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24대 진흥왕은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왕은 어머니가 섭정을 하는 동안 계부 이사부와 귀족들이 휘두르는 권력다툼을 지켜봤다. 왕은 성인이 돼 친정을 시작하면서 정복군주로 나서 백제, 가야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한편 왕권 강화를 위해 제도적인 정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중앙권력의 핵심세력으로 기능하던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도 정복전쟁의 최일선으로 내몰아 귀족들의 세력을 적절히 견제했다. 왕권의 안정적인 성장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흥륜사와 황룡사 건설 등으로 불교 중흥에도 심력을 쏟았다. 진흥왕은 백제와의 결혼동맹을 깨면서 정복군주로 나서 신라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고, 화랑제도 창설, 불교진흥, 국사 편찬 등의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은 평화롭지 못했다. 후궁 미실이 화랑, 귀족세력과 결탁하면서 왕권을 탈취하고, 진흥왕을 흥륜사에 감금해 4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했다. ◆삼맥종 7세에 왕으로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공포해 나라의 기틀을 안정적으로 다잡아가려 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동생에게 딸을 시집 보내 세력을 두텁게 했다.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은 삼맥종의 아버지 입종갈문왕이 4살 된 아들을 두고 죽자 이사부를 남편으로 맞아 세종, 황화, 숙명, 송화공주 등을 낳았다. 지소부인이 이사부를 지아비로 맞아 들인 것은 자신의 아들 삼맥종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이사부의 권력을 이용하려는 속셈이 작용했다. 지소부인의 큰 아들 삼맥종은 왕손으로의 자질을 타고났다. 태어나면서 근골이 튼튼하고,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총명하며, 무예에 대한 이해력도 높아 여섯 살에 벌써 어른을 상대로 비무를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지소부인은 뛰어난 아들이 자라는 것을 보며 왕위에 대한 욕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실질적인 중심세력을 가진 이사부를 지아비로 맞아 들이려 했던 것이다. 이사부는 이미 법흥왕 말기에 병권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세력가로 등장해 신라의 대소사는 그의 입김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사부는 금관가야를 합병하고 구형왕의 아들 김무력의 뛰어난 자질과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고 사사로이 모임을 가지면서 김무력과 그를 따르는 가야출신의 인물들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법흥왕은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양잠과 농사법도 크게 장려하는 한편 불교를 통해 심리적인 안정을 꾀할 수 있도록 흥륜사를 비롯해 곳곳에 절을 짓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왕은 특히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르던 이차돈의 목을 베고 불교를 공인한 일과 금관가야와의 전쟁에서 죽어 논두렁과 밭두렁에 방치된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매월 초하루에는 흥륜사에서 직접 법회를 열고 그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지소부인은 이사부와 가만히 의논했다.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귀족들의 체면은 생각도 하지 않고, 신주단지 마저 버리게 하는가 하면 귀족들을 변두리지역으로 내몰면서 세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만큼 마땅한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머리를 맞댔다. 이사부는 거칠부와 김무력에게 병사들을 흥륜사 주변에 매복하게 하고, 540년 4월 초하루 법당에서 제를 올리고 물러나는 법흥왕을 강당으로 안내하고는 조용하게 왕위 이양에 대한 뜻을 밝혔다. 법흥왕은 이미 딸이 “아버님의 뒤를 이어 이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는 삼맥종 뿐입니다. 외손이지만 아버님의 모습과 자질을 그대로 빼어박듯 닮은 삼맥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소서”라며 수차례 졸라왔던 터라 속으로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지에 병권을 비롯 인사권까지 거머쥐고 귀족들의 세력까지 아우르고 있는 이사부가 병사들을 배치시키고 은근히 압박해오자 법흥왕은 물리적 충돌 없이 편안하게 왕위를 이양하기로 했다. 법흥왕은 자신이 지은 흥륜사에서 법복을 입고 부처님에게로 귀의하고, 삼맥종은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사실상 이사부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정복군주진흥왕의 가장 큰 업적은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영토확장이다. 왕권을 강화해 안정적인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귀족세력들을 친화정책으로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진흥왕은 성인이 되면서 정복군주로 변신했다. 나라이름을 개국이라 짓고 의붓아버지로 등장한 이사부를 전쟁의 선봉에 내세워 백제와 가야 정벌에 나서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진흥왕의 정복전쟁에는 이사부와 거칠부, 김무력 등의 귀족들이 대거 동원됐다. 또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화랑제도를 만들어 귀족은 물론 서민들의 자재 중에서도 자질이 뛰어난 인재를 동원해 새로운 군사세력으로 양성했다. 진흥왕은 전쟁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다. 연접한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동향을 철저하게 파악 분석했다. 가장 먼저 형제의 연을 맺고 있던 백제의 허술한 곳을 공격해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기름진 영토를 확보했다. 이어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는 등 서로 치고받는 전쟁을 벌여 지친 틈을 노려 이사부 장군을 앞세워 백제와 고구려의 2개 성을 모두 빼앗았다. 진흥왕은 또 거칠부를 대동해 고구려로 진격해 10개 군을 빼앗는 등 본격적으로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진흥왕은 계속 북진정책을 펼치며 고구려를 공격해 함경도,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 비열흘주, 북한산주 등을 설치하며 신라시대 최고의 영토를 확장했다.진흥왕이 확보한 땅에는 북한산비, 창녕비, 함초령비, 마운령비 등의 순수비를 세워 넓은 지역의 백성들을 다스렸다. 진흥왕은 전쟁으로 확보한 지역의 백성들에 대한 포용정책을 펼쳤다.세금을 면제해주고, 죄지은 죄인들을 용서해주는 한편 귀족들의 자녀들을 정복한 땅에 이주해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등의 융화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진흥왕의 전략으로 귀족세력은 크게 분산되고 왕권에 대한 견제는 자연스럽게 옅어졌다. 대가야도 완전히 정복해 신라의 문화를 더욱 섬세하고 아름답게 발전시켰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스토리텔링: 흥륜사 이슬진흥왕은 타고난 무인의 기질로 귀족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복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궁궐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궁안의 정치에는 소홀하게 됐다. 이 바람에 태자 동륜은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여성편력에 소진하다 결국 후궁의 담을 넘다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진흥왕은 오랜 전쟁에 지치기도 했지만 아끼던 태자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과 나라의 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진흥왕은 전쟁에 나가기보다 법흥왕과 아들의 영생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왕의 기운이 쇠약해진 틈을 귀족들이 파고들었다. 가장 측근이었던 거칠부가 어느새 안방의 주인으로 자리잡은 후궁 미실과 손을 잡고 궁궐 내외부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왕의 보폭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던 미실이 거칠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왕이 죽은 태자 동륜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려는 의도를 꺾고, 다스리기 쉬운 둘째 아들 금륜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거칠부와 미실은 각자의 욕심으로 금륜에게 접근했다. 거칠부는 금륜에게 “왕으로 밀어줄 터이니 나를 상대등에 책봉하라”고 요구했고, 미실은 “당신을 왕좌에 앉게 하면 나를 왕비로 삼아야 한다”는 말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고 은밀하게 일을 추진했다. 거칠부는 이미 북벌전쟁의 선봉장으로 참여했던 공로를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국사를 편찬하며 내정에도 깊숙이 참여해 이사부의 자리를 대신해 신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흥왕이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 황룡사와 흥륜사를 오갈 때를 기회로 삼기로 했다. 거칠부와 미실은 특히 사역이 좁은 흥륜사 법회에 참여할 때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거칠부는 전략가답게 진흥왕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치밀하게 세웠다. 왕이 법회에 참여하는 시간을 계산해 그의 뛰어난 친위부대에 흥륜사의 안과 밖을 철저하게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거칠부는 진흥왕의 호위무사들을 하나둘 제거하고, 자신의 심복들을 호위무사로 심었다. 거사일은 진흥왕이 법흥왕과 아들 동륜을 위해 제를 올리는 날이었다. 진흥왕이 슬픔에 빠져 흥륜사에서 1주일이나 제를 올리는 동안 병사들은 절의 안과 밖을 철저하게 에워쌌다. 이러한 기미를 절의 승려들이 먼저 알아차렸지만 승려들은 아무런 대응책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법회만 열며 동향을 살필 뿐이었다. 진흥왕은 법회를 마치는 쯤에 거칠부의 뜻을 알아차리고 조용하게 물러나기로 했다. 이미 기가 꺾여버렸고, 왕좌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 정복군주로 전장을 누볐던 진흥왕도 선대 법흥왕의 뒤를 따라 흥륜사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