 영남학파의 번성으로 움츠러들기 시작해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수리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최현이 선산 부사를 지낸 조선 중기에는 이미 폐찰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앞서 주륵사 폐탑은 남아 있는 석탑재, 특히 옥개석 받침돌의 크기로 미뤄 경주 석가탑과도 견줄 수 있는 큰 탑이라고 했다.제대로 보존됐더라면 신라불교 초전지인 구미지역의 자랑이 될 만하다.구미시는 기록에만 남아있는 주륵사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주륵사 탑을 복원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원성대왕-②외세의 간섭…호시탐탐 뻗어오는 검은 손, 금은보화로 눈 가리고 ‘만파식적’에 슬금슬금

원성왕은 즉위 이후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도입하는 등 제도를 정비했다. 당시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춘추를 풀어쓴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곡례, 논어, 효경 등의 책은 반드시 읽어야 했다.왕은 조상의 5묘를 만들어 왕의 권위를 높이는 일들을 다양하게 찾았다. 총관을 도독으로 고치고 재상과 중앙과 지방정부의 조직을 정비했다. 발해에 사신을 보내 외교를 두텁게 하고, 봉은사를 건립했다.원성왕은 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죽어 둘째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아들까지 차례로 죽어버리자 인겸의 아들이자 손자인 준옹을 태자로 삼아 나중에 39대 소성왕이 되었다.원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중국을 비롯 일본에서도 사신을 보내 보물 만파식적을 보고 싶어 하는 등으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연회 국사가 번번이 해결책을 내놓으며 나라의 위기를 극복했다는 야사가 설득력 있다.◆삼국유사: 신라 보물 노리는 외세왕은 진실로 잘되고 못 되는 변화를 잘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효양 대각간은 조정의 만파식적을 전하여 왕에게 넘겨주었다. 왕이 이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터이 받았고 그 덕이 멀리 빛났다.정원 2년은 병인년(786)인데 10월11일에 일본의 문경왕이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치고자 했으나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러갔다. 그러면서 사신을 시켜 금 50냥을 내고 그 피리를 보자고 했다. 왕은 사신에게 “짐도 윗대의 진평왕 때 있었다고 들었을 뿐이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오”라고 말했다.다음해 7월7일 다시 일본왕은 사신에게 금 1천 냥을 보내며 청하였다. “과인이 신기한 물건을 보고 돌려주려 합니다.” 왕은 저번처럼 사양하면서 은 3천 냥을 그 사신에게 내려주었다.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하게 하였다.왕이 즉위한 지 11년째인 을해년(795)이었다.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왔다가 보름을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 다음 하루는 두 여자가 궁 안에 들어와 “저희는 동지와 청지에 있는 두 용의 마누라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려와서 우리 남편 두 용과 분황사 우물 용 등 세 용에게 주문을 걸어 작은 물고기로 바꾼 다음 통에 넣고 돌아갔습니다”고 했다. 이어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을 붙잡아 주소서. 우리 남편들은 나라를 지키는 용입니다”고 청했다.왕은 쫓아가 하양관에 이르러 손수 잔치를 베풀면서 하서국 두 사람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용 세 마리를 잡아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만약 사실대로 이르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그러자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쳤다. 세 곳에 풀어주니 물살을 한길 남짓 튀기면서 기뻐 뛰며 갔다. 당나라 사람들이 왕의 명석함에 탄복하였다.왕이 하루는 황룡사의 승려 지해를 안으로 불러들여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승려 묘정이 매번 금광정에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안에서 잠겼다 올랐다 하였다. 묘정이 그때마다 남은 음식을 먹이며 놀았다. 50일간의 화엄경 강의가 끝나자 묘정이 자라에게 “내가 너에게 덕을 베푼 지 여러 날인데 무엇으로 갚아주겠니”라고 말했다.며칠이 지나 자라가 작은 구슬 하나를 마치 주려는 것처럼 뱉어냈다. 묘정이 그 구슬을 가져다가 허리띠 끝에 달고 다녔는데 그런 다음 대왕이 묘정을 보고 매우 아껴 내전에 불러들여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였다. 그때 잡간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그 또한 묘정을 아껴 함께 가도록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같이 당나라에 들어가자 당나라 황제 또한 묘정을 보고 총애하니 주변의 정승들이 우러러 마지 않았다. 점을 치는 신하 한 사람이 “이 승려를 살펴보니 하나도 좋은 관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들로부터 존경과 믿음을 받으니 반드시 특이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했다.사람을 시켜 검사해 보자 띠 끝에 작은 구슬이 보였다. 황제가 “짐이 여의주 네 낱을 가지고 있다가 지난해 하나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곧 내가 잃어버린 것이로구나”라고 말했다.묘정은 구슬을 얻은 일을 모두 갖추어 설명드렸다. 황제가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을 가만히 맞추어보니 같은 날이었다. 황제는 그 구슬을 두고 가라고 하였다. 다음부터 사람들이 묘정을 믿고 아끼는 일이 없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외세의 간섭원성왕은 즉위식에 이어 왕권 강화를 위해 축하연을 열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나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선보였다. 원성왕은 주연에서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직접 만파식적으로 태평가를 연주했다. 축하연에 참석했던 대신은 물론 모든 이들이 태평가의 연주에 맞춰 어깨동무하기도 하며 흥겨운 춤을 추었다.당시 축하연에 참석해 만파식적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술에 취했던 사람도, 근심 걱정이 많았던 사람도, 몸에 병이 들었던 사람도 모두 건강하게 활달해졌다. 축하연에는 당과 일본의 사신도 참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 만파식적의 신묘한 힘에 대해 보고했다.일본의 왕은 사신에게 50냥의 황금을 보내 만파식적을 한 번만 구경할 수 있도록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성왕은 일본 왕의 저의를 의심해 사신을 그냥 돌려보내고, 만파식적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어 깊이 감추었다. 일본의 왕은 끈질겼다. 다시 사신에게 1천 냥의 금을 주어 만파식적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원성왕은 끝내 거절하고 오히려 은 3천 냥을 주어 위로하며 돌려보냈다.당나라 사신도 황제의 명을 받아 신라 궁궐을 찾았다. 역시 만파식적을 빌려 가려는 수작이었다. 당나라 사신은 일본 사신들이 실패하고 돌아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원성왕의 측근에 있는 대신들에게 접근해 기회를 노렸다. 당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주술사들을 동원해 여차하면 술법으로 만파식적을 가져가려 했다.그러던 중 당나라 사신들은 만파식적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 영물이 신라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꿩 대신 닭이 아닌 봉황을 잡은 셈이었다. 당나라 사신들은 신라 궁성 주변에 웅크리고 있는 영험한 힘을 가진 세 마리의 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신시켜 호리병에 넣어 도주했다.용의 아내들이 이러한 사실을 원성왕에게 보고해 신라의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원성왕은 자신의 길을 안내해주던 도력 높은 연희 스님을 모셔오라고 명했다.신하들이 연희스님을 모시려 파발마를 출발시키려는 때 삿갓을 깊이 눌러 쓴 훤칠하게 키가 큰 스님이 “먼 길 가는 수고를 덜어주려 하오”라며 궁으로 안내하라 전했다.연희 스님은 원성왕의 부탁을 직접 받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가 사흘 만에 호리병 세 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왕을 대동하고 월지와 황룡사, 분황사를 돌며 호리병에서 물고기를 방사했다. 물고기는 청룡, 황룡으로 모습을 바꾸어 모두 거대한 용오름으로 한차례 춤사위를 보이고는 다시 연못으로 들어갔다.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해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수행하던 연회 스님은 원성왕의 부름에 거절할 수가 없어 국사의 직을 맡았으나 나라에 위기가 발생할 때에서야 해결책을 내놓곤 할 뿐 일체 국사에 간섭하지 않고 묵묵히 수행에만 정진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현실화되는 우주여행…다 같이 돌자 지구 한 바퀴

‘여행’은 ‘간다’라는 말보다 ‘떠난다’는 의미가 더욱 와 닿는다.개별 니즈(Needs)는 판이하겠으나 여행 자체로의 이미지라 함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곳에 도달하겠다는 명분보단, 지금의 자리에서 훌쩍 벗어나 훌훌 털고 떠나보리라는 홀가분함이 조금 더 맞닿아있지 않을까.언뜻 보면 말장난인가 싶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럭저럭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을 터다.하지만 그 같은 여행지가 산·들·바다, 특정 도시, 국가가 아닌 ‘우주’라면 여행의 근간부터 달라진다.파이는 넓어지고 규모는 크다 못해 무한정 해진 상황이 연출된다. 1990년대 초반 꽤나 인기리에 방영됐던 한 애니메이션 속 우주의 풍광이 지금의 내 눈앞에 펼쳐진다면 어떨까. 당시 기준으로 비춰볼 때 2020년은 이제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특수 임무를 띤 특별한 ‘우주인’의 전유물 정도로만 여겨졌던 우주로의 발걸음이 이제는 ‘민간 우주여행’의 캐치 프레이즈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물론 진정한 대중적 상용화의 과정에는 갈 길이 멀지만, 어찌됐던 현재의 우주여행은 ‘허상’, ‘공상’, ‘상상’ 정도로 치부되던 ‘감정의 산물’ 이 아닌, ‘현실’, ‘목표’, ‘가능’으로 점철된 ‘이성적 사고’로 탈바뀜 하기에 이르렀다.실제 ‘테슬라모터스’의 CEO로 우리에게 익숙한 ‘앨런 머스크’는 최근 민간 우주개발기업 ‘스페이스X’를 설립했다. 스페이스X는 달과 화성으로 발사하기 위해 고안된 유인 발사체 '스타십'의 시제품 공개 직후, 6개월 내 ‘우주 궤도’ 진입을 공언했다.영국 기업인 ‘버진 그룹’의 회장인 리처드 브랜슨은 ‘스페이스십2’ 라는 이름의 바야흐로 ‘여행을 위한 우주선’을 첫 출연시켰다. 이 우주선은 최근 음속의 약 3배를 상회하는 속도로 비행하며, 고도 약 52마일, 약 83㎞를 상공에 이르렀다가 지구로의 무산 귀환에 성공했다. 명실공히 ‘민간 우주선’의 첫 시험비행에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우리나라에서도 민간 차원의 우주산업에 가일 층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미래창조과학부는 대한민국의 독자적 기술력을 보유한 ‘중형위성’ 개발을 위한 기업공모에 들어갔다. 이 중형위성은 사실상 우주여행으로의 모멘텀은 아니다.정확히 말하면 차세대 ‘위성플랫폼’ 확보 및 ‘고정밀 공간정보’ 등을 위한 국토관측을 위함인데 우주산업에 민간의 참여가 시도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청사진은 어느 정도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오늘의 연재는 조금의 상상력을 가미해보자. 어느 날 감당할 수 없는 돈벼락을 맞게 돼 돈을 숨 쉬듯 써도 모자람이 없을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지구촌 갈만한 곳은 모두 눈도장을 찍어버린 터라, 무료해진 터에 무턱대고 이제는 ‘탈 지구화’를 선언한다.이 와중에 리처드 브랜슨의 스페이스십2가 시범 운행과 안전도 테스트를 완료 후 본격적인 우주여행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우주 궤도를 약 한 달여간 유영하는 코스를 채택했다는 (여행)상품 설명을 들었다. 바로 계약을 했다. 이제 고전 개그의 유행어가 아닌 정말 ‘지구를 떠나버릴’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 한 바퀴에 1시간30분 걸려우주정거장을 통해 지구 지름을 모두 훑어 내려가는데 총 1시간30분이 소요됐다. 참고로 지구의 크기는 4만74㎞로 만약 동요 속 가사처럼 ‘지구는 둥그니깐 자꾸 걸어서’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보고자 한다면 약 417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물론 전제는 있다. 성인의 통상 걸음의 속도를 시속 4㎞ 정도로 보고 단 한 번의 쉼 없이 도보해야 한다.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말아야 하며 심지어 화장실도 금지다. 그리고 지구의 둥근 지름을 평평하게 펴낸 뒤 그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계속해서 걸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저 정도 시일이 걸린다는 계산이다.여기에서의 일출과 일몰은 약 20번 가까이 반복된다. 우리가 흔히 접해오던 태양 빛은 지구 대기를 통과해 우리 눈을 비추다 보니 그 광채가 통상 ‘눈부시다’ 정도였는데 이곳은 대기권 밖이다 보니 태양 빛의 여과가 이뤄지지 않아 창문조차 열기 두려울 지경이다. 지구에 돌아가거든 감히 ‘직사광선’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우주 정거장 속의 시간은 낮과 밤이 없는 터라 시간보다는 ‘날’의 개념으로 본다. 참고로 우주 정거장은 우주선이 부품을 쏴 올려 ‘도킹’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여기서 도킹은 우주선이 우주 공간 내에서 다른 비행체에 접근, 결합하는 일련의 작업을 의미한다.식사는 냉동 밥으로 해결한다. 잠은 나무처럼 서서 청해본다. 사실 옆으로 자나, 뒤로 자나 ‘무중력 상태’ 에선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중력 상태란 말 그대로 중력의 가속도가 ‘제로’ 화 돼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단계를 뜻한다.참고로 우주 비행을 위한 조건을 알려주겠다. 비록 여행이라 할지라도 그 장소가 우주인만큼 돈만 있다고 누구나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사양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암막의 수천, 수백 배에 이르는 우주 암흑 속에 본의로 갇혀있다보니 좋은 시력은 필수다. 아울러 극단적 고·저혈압자는 애초 여행대상에서 제외다. ◆천문학적 우주여행 비용웬만한 돈벼락을 맞지 않는 한 우주여행은 목표보단 꿈 정도로 설정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일단 우주정거장에서 로켓을 타고 갔다오는 왕복교통비만 우리나라 돈으로 700억 가까이 든다. 숙박비나 먹거리 등 기타 요소들은 제외한 금액이다.우주 정거장을 둘러본 후 지구 유영을 마친 이들은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다. 숙박비는 1인1박 기준으로 4천만 원을 우습게 넘어간다. 그런데 이것을 결코 비싸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우주라는 특수성을 덧붙여 산정된 금액인데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호텔로 일컬어지는 스위스 한 호텔의 경우 스위트룸 기준, 1인1박에 약 8만 달러(한화 1억 원 수준)를 청구한다고 하니, 이 정도면 ‘우주 프리미엄’ 치곤 꽤나 저렴(?)한 편으로 참고 넘어가보자. ◆우주서 미각 느낄 수 없어화성에서의 생존기를 그린 영화 ‘마션’을 보면 행성에 고립된 주인공이 그간 자신과 떠나간 동료들이 배설해 둔 인분을 활용, 화성에서 생성된 흙에다 이 인분을 깔아 거름으로 이용함으로써 감자의 싹을 틔우는 장면이 나온다.이처럼 모든 것이 열악한 우주여행에 인분은 ‘재활용의 가치’로 제격이다. 실제 전문 우주비행사들은 물이 부족한 우주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소변을 필터링한 후 물 대신 음용하기도 한다.이 물은 우주용어로 ‘재활용수’라고 하는데 재활용수의 추출방식은 우주비행사의 몸 밖으로 배출된 땀과 소변 등의 수분을 지정탱크에 저장 후 끓인 뒤 거기서 나온 수증기만 별도로 모아 여과해 내는 것으로 알려진다.우주 식품의 기본은 ‘건조’다. 단순 편의의 차원을 넘어, 음식의 분말 가루 또는 국물이 진공상태서 제멋대로 날아다니다 우주선 내부 기기에 잘못 스며들기라도 한다면 기기의 오작동을 일으킬 공산이 크다는 이유에서다.‘우주 미아’로 남기 싫다면 우주에서의 음식은 웬만하면 가루 등의 부스러기가 생기지 않을 고체 성분이 적당하며, 굳이 고집을 부려가며 액체를 섭취하고 싶다면 반드시 빨대를 이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다.우주인들이 우주 유영을 마친 후 지구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우주인 대부분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한 채 추풍낙엽 인양 휘청거리기가 일쑤다. 그도 그럴 것이 중력이 없는 곳에서 수일을 지내 오다 보니 칼슘과 질소의 양이 절반 이상 소멸됐기 때문이다.칼슘은 뼈와 치아의 구성 요소로 근육과 신경 기능을 콘트롤하고 혈액 응고에 영향을 끼친다. 질소는 단백질 상태로 직접 측정이 가능하게 혼합돼 있는데, 이는 곧 신체가 질소를 더 많이 배출한다는 의미와 단백질이 소비되는 지점이 일정 부분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우주에서는 ‘미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공기의 유무’로 설명될 수 있다. 미각의 주된 요소가 바로 냄새를 맡는 ‘후각’ 기능인데 후각의 원리 자체가 ‘냄새분자 확산’에 의해 생성되는 만큼 공기가 없는 상태선 분자확산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해석된다.우리에게 우주란 신비한 존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렵고 이질적 대상이기도 하다.이런 곳에 여행의 의미를 부여하는 게 지금으로선 조금은 허황되고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하지만 이것만 알아두자.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고 물을 돈 주고 사먹는 행위, 들고 다니는 휴대용 전화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활용 가능한 노트북의 출현은 더욱 허황되고 억지스러운 그저 ‘궤변’으로 치부됐다는 사실을.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