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보리피리」(인간사, 1955)※ 인환(人寰) : 사람들이 살고 북적대는 곳 ※ 기산하(幾山河) : 많은 산과 들보리는 늘 쌀보다 열등한 잡곡이었다. 맛도 모양도 별로인데다 근기도 없다. 따라서 인기 없는 곡식으로 환영받지 못했다. ‘보리자루’마저 ‘꿔다놓은’ 듯이 떳떳하지 못했다. 쌀이 떨어지면 목숨을 연명하고자 마지못해 보리를 먹었다. 보릿고개란 말만 들어도 가난해서 굶주리던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 짓는다. 설상가상 그 모양새마저 요상해 남성우위시대 여성을 비하하는 상징물로 통용됐다.산속이나 골짜기에 숨어든 나환자들은 논농사보다 밭농사를 했을 법하고, 그 결과 보리를 주식으로 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그리고 보리밭은 보통 한적한 산기슭에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서리하기 용이한 곳이고, 몸을 숨기고 있기 좋은 곳이다. 보리밭에서 나환자를 봤다는 얘기를 들었던 유년의 기억도 나환자와 보리의 친연성을 뒷받침한다. 그런 사연으로 보리피리 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애간장을 끊는지도 모른다.항간에서 경상도사람을 ‘보리문둥이’라 한다. ‘문디자식’, ‘문디가시나’처럼 상황이나 뉘앙스에 따라 욕설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가까운 사이에서 친근감을 나타내는 말로도 흔히 사용된다. 그 어원이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문동(文童)이가 변형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통상 표면적인 뜻이 먼저 와 닿는다. 보리만 먹는 문둥이란 뜻이다. 경상도엔 산지가 많아서 보리를 주식으로 했다는 점, 보리를 주식으로 한 사람은 나환자였다는 점 등은, 견강부회일 수 있겠지만, ‘보리문둥이’를 직설적으로 분석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보리는 설움이다.보리피리에서 벌써 한 맺힌 삶과 처절한 슬픔이 묻어난다. 씩씩하게 뛰놀던 고향의 봄날 언덕풍경이 떠오르면 보리피리 한 곡조로 그리움을 달랜다. 어릴 적 고향산천에 피어있던 개나리와 진달래가 눈앞에 아른거리면 보리피리 한 곡조로 마음을 다독인다.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울고 웃었던 추억이 보리피리 곡조를 타고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격의 없이 우정을 나눴던 벗들과 괜스레 가슴 설레게 했던 소녀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흉한 몰골로 산에서 산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가 처량하다. 명일도 없고 기약도 없는 세월이 한없이 서럽다. 그동안 흘린 눈물을 쌓아 놓으면 산이 될 것이고, 흘러내려 모인다면 강이 될 것이다.보리피리 소리를 ‘피―ㄹ닐니리’로 분해함으로써 몸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표현해내고자 시도했다. ‘피’와 ‘리’ 사이에 ‘-ㄹ닐리’라는 형태소를 삽입해 피리소리로 보듬은 감상을 시각적으로 처리한 점은 순발력과 재치가 넘치는 착상이다. “천형(天刑)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초목과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라는 말이 가슴을 엔다. 나병을 앓아보지 않고선 그의 시를 온전히 감상하기 힘들 거란 생각이 가슴 아프다.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