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에 닿으려면 갈령재를 넘어야 했다. 터널이 뚫렸으니 지나야 했다라고 쓰는 게 옳겠다. 갈령재를 지나며 아버지 기억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이곳은 젊은 날, 아버지가 넘나드시던 궁핍한 한시절의 현장, 산짐승이 수시로 출몰하는 험난한 산길이었다. 집안의 융성과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어느 한 순간도 무거운 등짐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저 세상 가신 아버지 그리움에 착잡해 하는 동안, 자주 망자의 곤궁한 나날을 잊고, 너무 자주 세속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곤 하는 나를 괴로워하는 동안, 네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닿기까지 5분 남짓 남았음을 알렸다. 큰길 가에 ‘조선십승지 천하명당 우복동(牛腹洞) 장각폭포·용유계곡’이라 쓴 안내 간판이 높다랗게 서서 상오리로 접어드는 길목임을 알려주었다. 우복동이란 무엇인가? 여기가 왜 천하명당 우복동인가? 칠층석탑과 우복동은 어떤 관계일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우복동은 무엇인가? 이런 저런 생각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천하명당 우복동우복동은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이다. 십승지지에 대한 관심은 조선후기, 정치·사회적 혼란과 민중들의 경제적 피폐에서 생겨났다. 외침으로 인한 전란과 정치적 환란의 굴곡에서 살림살이가 피폐하였던 민초들은 십승지를 찾아 보신(保身)의 삶을 일구어 나갔던 것이다. 세속의 난리를 벗어난 곳, 소의 배 속 같은 편안하고 넉넉한 이상향이 속리산 우복동이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1856)에 의하면, 우복동의 지세는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화산, 광정마을), 견훤산성이 있는 장암리, 칠층석탑이 있는 상오리 일대로 추정한다. 이곳들은 속리산(1,058m), 청화산(984m), 도장산(828m)의 삼각형 꼭짓점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임진·병자 양란이 온 산하를 할퀴고 지나간 조선 후기 ‘정감록’을 신봉한 민초들은 식솔들을 이끌고 자신들이 추정하는 우복동을 찾았던 것이다. 천하명당 우복동은 어떤 모습일까? 마을 초입, 장각폭포가 발길을 사로잡았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흘러 내리는 6m 안팎의 폭포, 얼음 속을 부딪치며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청정했다. 수량이 많을 때는 한 폭으로 떨어지다가 수량이 조금 줄어 들면 그 모양이 두 폭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물이 떨어지는 곳은 소(沼)가 만들어졌고 주변은 자갈과 모래가 곱게 깔려 있다. 폭포 한편에 금란정(金蘭亭)이 서 있다.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와 ‘무인시대’의 촬영현장이다. 금란정은 1962년 상오리 윗마을과 아랫마을 어른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 금란정기는 “백두대간이 높은 구름과 짙은 안개 속을 장엄하게 꿈틀거리며 저 남녘의 지리산으로 힘차게 뻗어내려가니 수많은 태산 준령과 봉만이 생겨나고 이곳 속리에 이르러 천왕봉도 솟아났다. 그 아래 깊은 골에서 나는 옥같이 맑은 물이 장각골을 지나 낙동강으로 머나먼 길을 나서다가 갑자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만나 폭포를 이루니 장각폭포다” 와 같이 이곳 지세의 웅혼과 풍광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 아주 친한 친구 사이를 이르는 금란지교의 정신이 폭포 위에 세운 정자, 금란정 위에 앉아 있노라니, 쇠같이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의로 애환을 함께 했을 이 마을 사람들의 해맑은 모습들이 어른거렸다.◆오랜 경전 같은 느낌‘경천애인(敬天愛人)-장각동 신선(神仙)마을’! 화강암에 굵게 새긴 상오리의 명찰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을이면 신선이 살겠고, 신선이 산다면 우복동이 아닐까. 화북면 상오리 699번지, 양지바른 언덕에 보물 제683호 칠층석탑(1980년 지정)이 서 있었다. 오래된 경전 같다는 느낌이었다. 하늘로 높이 솟은 몸체는 장중하고 엄정했다. 어린 날, 내가 기대었던 아버지 뒷모습 같았다. 기품 잃지 않고, 세월의 풍상을 살아낸 고적한 선비의 풍모였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높이 9.2m, 7층의 탑신(塔身)으로 세워진 칠층석탑, 기단은 여러 장의 판돌로 이루어졌고 탑신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일정 비율로 줄어들었다. 1층 몸돌은 3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고 네 모서리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다. 동쪽 면에는 문짝 모양(門扉形)의 조각도 있다. 2층 이상은 지붕돌과 몸돌을 하나의 돌로 구성한 특징이 보인다. 얇아보이는 지붕돌은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뚜렷하다. 밑면의 받침은 5층까지는 5단을, 6, 7층은 4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탑신의 휜칠함이 돋보이는 탑으로, 크기가 장중하고 전체적인 균형의 정제미가 뛰어나다는 평가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비천사 혹은 장각사'누가 이 탑을 세웠을까? 고려 때 창건한 비천사(備天寺), 또는 장각사라는 절이 이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웅장한 탑의 규모로 보아 비천사 또한 대사찰이었을 것이다. 스님들의 목탁 소리가 이 골짜기를 일깨우고 다독이고 어루만졌을 것이다. 탑돌이를 하고 있노라니 법고 소리를 듣기 위해 찾았던 어느 사찰에서의 한 때가 떠올랐다. 아픈 시인과 아프지 않은 시인과 물소리와 손잡고 우리는 그날 법고 소리를 들으러 갔었다. 아픈 시인의 어눌은 적막했고 아프지 않은 시인의 미소에는 햇살이 튕겼다. 아픈 중생을 위해, 아픈 사물을 위해, 아픈 세계를 위해 젊은 스님 두 분이 번갈아 법문을 외었다. 오로지 리듬뿐인 법문 소리는 아마도 아픈 중생과 아픈 사물과 아픈 세계를 데리고 서방정토까지 갈 것이었다. 북을 두드렸다. 한 스님이 어루만지고 두드리고 폈다. 또 한 스님이 다시 아픈 세상을 어루만지고, 막힌 세상을 두드리고, 구석진 세상을 멀리 멀리 폈다. 또 한 스님이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어루만지고, 잃어버린 시간의 벽을 두드리고, 검은 시간의 골짜기를 환하게 폈다. 고려적 이곳 비천사의 저녁 예불도 그와 같이 국태민안을 발원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비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고 한다. 탑 또한 무사할 리 없었겠다. 일제강점기가 무너뜨린 칠층석탑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77년 복원되어 옛모습을 찾았다. 이곳이 천하명당 우복동이라면 왜, 왜구의 침략을 피하지 못했을까! 옛날 상주 지역은 군사 요충지여서 임란의 피해가 여간이 아니었다. 이 지역의 선비였던 조정은 그의 ‘임난일기’에서 “오후에 길을 떠나 속리산에 도착하여 자주(慈主)를 뵈었는데, 큰 절에는 역질이 크게 번졌으므로 동암(東庵)으로 사저를 옮겼다. 심중(審中)의 병은 차도가 많이 있으나 다만 원기가 극도로 쇠약하여 소생되기가 쉽지 않으니 염려스러웠다. 자주(慈主)께서 부리는 노복과 정자댁(正字宅)의 노비 등 8, 9명이 모두 역질에 걸렸는데 대산(大山)과 검시(儉是)는 이미 작고하였고, 그 나머지도 위석(委席)해 누웠다고 하였다. 병이 위중할 뿐만 아니라 양식이 떨어져 구원할 길이 없었으니, 병이 수월하다 하더라도 굶주리는 것이 뻔한 일이었다. 마음이 아픈 나머지 걱정스러움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선조 26년 2월 18일)”와 같이 7년 여에 걸친 임란의 폐해와 극에 달한 민초들의 굶주림을 기록하고 있고, 우곡은 ‘난후환고거’(亂後還故居)에서 “옛 마을 황량한데 새들만 지저귀고, 뜰 가득 잡초 자라 인적도 적적하네./ 죽잖아 터럭은 서리 같은데, 나랏일 아직도 위태해 꿈속 혼이 놀라네/ 아들 아비되어 살아있음 한스러운데, 손자 없는 자식 묻자니 말 앞서 눈물일세/ 진종일 꽃지는 푸른 산 속에, 외로이 창천을 우러러 문을 닫지 못하네” 와 같이 민초들의 비극적 참상을 아파하고 있다. ◆혼자 서 있는 칠층석탑우복동은 어디일까? 오래된 경전처럼 세월의 우여곡절과 세상의 얽힌 이치를 간직한 칠층석탑마저 묵묵부답이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리라. 속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안내 표지판인 ‘상주 용유구곡 트래킹길’에는 “조선 후기의 묵옹 승요좌가 1703년 용유동의 아홉 굽이를 정하고 용유구곡을 경영했다는데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흔히 용유동이라 하면 우복동임을 알리는 동천석에서부터 병천정사를 지나 하류의 용추폭포까지를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 참조해 보면 칠층석탑이 서 있는 상오리에서 속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골짜기 어디쯤이 우복동일 것이다. 그곳 생김새가 사뭇 궁금했지만 눈덮인 천왕봉 찬바람이 발길을 가로막았다. 예불소리 멎은 지 오래인 곳, 비닐하우스와 채마밭 한 가운데 우두커니 혼자 서 있는 칠층석탑이 외로워 보였다. ‘경천애인 신선마을’ 상오3리를 다녀오는 길에 서애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을 생각했다. 유성룡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도 안정되고 튼튼해진다는 유교적 통치이념을 임금보다 더욱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부끄러운 마음을 길러 흐린 풍속을 깨끗이 하고, 바른 형벌로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 하고 학문을 이끌어 선비의 기풍을 떨치게 해야 한다’는 세 가지 덕목을 선조에게 제안한다. 우이독경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팽개치고 저 혼자 살겠다는 후안무치의 임금이었다. 전란 초기 선조는 신립의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조정을 버리고 도망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분개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든다. 난리 중에도 임금은 적을 물리칠 방안보다는 도망칠 계획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도망친다’는 말과 도망치는 행위의 부끄러움! 왕조가 아닌 민주공화정의 주인인 우리는 그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칠층석탑에게 물어볼 일이다. 애초에 탑이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조형물이었지만, 다시 그것은 정성을 한데 모아 신앙의 표적을 마련한 염원의 상징이자 정신적인 지표일 터, 천하명당 우복동이 어디냐고 다시 물었다. 묵묵부답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우복동은 용유계곡 어디쯤, 지도 위의 장소가 아니었다. 눈 덮인 산정 천왕봉을 닮으려는 삶의 자세와 등짐을 나누어 지려는 공동체의 선한 의지가 생성하는 공간이 천하명당 우복동이었을 테니까. 짐짓 우복동이 어디냐 물었던 내 질문은 처음부터 억지춘향이었다. 경천애인으로부터, 가파른 삶의 갈령재를 넘는 민초들의 등짐으로부터, 오래된 경전처럼 서 있는 칠충석탑의 외로움으로부터, 속리산(俗離山) 천왕봉 청정(淸淨)으로부터 너나 없이 도망친 지 오래이니, 임란을 맞은 선조가 그랬듯 저만 살겠다고 앞다투어 도망치는 세태이니! 누구라서 천하명당 우복동을 찾을 수 있겠는가.강현국│시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