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23 >-태종 춘추공(하)

태종 무열왕은 신라에서 여러 가지 기록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최초의 신라왕이 되었다. 죽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라왕릉 중에서 귀부가 있는 비석이 최초로 나타난 왕릉이기도 하다. 비석의 몸돌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은 귀부와 이수는 최고의 예술적인 가치를 자랑하며 국보로 지정됐다. 김춘추는 당나라의 힘을 얻어 결국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18년 만에 그의 딸과 사위에 대한 원한을 갚고,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김춘추는 누구보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사리가 깊었다. 먼 앞날을 예측하는 눈도 밝아 전쟁에 대한 전술전략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김춘추는 51세에 왕위에 올라 백제 의자왕의 무릎을 꿇리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한편, 후계 구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위해 김유신과의 이중적 혈연관계를 맺기도 했다. 당나라와의 협력관계 유지를 위해 둘째 아들 인문을 당나라 황실 내부 깊숙하게 심어두었다. 김인문은 당의 정보를 신라에 전달하는 한편, 당나라가 신라의 우방으로 남을 수 있도록 상당한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는 태종 춘추공에 대한 기록을 길게 늘여 소개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단락을 나누어 간략하게 줄여 소개한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3)당나라 고종은 백제가 멸망 이후에도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전쟁을 일삼자 문무왕 5년 665년에 장군 유인원을 보내 신라와 백제가 서로 형제의 의를 맺어 화친하고, 영원히 당나라에 복종한다고 맹세하게 했다. 668년 당나라 군사가 평양에 주둔하며 신라에 군수물자를 요청했다. 문무왕이 적군 진영 깊숙이 있는 당나라 군사에게 누가 수송의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자, 김유신 장군이 나서 군량 2만 섬을 수송하고 돌아왔다. ‘백제고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강물이 있다.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최후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을 할 지언정 남의 손에 의해서 죽지는 않겠다” 하면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당나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쳐서 평정하고 또 신라를 칠 계획으로 머물고 있었다. 유신이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당나라 군사에게 짐이라는 독약을 먹여 모조리 죽여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지금 상주 경계에 당교가 있다. 이곳이 그들을 묻은 땅이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후, 신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백제의 남은 적을 추격하여 잡게 했다. 군사가 주둔한 한산성에 고구려와 말갈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해서 마주 싸웠으나 포위를 풀지 못하더니 5월11일부터 6월22일 사이에 신라군사들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묻기를 “어떻게 할 계책이 없을까?” 하고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이 “형세가 급하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신의 술법으로만 구할 수가 있습니다”라 했다. 이에 성부산에 제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빌었더니, 갑자기 큰 항아리 만한 불빛이 번쩍거리며 제단 위로 나와 즉시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적들이 공격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번쩍번쩍하는 불빛이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돌을 쏘는 포 30여 곳을 때려 부수었다. 적군의 활과 화살 그리고 창칼들은 주판알이 흩어지듯 산산이 부서지고 병사들은 모두 땅에 쓰러졌다. 태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니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 개나 되는 멧돼지를 바치는 자가 있었다. 해석하는 사람이 “이것은 필시 천하를 통일 할 좋은 징조입니다”라 했다. 태종 무열왕 때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과 아홀을 쓰게 되었다. 바로 자장법사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가지고 와서 전한 것이다. 신문왕 때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짐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천하를 통일하셨다. 그래서 태종 황제로 하였는 데 너희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라는 왕의 호칭을 사용하여 천자의 이름을 범한 것은 불충하니 빨리 호칭을 고칠 것이다”라 했다. 신라왕이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거룩한 신하인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태종으로 한 것이오”라 했다. 당나라 황제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외치기를 33천의 한 분이 신라에 내려와 유신이 되었다’는 기록을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을 꺼내다 보고 놀랍고 두려워 다시 사신을 보내 태종이라는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권력 이양김춘추는 선덕여왕 당시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된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왕권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진해지면서 서서히 차기 권력 구도에 대해 치밀한 작전을 빠르게 세우기 시작했다. 김유신을 앞세워 대신들을 지지 세력으로 우회시켰다. 김유신 옆에는 자신의 큰 아들 법민을 밀착시켜 감시하면서 친위세력으로 항상 가까이 두었다. 반면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다음 자연스럽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구도를 짜 맞추었다. 진덕여왕 당시 상대등이자 완력으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알평을 고립시키고, 김유신을 중심으로 대신들의 지지층을 두텁게 만들어 진골 출신이지만 왕위에 오르는 일을 착착 순조롭게 진행했다.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지만 두 가지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첫 번째가 딸과 사위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백제를 치는 일이었다. 당나라 군사의 힘을 업고 백제 의자왕을 무릎 꿇게 하고, 윤충의 목을 베어 복수를 이룬 춘추는 하늘을 보며 다시 한 번 포효했다. 두 번째는 절대적인 우방이자 절친인 최고의 무신 김유신을 왕좌에 대한 욕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한편, 자신의 우호세력으로 두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미리 간택하고, 처남인 김유신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이중적인 혈연관계로 두텁게 옭아맸다. 김춘추의 머리는 촘촘한 전략으로 짜여진 그물 같다. 그는 김유신이 처음 백제와의 전투에서 돌아와 좌절에 울부짖으며 단석산으로 들어가 수련에 몰두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이어 김유신이 보검을 차고, 한층 깊어진 눈으로 돌아왔을 때 절대 그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춘추는 김유신의 경지가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를 낼 수조차 없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짐작했다. 이어 유신과의 친분을 두텁게 쌓으면서 서둘러 그의 누이와 결혼해 확실한 우방으로의 관계를 맺었다. 춘추는 집요하다. 아들이 태어나자 아내와 아들을 수시로 유신의 집으로 보내 교류를 두텁게 쌓았다. 특히 아들이 걸음걸이가 자유로워질 무렵부터 유신에게 사정하여 사제지간의 정을 맺도록 했다. 춘추의 아들 법민은 외삼촌 김유신으로부터 검술과 전쟁의 기술을 오롯이 물려받은 장수로 성장했다. 김유신 또한 전쟁터에서 적군 깊숙이 들어가 적진을 혼란스럽게 휘저을 때는 뒤를 받쳐줄 실력 있는 우군이 필요했다. 법민은 빠르게 무술을 배워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외삼촌을 따라 전쟁터에 나섰다. 법민은 뛰어난 자질을 가진데다 유신의 신적인 기술의 지도와 실전에서 익히는 검법으로 빠르게 실력을 쌓았다. 고구려와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법민이 앞장을 서고, 유신이 뒤를 호위하는 무사가 되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법민은 전쟁을 끝내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문무왕 법민은 칠순에 이른 외삼촌이자 무술의 스승인 김유신을 전쟁의 선봉에 세울 수 없어 자신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선봉장이 된 것이다. 김춘추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김유신의 신력을 가진 태산 같은 마음도 아들 같은 애제자이자 조카 법민, 즉 문무왕을 꺾고 왕위에 올라야겠다는 욕심은 애초부터 티끌만큼도 가질 수 없었다. 오히려 상대등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아오는 김유신과 아들 법민의 손을 꽉 잡고 신라를 부탁하면서 이순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김유신은 수염이 희끗희끗한 턱이 떨리지 않게 어금니를 깨물면서 법민을 도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하겠노라 다짐하며 무열왕의 눈을 감겨 주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선덕여왕 유언이어 김유신·춘추 등에 업고 대업향해 착착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4촌 여동생이다. 선덕여왕은 죽으면서 성골인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어가도록 유언을 했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진덕여왕의 즉위에 힘을 보탰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아버지 쪽으로 보면 6촌이지만, 어머니 쪽으로 보면 모두 이모가 된다. 진평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어렵게 정책적으로 제도를 마련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선덕여왕대에 이르러 백제와 고구려 등과의 전쟁에 휘말려 다시 진골세력, 귀족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게 됐다. 진덕여왕은 가까스로 알천공, 조카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지지세력에 힘입어 왕위를 유지했지만, 김춘추가 왕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설도 만만찮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춘추의 아들 법민의 외교에 힘입어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겨우 다져가고 있었다. ◆삼국유사: 진덕왕제28대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라, 친히 태평가를 지어 비단을 짜서 태평가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 이것을 당나라에 가져다 바쳤다. 당나라 황제가 가상히 여겨 이를 포상하여 계림국왕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태평가의 글은 다음과 같다.위대한 당나라가 왕업을 열었으니/ 높디높은 황제 포부 창성하리라./ 전쟁이 끝나니 천하가 평정되고/ 문치 닦아 옛 왕들을 따르시네…(중략)…/산악의 정기는 보필할 제상을 내리시고/ 황제는 충성스런 어진 인재 등용하네./ 5제 3황 닦은 덕이 하나로 이루어져/ 우리 당나라 황실 밝게 비추리. 이 왕의 시대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죽지랑의 아버지), 무림공(호림공, 자장의 아버지), 염장공, 유신공이 남산 오지암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때 큰 호랑이가 좌석으로 뛰어 들어왔다. 여러 공들이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웃고 이야기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맨 윗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런 땅이 있어서 큰일을 의논할 때는 대신들이 반드시 이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은 꼭 이루어졌다. 네 영지 중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이고, 둘째는 남쪽의 오지산이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이 왕 때에 처음으로 설날 아침에 예를 행하였고, 시랑이라는 호칭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흔적△진덕여왕릉: 진덕여왕의 릉은 현곡면 오류리 산48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사적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주변이 소나무숲으로 우거져 있고, 진입로는 등산하기 좋게 조성되어 있어 가볍게 산책하듯 오를 수 있어 탐방객들이 기분 좋게 접근할 수 있다. 진덕여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승만이다. 진평왕의 친동생인 국반갈문왕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 박씨이다. 진덕여왕은 자질이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무척 총명했다고 한다. 진덕여왕은 즉위하면서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김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는 등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이어 김춘추 등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해 외교관계를 두텁게 하면서 군사적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는 정책을 썼다. 김유신을 압독군주로 임명해 백제의 공격을 막는 등 나라를 지키는 무장의 선봉으로 삼았다. 진덕여왕은 649년 의관을 중국식으로 하고, 연호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당나라의 앞선 문물을 대거 받아들였다. 정치적으로 중국에 예속되는 경향이 커졌다는 평도 있다. 반면 집사부를 설치하고, 알천, 죽지, 김춘추, 김유신 등의 친위세력을 중용해 왕권 강화에 나섰다. 왕은 또 651년부터 새해를 맞아 백관들이 왕에 대해 인사를 행하는 정조하례제를 실시했다. 이를 두고 현대의 신년교례회의 효시라는 해석도 있다. △도당산과 화백회의: 신라시대 네 곳의 영지 중 남쪽의 오지산은 도당산을 말한다. 도당산은 남산의 북쪽 봉우리다. 남산을 황금색 자라를 닮은 모양으로 보아 금오산이라 불렀다. 이때 금오산의 북쪽 도당산은 자라의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신라의 대신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회의는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채택하지 않는 화백제도였다. 현대의 민주주의와 같은 맥락의 제도로 신라가 일찍부터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해석이다. 경주시는 이에 도당산에 화백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신라시대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신라의 천년궁성 월성에서 월정교를 지나 도당산을 거쳐 남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탐방객들은 이 등산로를 따라 남산을 오를 때 대부분 도당산의 화백정에서 땀을 훔치고, 목을 축이며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 기회가 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덕여왕의 사랑진덕여왕은 미모가 빼어나 많은 사람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죽지랑, 원효, 김유신, 자장, 의상 등의 걸출한 인물들도 알게 모르게 연인의 대상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특히 6부대신의 위치에 있던 죽지랑의 아버지 술종공과 자장의 아버지 무림공(호림공)은 세력의 강화를 위해 은근하게 며느리로 삼으려는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죽지랑은 문무를 겸비하고 진덕여왕이 중용하기도 했다. 자장은 일찍이 중국으로 유학의 길에 올라 불교에 심취해 속세와의 인연을 멀리하며 진덕여왕과의 인간적 관계에는 경계를 두었다. 백제와의 전투에서 유신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운 화랑 원효의 기상과 사상적으로 무장한 거침없는 달변에 진덕여왕은 흠모의 마음을 키웠다. 원효의 훤칠한 외모와 늠름한 기상을 대한 여성들은 진덕여왕처럼 단번에 빠져들기 마련이었다. 한창 꿈을 키우며 나라의 동량으로 성장하던 원효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사춘기이기도 했던 원효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지게 했고, 끝내 불도의 길을 걷게 했다. 진덕여왕은 삼년상을 마친 원효를 궁으로 불러들여 자신이 품고 있던 흠모의 정을 노골적으로 털어 놓고, 동반자의 길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원효는 이미 불자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정한 다음이라 진덕여왕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구도의 길을 떠났다. 결국 진덕여왕은 나라의 일은 상대등 알천공을 비롯한 대신들에게 맡기고, 인간적인 깊은 고뇌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끝내 자신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한 여왕은 쓸쓸하게 고독한 최후를 맞았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김춘추의 여식 요석은 원효를 향한 마음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기획연재 중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새로운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인위적으로 구성한 픽션입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절대권력 양보하고 62세에 왕위 올라 토함산 ‘동악대신’ 되어 죽어서도 신라 보살피다

석탈해는 62세의 늦은 나이로 신라의 4대 임금으로 등극해 23년간 통치했다. 지혜가 뛰어난 것이 남해왕의 눈에 들어 공주를 아내로 얻고, 결국 왕위에까지 오르면서 석씨 집안을 왕손으로 잇게 했다. 역사에 왕들이 백성들을 위해 진정으로 걱정한 내용이 더러 드러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까지 백성들을 위한 노력을 이해하게 하는 대목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되어 백성과 나라를 위해 동해를 지키겠다고 전한 기록이 있고, 김유신 장군과 미추왕 또한 죽어서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석탈해왕은 죽어 동악의 신이 되어 나라를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어, 현대 정치사에도 교훈이 된다. 삼국유사를 통해 석탈해와 김알지의 지혜로움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현명하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해 절대적인 권력도 양보하고 배려하는 진정한 용기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석탈해는 유언으로 얻은 왕권을 처남에게 양보했다가 늦게 왕위에 올랐다. 김알지는 석탈해왕으로부터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결국 왕위를 사양했다. 여기에서 탈해왕의 지혜와 용기를 삼국유사를 통해 들여다본다. ◆제4대 탈해왕탈해 이사금이다. 남해왕 때였다. 가락국의 바다 가운데 어떤 배가 떠와서 정박하려 했다. 그 나라의 수로왕과 신하들이 북을 두드리며 맞이하고 머물게 하고자 하는데, 배는 도리어 달아나버렸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마침 포구에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살았는데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노파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 바다에 바위가 없었거늘 웬 까닭으로 까치가 모여 우는가”라며 날랜 배를 보내 살펴보게 했다. 까치는 한 배 위에 모여 있었다. 배 안에 궤짝 하나가 실렸는데 길이가 20자요 너비가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 수풀 한 귀퉁이에 두었지만,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하늘을 향해 맹세를 하자 곧 열렸다. 그 안에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와 일곱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7일 동안 보살펴주었더니 “우리는 본디 용성국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28용이 사람으로 태어나 5~6세부터 왕위에 이어 올라, 만백성들이 성명을 바르게 닦도록 하였습니다. 여덟 단계의 성골이 있었는데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요. 마침 우리 아버지 임금 함달바가 적녀국 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으나, 자리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자식을 얻고자 기도드리기 7년 뒤 큰 알 하나를 낳았지요. 이에 왕께서 여러 신하를 모아 의논한 결과, 사람이면서 알을 낳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라 상서롭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궤짝을 만들어 나를 비롯한 일곱가지 보물, 그리고 노비들을 넣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닿는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일으켜라’고 빌었습니다.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지켜주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말을 마치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잡고 노비 둘을 이끌고 토함산 위로 올라가 돌무덤을 쌓고 7일 동안 머물렀다. 성 안에서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 봉우리를 보니 마치 초승달과 같아 오래 머물만한 형세였는데 내려가 살펴보니 호공의 집이었다. 간사스럽지만 꾀를 내기로 하였다. 집 곁에다 숫돌과 숯을 몰래 묻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집에 가 짐짓 꾸짖는 투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 선조 때 집이오.” 호공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말다툼이 일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자 관아에 아뢰었다. 관리가 물었다. “무엇으로 네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우리 집이 본디 대장간을 했는데 잠시 다른 지방에 가 있는 사이 남이 들어와 산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따라 해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탈해는 이 집을 차지해 살게 되었다. 그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큰 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는데 이 사람이 ‘아니부인’이다. 탈해가 동악에 올라 돌아볼 때였다. 하인에게 마실 물을 찾아보게 했다. 하인은 물을 길어오던 길에 먼저 입맛을 보고 바치려 하자, 그 물 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보고 꾸짖자 하인은 “이제부터는 멀건 가깝건 감히 먼저 입맛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러자 입이 떨어졌다. 이때부터 하인은 완연히 복종하고 감히 속이려 하지 않았다. 지금 동악에 우물 하나가 있어, 흔히 ‘요내정’이라 부르는데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은 광무제 중원 6년 정사년(67) 6월에 왕위에 올랐다. 석(昔), 곧 옛날 이곳이 내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제 것으로 만들었기에 성을 석 씨로 했다. 어떤 이는 이렇게도 말한다. “작(鵲), 곧 까치가 울어 궤짝을 열었으므로 조(鳥)자를 떼어내고 성을 석 씨로 하고, 궤짝을 해(解) 곧 열어, 알을 탈(脫) 곧 꺼내어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했다.” 23년간 왕위에 있다가 건초 4년 기묘년(79)에 죽어 소천의 언덕바지에 장사지냈다. 뒤에 신령으로 나타나 “내 뼈를 매장하지 말라”고 하므로 열어보았더니, 해골의 둘레가 석 자 두 치요, 신장이 아홉자 일곱치였으며, 이가 엉겨 하나인 것처럼 가지런하였다. 뼈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었으니 천하무적의 힘센 장사의 뼈라 할 만했다. 부수어 소상을 만들고 대궐 안에 봉안했다. 신령이 다시 나타나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하라”고 하여 그곳에 모셨다. ◆흔적: 탈해왕릉, 숭신전, 탄강비석탈해왕의 흔적은 그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것들만 전한다. ‘동악’이라 부르는 토함산에 있었다던 우물과 장사지낸 흔적은 없다. 그가 처음 탄강한 아진포 인근, 지금 양남면 나아리 해변의 탄강비, 죽음 이후에 조성된 왕릉, 그를 추모하는 사당 숭신전 등이 있다. ◆탄강비: 석탈해왕탄강비는 경주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자력본부 정문 옆에 있다. 주변은 월성원전이 넓게 공원으로 조성했다. 탄강유허는 경북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이곳을 삼국사기는 ‘진한 아진포구’라 하고, 삼국유사는 ‘계림동하서지촌 아진포’라 기록하고 있다. 하서리 마을은 탄강비 남쪽에 있다. 유허비는 용머리의 좌대나 이수는 없지만, 조선 헌종 11년 1845년에 비석과 비각을 세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탈해왕릉: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남쪽 자락 송림에 높이 4.5m, 넓이 15.5m 규모의 탈해왕릉으로 전하는 능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성북의 양정 언덕에 장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수장했다가 소상을 만들어 동악에 모셔 ‘동악대신’이라 전한다. 왕릉 앞에는 탈해왕이 탄생한 경위와 62세에 왕위에 올라 23년간 제위에 있었다는 것, 동악신이 된 내용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숭신전: 신라 4대왕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표암 남쪽에 사당을 지었다. 이 사당은 1898년 권상문 군수의 제안으로 후손 석필복이 월성 안에 지었다. 1906년에 ‘숭신전’이라는 편액을 받았다. 월성 안에 있던 사당을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지금도 처음 숭신전이 있었던 월성에는 돌로 만든 팔각형 기둥 두 개가 남아 있다. 숭신전 남쪽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영녕문과 경엄문을 지나면 3칸 맞배집으로 건축된 숭신전이 나온다. 영녕문을 열고 들어서면 상의재와 상인재가 전통한옥의 형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홍살문과 영녕문 사이에 1921년에 세운 ‘신라석탈해왕비명’ 비와 비각이 단아하게 세워져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탈해왕의 지혜탈해는 신라와는 뱃길로 수천 리나 떨어진 용성국의 사람이다. 그는 용성국의 여덟 번째 왕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신체가 특별하게 발달했다. 특히 배움이 빠르고 무술습득 또한 뛰어났다. 결국 위협을 느낀 형들의 모함으로 축출되었다. 다행히 그를 아끼던 대신들이 무기와 식량, 보배들을 큰 배에 가득 실어 호위 병사들과 함께 보냈다. 탈해는 오랜 세월 항해로 지쳤다. 처음 반도에 이른 곳이 가락국이다. 화살과 화공을 피해 신라 아진포로 접안하는데 겨우 성공했지만, 모두 탈진해 실신한 상태였다. 마침 혁거세의 주치의를 담당했던 아진의선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탈해의 신체와 병사들이 가진 세련되게 다듬어진 무기들을 보고는 이들을 호위 병사로 양성하겠다는 욕심으로 치료했다. 아진의선의 탁월한 치료에 의해 탈해는 7일 만에 깨어났다. 원래 잔꾀가 많은 탈해는 깨어나면서 아진의선의 눈에 들기 위해 발톱을 감추고 순한 양처럼 행동해 결국 해안방위를 책임지는 장군으로 임명받게 됐다. 탈해는 세력을 키우면서 해안보다 비옥한 토지가 있는 서라벌로의 진출을 호시탐탐 노렸다. 토함산에 올라 자신의 세력을 넓혀나갈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지세를 부지런히 살폈다. 그러다 수비와 공격에 유리한, 호공의 땅이었던 월성을 잔꾀로 빼앗았다. 당시 신라 2대 남해왕은 탈해의 지혜와 무력, 지도력 등에 반하여 사위로 삼고, 왕위를 이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탈해는 그때까지 자신의 세력이 미약해 정권을 안정적으로 펼쳐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간파하고, 남해왕의 아들이자 처남인 노례왕이 왕권을 잇도록 양보하고 고위직을 택했다. 남해왕 때부터 탈해는 주요 관직에 있으면서 국정을 보살피는 한편, 부지런히 세를 불렸다. 남해왕의 아들 노례왕이 34년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탈해는 62세에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때까지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는데 부족함을 느끼고 탈해는 지략과 무술에 뛰어난 김알지를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포섭해 태자로 책봉했다. 그렇지만 김알지 또한 정세에 밝아 덥석 왕위에 오르지 않고, 노례왕의 아들이 왕위를 잇게 하고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데 내실을 다졌다. 석탈해와 김알지의 지혜로운 배려와 감각적이고 세심한 주의가 신라를 박, 석, 김의 시대로 이어가는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이 되었다. 현시대 정치인들이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